73.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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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죄
2022.10.12.
경기도의 끄트머리에 있는 혜수 부모님이 사는 작은 주택.
승원은 집 앞에 차를 주차한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벨을 누르자마자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린다.
“승원아, 왔니?”
“잘 계셨어요?”
“어서 들어와라. 차 안 막혔어?”
“별로요.”
혜수의 아빠 신정섭이 시원하게 웃으며 승원을 맞아주었다.
언제 봐도 깔끔한 차림의 정섭이다. 비싼 옷은 아니지만 정성껏 관리하는 듯 때 묻은 곳, 헤진 곳 하나 없다. 얼굴 또한 늘 그랬듯 싱글벙글 미소를 띠고 있다.
“집에 혼자 계셨어요?”
승원이 이모 지영을 찾으며 두리번거리자 정섭이 먼저 말해준다.
“네 이모는 일하러 갔어. 주말이라 식당에 손님이 많다네. 그렇지 않아도 너 온다고 하루 빼면 안 되냐고 사장한테 말했는데 절대 안 된다 그랬단다.”
“아쉽네요.”
“웃긴 게 뭔 줄 알아? 너 온다고 새벽같이 일어나서는 네가 좋아하는 잡채를 하지 뭐냐.”
그러고는 구시렁거린다. 생일을 맞은 사람은 나인데 남편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조카 잡채나 해주고 앉았다고.
“하하, 이거 받으세요.”
승원이 건네는 종이 백을 본 정섭의 눈이 반짝 빛난다.
“이건 뭐냐?”
“생신 선물입니다. 이거는 제가 산 건데 안동 지역에서 나는 소주예요. 좋아하실 것 같아서 사 왔습니다.”
“정말!”
애주가인 정섭이 눈을 더욱 반짝인다.
“그렇지 않아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내 돈으로 사기에는 손이 벌벌 떨리지 뭐냐.”
“이런 건 남이 사줘야 제맛이죠.”
“역시, 승원이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이건 뭐냐?”
“이건 혜수가 산 거예요. 전에 뵀을 때 벨트가 낡았더라고 벨트를 샀대요.”
“어이쿠, 우리 딸내미. 그런 건 또 찰떡같이 알고 산단 말이지.”
오늘은 혜수의 아빠 정섭의 생일이다.
응급실 당직인 혜수는 같이 못 가 아쉽다는 말과 함께 제가 산 선물을 승원의 손에 들려 보냈다. 저 대신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주고, 술친구도 해주라는 말과 함께.
승원은 혜수나 정섭만큼 술이 세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먹고 온 참이다.
“혜수가 벨트 이걸로 바꿔 하신 다음에 인증샷 찍어오래요.”
“우하하, 알았어, 알았어. 이거 고마워서 어쩌나.”
마음에 꼭 드는 선물 세례에 정섭은 더욱 기분 좋게 웃었다.
벨트를 신줏단지 모시듯 잘 모셔놓은 정섭은 승원을 끌어다가 식탁 의자에 앉혔다.
“여기 앉아 있어. 금방 차려줄게.”
“저도 도울게요.”
“됐어. 다 해놨어.”
정섭은 몇 가지 음식을 내놓았다. 승원이 좋아한다는 잡채와 정섭이 좋아하는 갈비찜과 미역국, 종류별로 담은 김치도 나란히 놓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소주잔도 가져와서는 승원과 자신의 앞에 놓은 뒤엔 소주병을 휘휘 몇 번 돌리고는 뚜껑을 땄다.
“맛있겠지? 올해 생일은 우리 둘이서 먹자.”
“오붓하고 좋네요.”
“허허, 그렇지? 자, 받아라.”
곧 승원의 잔에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찼다. 승원은 잔을 들어 올려 정섭의 잔에 부딪혔다.
“생신 축하드려요.”
“고맙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그래. 정말 고마워.”
정섭은 술잔을 깨끗이 비워내고는 입을 훔쳤다.
“크, 죽이네. 이거 진짜 맛있는데?”
병을 들고 다시 라벨을 확인한다.
“내년에도 또 이거 사 오너라. 아니, 앞으로 매년 이걸로 사 와.”
“…….”
답이 없는 승원에게 또 재촉한다.
“왜 답이 없어? 내년에도 이렇게 축하하러 올 거지?”
‘내년에도…….’
지금 정섭은 일부러 앞으로도 이 술을 사 오라 말하고 있다.
정섭은 이미 알고 있다. 승원이 제 엄마 지선과의 연을 끊어내려고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승원이 이모와 이모부, 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것도 눈치챘을 것이다.
“……제가 무슨 염치로 여기를 드나들겠습니까. 곧 소송 결과도 나올 거예요.”
“…….”
“이곳에 오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입니다.”
“무슨 소리. 처형과 네 관계가 그렇게 됐다고 해서 너와 우리 가족의 관계마저 끊어진 것은 아니야. 그 긴 세월 동안 난 널 진심으로 내 조카로 대했다. 그건 우리 집사람도, 널 친오빠처럼 따르는 혜수도 마찬가지야.”
“……혜수는 아직 모릅니다.”
“알아. 네가 알리고 싶지 않다고 하면 우리도 가만히 있으마.”
“조만간 알려야지요. 속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다만 제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혜수에게는 제가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렴. 네가 편한 대로 해야지.”
씁쓸하게 웃는 승원을 보며 정섭은 잡채 접시를 밀어주었다.
“얼른 먹어 봐. 네 이모가 오랜만에 한 건데 참 맛있어. 네가 올 때만 이런 거 얻어먹지, 아니면 먹지도 못해.”
“하하, 네.”
둘은 지영이 차려준 반찬을 안주 삼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다.
“참, 얼마 전에 병원에 오셨다 가셨다면서요. 연락하지 그러셨어요.”
“바쁠 텐데 무얼.”
“혜수도 자기 보지도 않고 다녀가셨다고 섭섭해하더라구요.”
“문자 남겼으면 됐지 뭘 직접 봐. 1년 차가 나 보러 올 틈이 어딨어. 그 시간에 쉬어야지. 안 그래?”
“하하, 맞아요.”
“나 말단 때는 틈만 나면 화장실에 가서 벽에 머리 대고 자기 바빴어.”
처절한 표정과 말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정섭을 보며 승원은 쿡쿡 웃었다. 자신의 1년 차 레지던트 생활도 생각나서다. 이틀에 두 시간을 자면 많이 잤다고 하던 그때가.
“전 그래도 침대에서 잤는데요.”
“우리는 1인 1침대가 어딨어. 누런 장판 바닥만 해도 감지덕지지. 그 좁은 방바닥에 서로 제가 눕겠다고 아웅다웅했다고. 너 따위가 감히 어딜 눕냐고 저 구석에 가서 벽 보고 서 있으라고 했던 것 생각하면. 크으.”
정섭이 생각만 해도 싫은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라때는 말이야…….”
운을 떼던 정섭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큭큭 웃는다.
“나 방금 꼰대 같았냐?”
“아니요. 꼰대는요. 재밌어요.”
“그래?”
“그러니 더 말씀해 주세요.”
“좋아!”
기분 좋게 술에 취했겠다, 눈앞에는 좋아하는 음식과 사랑하는 조카도 있겠다. 기분이 쭉쭉 하늘로 올라간다.
“그럼 또 어떤 일이 있었냐면…….”
한창 자신의 젊을 때 이야기를 하던 정섭이 일순 입을 꾹 다문다.
“왜 그러세요?”
“하아.”
잔에 술을 채운 정섭은 잔을 단번에 비워냈다. 그러더니 또 입을 꾹 닫는다.
“왜 한숨만 쉬세요.”
“하아.”
“…….”
정섭이 어떤 기억을 떠올렸는지 알 것 같다. 정섭의 잔에 술을 채워준 승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생활 관둔 것, 후회하지 않으세요?”
정섭이 말없이 잔을 비우고는 채운다. 그러더니 그 잔을 들어 또 그대로 비웠다.
“크으. 갑자기 술이 왜 이렇게 쓰냐.”
“…….”
“흐으. 후회? ......후회할 때도 있지. 우리 집사람 설거지하러 다니는 거 보면 죄스럽지. 오늘도 일 나가는 거 보고 많이 후회했지.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어쩌자고 그랬을까.”
“…….”
“나 같은 남자를 만나가지고는. 하아.”
아무리 옛날만큼은 돈을 못 버네 하여도 그곳에서 죽기 살기로 버텼다면 지금보다는 주머니 사정에 나았을 것이다.
아내 지영이 지금까지 일을 할 필요도, 딸 혜수가 의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장학금을 받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일 자체를 관두실 필요는 없지 않았나요.”
“……나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어. 내 그 욕심 때문에 모든 게 벌어졌다 생각을 하니. ……하아.”
한숨을 쉰 정섭은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그렇게 연거푸 석 잔을 내리 비웠다.
승원은 또 잔을 따르려는 정섭의 팔을 잡았다.
“그 일 때문에 지금까지 괴로워하신 것 알아요. 이제 내려놓으실 때도 됐잖아요.”
“넌 꼭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처럼 말한다?”
“하하, 그건 아니에요.”
정섭이 모종의 사고 이후 인생의 변환점을 맞은 것만 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해주지 않아 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 오랜 세월을 정섭 혼자 속앓이했다는 것만 알뿐.
“알려주실래요, 그럼?”
“…….”
말없이 또 술만 기울이던 정섭이 승원에게 흘긋 눈짓한다.
“내가 말해주면 넌 계속 이모부라 부를 거야? 지금까지 계속 이모부의 이 자도 꺼내지 않았어.”
“…….”
“난 너를 정말 내 가족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네가 날 가족이라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해줄 수 있어.”
“…….”
“그동안 처형이 네게 모질게 대했던 것. 우리도 다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관여하지 못해서 미안해. 와이프와 언니의 관계가 또 있다 보니 적극적으로 중재하지 못했어.”
“……아니에요, 제게 충분히 도움을 주셨어요. 늘 감사하게 생각해요.”
승원이 자랄수록 지선은 점점 본성을 드러냈다.
초등학교 몇 학년이었더라.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승원은 가정교육을 목적으로 내복만 입은 채로 처음 집 밖으로 쫓겨났다.
처음이 어려웠던 건지 그날 이후로 지선은 심심하면 승원을 쫓아냈다. 그럴 때마다 승원은 먼 거리를 걸어 정섭의 직장으로 찾아갔고, 정섭은 매번 따뜻한 옷과 뜨끈한 밥을 내주었다.
허름하고 꾀죄죄한 차림으로 일터에 찾아가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음에도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기꺼이 맞아준 정섭이었다.
그것 때문에 민원이 들어와 회사에서 두어 번 해고당한 적도 있었다.
“승원아.”
“네.”
“그러고 보니 이것도 후회되는 일이구나. 널 그리 내버려 뒀던 것.”
“…….”
“미안하다.”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왜 이리 요즘엔 후회만 하는지 모르겠네. 늙어서 그런가.”
“…….”
대답 없는 승원에게 정섭이 또 재촉한다.
“그래서. 내가 말해주면, 이모부라 계속 부를 거야?”
“그건.”
“네가 그렇게 해준다면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겠는데 말이야.”
“…….”
뭔가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왜 이렇게 연결이 되지?
이리저리 생각하던 승원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럴게요, 이모부.”
이모부란 소리에 빙긋 웃던 정섭은 희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보자……. 십오 년, 아니 그보다 두세 해 전인가. 돈 벌려고 한주라는 곳에 갔을 때였어. 거기가 꽤 오지였는데.”
***
혜수는 병동으로 올라갔다. 이제 수술 예정 환자 면담을 하고 오더만 다시 살펴보면 오늘의 일은 대충 끝이다.
“빨리하고 쉬자.”
그런데, 익숙한 얼굴이 혜수의 앞을 스쳐 지나간다.
“어? 할머니!”
“아이고오! 우리 선생님. 여기서 또 만나네. 이제 못 보는 줄 알았어.”
환자는 그 할머니였다. 그때 경애가 껌을 씹어도 된다 하여 마취 중 기도가 막혀 난리가 났던 할머니.
“장루 복구 수술하러 오신 거예요?”
“맞아. 안 그래도 주치의를 우리 선생님으로 해달랬는데 안 된다 그래서 얼마나 섭섭했다구.”
“하하, 그러셨어요? 지금 주치의 선생님도 잘하는 분이세요. 믿고 맡기셔도 돼요.”
“난 그때 그 선생만 아니면 돼.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뒤로 쏙 빠져서는 괜한 사람만 모함하고 말이야.”
사건의 주인공인 경애를 콕 찍어 싫다 말한다.
“난 남 속이고 시치미 뚝 떼는 인간이 제일 싫어!”
혜수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부터 경애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할머니,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나? 나야 한가하지. 병실에 누워서 수술 날만 기다리는데 안 괜찮은 게 어딨어.”
“그럼 제게 시간 조금만 내주세요.”
“그려. 뭐 재밌는 거라도 있어?”
혜수를 무척 신뢰하는 할머니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꼭지에서 기름이 나온다고 해도 믿을 기세였다.
“그럼 병실에 가 계실래요?”
“왜?”
“가보시면 알아요. 제가 바로 따라갈게요.”
“나 원 참, 싱겁기는. 알았어. 가 있을게.”
할머니를 병실에 앉혀놓고 혜수는 맞은편 병동으로 갔다.
대장 항문이 메인인 69병동 스테이션 구석에 모니터를 보고 있는 경애가 보인다.
또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미간에는 굵은 주름이 한가득이다.
혜수는 경애에게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언니.”
“뭐야?”
난데없이 나타나 말을 거는 혜수를 보며 경애가 더욱 인상을 썼다.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난 네가 싫다를 대놓고 표현하고 있었다.
“전에 제가 부탁드렸던 거 기억나요?”
“어떤 부탁?”
“꺼어…….”
“!”
껌이란 글자의 쌍기역을 꺼내자마자 경애가 벌떡 일어나 혜수의 입을 막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용히 말해. 기억나니까.”
혜수는 경애의 손을 치웠다.
“숨 막혀요.”
“그런데 그게 왜?”
“그때 제가 말 한마디만 해달라고 그랬죠?”
“어.”
“그거 이제 해주실 때가 됐어요.”
“지금? 여기서?”
“아니요. 요기 밖에 나가서 딱 삼십 걸음만 걸어가면 돼요. 그래 줄 수 있어요?”
“사, 삼십 걸음?”
“네.”
“…….”
경애가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
말 한마디 하면 이 거지 같은 빚을 없앨 수 있다. 그동안 신혜수가 언제 어떤 말을 시킬지 몰라 밤잠을 설치고는 했다. 드디어 그걸 끝낼 수 있게 된 거다.
빈말은 하지 않는 신혜수이니 시키는 대로 입 한 번만 떼면 모든 건 없던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삼십 걸음이란 건 병원 안이라는 거다. 바로 이 주위.
이곳에서 내가 손해 볼 일이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경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디야? 갈 테니 앞장서.”
혜수는 경애를 데리고 맞은 편의 이식혈관외과 병동으로 갔다. 경애가 눈을 부라린다.
“여긴 왜?”
“가보면 알아요. 열 걸음만 더 가면 돼요.”
미심쩍지만 다른 수가 없으니 따라는 가는데 의아하다. 여기는 왜?
앞서가던 혜수는 정말로 열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병실 앞에 멈춰 섰다.
“여기에요. 이리 와요.”
“뭘 하려는 건지, 정말.”
못마땅한 얼굴로 병실에 들어간 경애는 깜짝 놀랐다.
‘저 환자는!’
침대 위에 이전에 제가 껌을 씹게 하여 난리가 났었던 할머니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