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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그 어떤 신경안정제보다도 더 깊은 (72/110)


72. 그 어떤 신경안정제보다도 더 깊은
2022.10.08.


혜수를 바라보던 시선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그렇지만 진한 키스였다.

도영에 대한 원망과 미움도 이 순간만큼은 잊을 수 있는 감미로운 키스.

그와 체온을 나눌수록 감당할 수 없는 아찔함이 차오른다. 이제는 발갛게 익다 못해 온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뒤로 물러나 숨을 좀 고르려 했지만 도영이 목을 단단히 받치고 있는 탓에 그럴 수도 없다.


‘이제 그, 그만!’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 혜수는 온 힘을 다해 도영을 밀어냈고 그제야 끈질겼던 도영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고르자 도영이 손가락을 가져와 혜수의 젖은 입술을 쓸어주었다.


“보고 싶었어.”

“…….”

점막을 한동안 간질이던 손이 떨어져 나가고 도영이 다시 혜수를 당겨 안았다.


“……저도요.”

기쁘게 웃어 보인 도영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팔에 점점 힘을 주었고 혜수도 그 힘을 고스란히 느꼈다.


“팔은 안 아파요? 이제 괜찮아지신 거예요?”

“완전히 없어졌어.”

도영이 오른손을 쫙 펼쳐 앞뒤로 뒤집어 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조각 같은 손이 조명을 받아 빛난다.


“이번에도 신혜수, 네 덕분이야.”

“정말 신기해요. 왜 제가 손을 잡아 드리면 경련이 멈추는 것이죠?”

도영은 말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행이에요. 정말, 정말로.”

도영이 통증을 느끼는 상황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지금 혜수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가장 강력한 진통제를 먹어도 해소되지 않는 통증은 도영이 정신을 잃게 할 정도로 괴롭혔으니까. 일생에 한 번 받으면 영광이라고 할 상의 시상식도 참가 못 하게 한 곳에 붙잡아뒀으니까.


“그래.”

도영이 오른손을 내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혜수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에 제 손가락를 얽어 깍지를 끼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널 만난 이후 발생 횟수 자체가 줄었어. 악몽을 꾸는 것도 줄었지.”

도영이 깍지 낀 손을 제 입술에 가져갔다. 촉, 물기 젖은 소리가 다시 울린다.


“네가 옆에 있으면 내가 안정감을 얻나 보더군. 그 어떤 신경안정제보다도 더 깊은.”

“!”

도영에게서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흔한 말은 없었지만 혜수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고백으로 느껴졌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인해 약을 이길 수 있을 만큼의 안정과 평안을 얻는다니. 그 사람을 무척 신뢰하고 애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마음 한구석이 뜨끈해진다. 발개진 혜수의 얼굴을 도영이 다시 쓰다듬어 준다.


“내 유일한 치료제.”

 

한동안 몽글몽글한 감각에 취해 있던 혜수는 겸연쩍게 말했다.


“미안해요, 심술을 부려서.”

“심술?”

“네. 교수님께 화낸 거요.”

도영이 픽 웃으며 혜수의 턱을 다시 들어 올렸다.


“왜 화가 났던 거지?”

“…….”

“이제 말해주지 않겠어?”

“……유치한데요, 조금.”

“괜찮아.”

“놀리면 안 돼요.”

“그러지.”

볼을 한번 부풀린 혜수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러던걸요. 교수님이랑 조유민 선생님이랑 사이가 좋다고. 심지어 나랑 교수님의 사이를 오해해서 미안했다고 사과를 하더라구요.”

“…….”

“회식 때 정말 사이좋은 커플처럼 보였다고 했어요. 그리고 조유민 선생님이 교수님이 해준 약혼 선물이라며 목걸이를 하고 오셨거든요.”

“목걸이? 내가 줬다고?”

“네.”

도영은 대번에 얼마 전 어머니 은숙이 목걸이를 골라 달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혹시 꽃장식이 있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인가?”

“네. 맞아요.”

“…….”

“그래서 더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교수님은 제가 사촌 오빠 집에서 잤다고 화만 내시고. 그래서 속이 상했던 거예요.”

도영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그 상황이 이해가 가는군. 조 선생이 목걸이를 받은 줄은 몰랐어.”

어머니가 갑자기 목걸이를 골라 달라길래 의외라 생각은 했지만, 유민에게 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쓸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그런 소문이 난 것도.”

도영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자꾸 미안한 일만 만드는 것 같군. 변명 같지만 신혜수, 조유민과 나는 결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사이가 아니야. 우리는…….”

“알아요.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거. 소문뿐이라는 것. 제가 그냥 심술이 났던 거예요. 누가 들어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잖아요?”

“그 목걸이도 내가 준 것이 아니야. 어머니가 주신 거야. 사진이 자주 찍히니 조유민의 몸에 약속을 상징하는 무언가가 있긴 있어야 했을 거고, 이렇게 선거를 도와주니 고맙다는 표시도 해야 했겠지.”

“그랬구나.”

이제야 완전히 이해가 가 혜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긋 웃었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요.”

조금 전 도영에게서 최고의 고백을 들었다.

제가 약보다 나은, 완전한 안정감을 주는 치유제라는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지금 도영에게서 가장 특별한 사람은 제가 아닌가.

게다가 같이 회진만 돌아도 알 수 있었다. 도영이 가끔씩 필요에 의해 유민을 쳐다볼 때, 도영의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시선은 굳이 갖다 붙이자면 경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번에야 도영이 저를 이해해 주지 않고 몰아붙이기에 마음이 상해 같이 투닥댔지만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정말이에요, 교수님. 화 다 풀렸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난 언제든지 말할 수 있어. 조유민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내가 마음에 둔 사람은 너라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혜수가 소리를 친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

“교수님한테 절대 폐 끼치기 싫어요.”

“그건 폐가 아니랬잖아.”

“아무튼…… 싫어요.”

‘교수님이랑 연인임이 알려지는 것은……. 기분 좋기는 하지만 결국 그게 선거를 망치게 되는 것이니 결코 옳지 않아.’


“하, 혜수야.”

“그 이야기는 끝난 이야기 아니었어요?”

“…….”

“그만 해요, 그 얘기는. 네?”

하지만 혜수의 반대가 여전히 이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도영이다.


‘또 싸우긴 싫어.’

어쩔 수 없다. 비장의 필살기, 말 돌리기 작전!


“참, 승원 오빠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는 정말 남매예요.”

“!”

잘 돌린 것 같다. 도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으니까.

아무래도 도영이 화를 냈던 가장 큰 이유가 승원과의 관계를 속였던 것이니까 말해주면 속 시원해할 것이다. 더불어 저 굳은 표정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승원 오빠는 저랑 친남매나 마찬가지예요.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는 소꿉친구 같은 사람.”

혜수의 가장 최초의 승원에 대한 기억인 고깃집 이야기부터, 학창 시절 거의 과외 선생님이었단 이야기, 의대에 입학한 이후에도 계속 도움을 받은 이야기, 이곳에 온 것에 승원의 추천이 가장 컸다는 이야기까지 세세하게 해주었다.


“……그렇군.”

“제가 거짓말을 해서 화나셨던 거죠?”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오빠와 가족이란 것을 숨긴 이유는 여기 들어올 때 특혜를 받았단 얘기가 돌까 봐였어요. 그 이후엔 여러 번 말씀드리려고 했지만, 교수님을 속였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들어서 미루게 됐어요. 그러다가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사태가 악화된 거예요.”

“…….”

“그리고 잠은 정말로 그날 처음 오빠네에서 잔 거예요. 미리 말 못 한 건 죄송해요. 교수님이 뭘 걱정하시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진짜예요.”

“그래.”

혜수는 눈을 반달로 접으며 도영에게 더욱 바짝 다가갔다.


“교수님 화난 건 다 풀렸어요?”

“대충.”

혜수는 웃으며 도영을 파고들었다.


“제가 더 안아드릴게요. 그러니 대충 말고 모두 화 풀어요. 우리 화해한 걸로 해요.”

혜수의 말에 도영은 결국 작게 쿡 웃고 말았다.


“교수님도 저 안아주세요, 네?”

혜수가 도영의 팔을 하나씩 들어 제 허리에 감는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영도 혜수의 허리에 팔을 감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자그만 몸이 품에 다시 쏙 들어오니 마음이 한가득 부풀어 오른다.


“이제 대충 말고 전부 풀린 거 맞죠?”

애교 가득한 행동에는 부푼 마음이 넘치도록 간질거린다.


“그래.”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거짓말 안 할게요. 약속해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도영은 혜수를 강하게 끌어안기만 했다.
 

드디어 수술이 끝났다.

산부인과 의사와 환자는 벌써 방을 나갔고 간호사들만이 남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저들만 나가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

이제나저제나 모두가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3년 차 재성이 또 나타났다. 손에는 뜬금없이 수술복을 들고 있는 채다.


‘아니, 왜 또 오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재성은 곧바로 창고로 다가왔다. 마치 창고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라도 한 듯이 거침없는 걸음이다.


‘헉, 여기는 왜?’

몸을 다른 곳으로 숨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피할 곳이 없다. 하릴없이 재성과의 거리는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이러다 들키겠어!’

좁은 창고 안에서 혜수와 도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숨만 죽일 뿐이었다.


‘어떡해!’

마침내 문 앞에 도착한 재성은 문을 막고 있던 복강경 기계까지 치웠다.

기계가 끌리는 드륵 소리가 마치 사형선고처럼 들린다.


‘기계만 치우세요. 안에는 들어오지 마세요, 제발.’

혜수는 온갖 부를 만한 것들은 다 불렀다. 천지신명님, 삼신할미님, 옥황상제님,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제발요.

하지만 재성은 창고의 문 손잡이를 잡고야 말았다.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혜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망했다.’

끼이익. 수술실의 흰 조명이 새어 들어와 눈을 찌른다. 찡그린 눈 틈으로 간신히 위를 보니.


‘!’

재성이 그 비좁은 창고에 몸을 디밀고 있다. 혜수는 숨도 못 쉬고 바짝 얼어 있는데 무려 씨익 웃는다.

그 모습은 흡사 저승사자 같았다. 혜수를 잡으러 온 두툼한 덩치의, 수술 모자를 쓴 저승사자.

혜수는 간신히 입을 뗐다.


“서, 선생님, 여긴 왜 오셨어요?”

“자, 받아.”

“이게 뭔데요?”

웬걸, 재성이 건네준 것은 들고 있던 수술복이었다. 여자와 남자 수술복이 상하의 한 세트씩이다.


“이건 왜요?”

혼란스러워하는 혜수에게 재성이 작게 말한다.


“이 방 밖에 다음 수술 또 기다리고 있어.”

즉, 방이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음 수술 준비한다는 것이다. 밖에서 방을 치우는 간호사들이 나가지 않을 거란 얘기다.


“다음은 스테이징(staging operation:산부인과에서 암의 병기를 정하기 위해 하는 수술을 일컫음)이야. 그 수술은 오래 걸리는 거 알지?”

“아.”

“이대로는 들킬 테니 옷 갈아입고 다 같이 나가자.”

그렇다. 재성은 모두 보고만 것이다. 혜수가 도영과 흠뻑 젖은 채 껴안고 있던 것을.

그리고 재성은 확신했다. 그동안 의심하던, 도영의 진짜 여자친구는 혜수라는 사실이 진짜라는 것을.

그래서 수술복을 가져왔다. 젖은 옷 위에 새 옷을 입히고 셋이 나란히 밖으로 나간다면 그 누구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니까.


“선생님, 진짜 고마워요.”

“빨리 덧입어. 교수님도요.”

그렇게 혜수와 도영은 새로운 수술복을 덧입었다. 재성을 앞세운 뒤 나란히 창고를 빠져나왔다.

간호사들이 거기서 뭐 했냐는 듯 쳐다보았지만 재성이 넉살 좋게 ‘또 혼났어요…….’ 하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으이구 힘내요, 라고 해주기만 했다.
 

셋은 무사히 수술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둘을 구해준 재성은 인사를 하더니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

멀어지는 재성을 보며 도영이 낮게 신음을 흘린다. 뒤이어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황재성.”

“교수님, 왜 그러세요?”

갑자기 왜 화가 나셨지? 재성 선생님이 오지랖을 부려서? 쓸데없는 짓을 했다 생각하시는 건가?

그러나 의외의 말이 들려온다.


“그동안 걸리적거렸던 건 용서해 주겠어. 생각보다 꽤 쓸모 있는 친구군.”

혜수는 푸하핫, 크게 웃었다. 교수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꽤나 감명받으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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