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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교수님, 조금만 뒤로요 (71/110)


71. 교수님, 조금만 뒤로요
2022.10.05.


중환자실로 간 도영은 조금 전 수술한 환자의 곁을 지켰다.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주치의처럼 환자를 살피는 것. 이 또한 도영의 오랜 습관이다.

잠시 뒤 중환자실을 나온 도영은 다시 수술실로 갔다. 수술 중에 쓴 확대경을 챙겨야 했다.

17번 방으로 들어가자 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혜수가 보인다. 마찬가지로 도영을 발견한 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아직 안 가고 여기서 뭐 해?”

“조금 전 보여주셨던 수술 방법에 대해 논문을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논문? 어떤 논문 보는데?”

“아니요, 이제 다 봤어요.”

혜수는 그냥 인터넷 창을 꺼버렸다.

말끝이 단단한 데다가 다른 말은 하지도 않고 얼굴은 불퉁하다.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게 훤히 보인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볼일 보세요.”

그렇게 나가려는 혜수의 팔을 도영이 붙잡았다.


“잠시만, 얘기 좀 해.”

“무슨 얘기요?”

“크흠, 그, 뭐, 뭐 하러 논문을 찾아? 나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내가 더 잘 알려줄 테니 내게 물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에는 또 찬바람이 쌩쌩이다.


“논문 보고 모르는 것 있으면 그때 여쭤볼게요.”

실제로 아직 혜수는 도영에게 마음을 풀지 않았다.

물론 아까 수술하는 도영을 보고 멋지고 대단하다, 역시 우리 교수님 최고다, 라고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합심하여 잘 치러낸 수술은 수술이고, 화가 난 건 화가 난 거란 거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인사와 함께 팔을 털어내려 했지만 도영은 더욱 세게 혜수를 끌어당겼다.


“으앗!”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혜수에게 어르듯 말한다.


“그리고 이제 그만 화를 풀었으면 좋겠어.”

“…….”

“조금의 시간도 소중한데 너랑 이렇게 지내고 싶지 않아. 미국에서부터 너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

순간 수술실 문이 스르륵 열린다. 열린 문틈으로 인기척도 느껴진다.


‘헉! 누가 온다.’

혜수는 도영의 팔을 뿌리치고 호다닥 뒤로 물러났다.


“교수님,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중에 얘기해요.”

하지만 도영은 혜수를 바짝 따라온다.


“계속 도망만 다니잖아. 나중이 언제라는 거지?”

“일단 저리 좀 가요, 네?”

그래도 계속 다가오는 도영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던 혜수는 바닥에 뿌려져 있던 소독액을 미처 보지 못하고 밟고 말았다.


“!”

고무로 된 신발을 신고 있는 터라 물기를 디디니 무척 미끄러웠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팔을 휘저었지만 몸이 기우뚱한다.


“으아아악!”

결국 혜수는 바닥으로 넘어갔다. 동시에 우당탕탕 촤락,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야야…….”

‘읏, 뭐가 이리 차가워.”

온몸에서 차가움이 느껴진다. 정신을 차려 보니 머리며 얼굴이며 온통 소독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넘어지면서 소독액이 가득 담겨 있던 통을 건드려 버린 것이다.


‘바닥은 또 왜 이리 물렁…… 헉!’

혜수는 제 눈을 의심했다. 심지어 자신이 지금 도영을 깔고 엎어져 있는 게 아닌가.


‘!’

 

 


“교, 교수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너는?”

오히려 깔렸던 도영이 더 걱정스러운 말투로 혜수를 부축해 일으킨다.


“아무렇지 않아요.”

도영이 쿠션 역할을 해주어 그런지 다친 곳은 없다.

소독액이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는 것, 그리고 도영이 저를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만 빼고는 모두 괜찮다.


“교수님. 잠시만요. 조금만 떨어져요, 네?”

손을 내밀어 도영을 밀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문은 다시 닫혔어. 우리 둘뿐이야.”

“하지만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요.”

둘이 가까이 있는 걸 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러면 또 이상한 소문이 돌 수도 있을 텐데.

혜수가 뭘 걱정하는지 역시 아는 도영이 다정히 말했다.


“걱정 마. 문이 열리면 내가 멀찍이 떨어질 테니.”

“초능력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빈정대는 혜수가 귀엽다는 듯 보던 도영이 턱을 삐뚜름하게 한다.


“궁지에 몰리면 내가 어떤 것까지 할 수 있을지 넌 모를 텐데.”

“…….”

저게 무슨 뜻이람, 입을 삐죽이는데 정말로 수술실의 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혜수의 눈이 커질 대로 커졌다.


“교수님, 이리로요!”

혜수는 급히 도영을 끌고 수술실 안에 딸린 작은 창고로 뛰어 들어갔다.

가는 도중 도영의 오른팔이 움찔 떨렸으나 눈치챌 겨를이 없었다.

벌써 수술방의 문이 반이 열렸으니까. 마음이 너무 급했으니까.


“빨리 여기로 들어가요.”

도영을 밀어 넣은 뒤 제 몸도 욱여넣고 창고의 문을 탁 닫았다.

하아,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수술실의 문이 완전히 열리고 미화원이 들어왔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그들을 봤을 것이다.

대신 소독액으로 물바다가 된 바닥을 본 미화원이 소리를 친다.


“아이고! 이게 웬 난장판이야! 누가 이랬어! 대체 어떤 썩을 놈이 이딴 짓을! 엎었으면 닦아야 할 거 아니야!”

화가 난 미화원은 뭐라 더 소리를 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금 나가야 해.’

방이 빈 지금이 기회다. 미화원은 아무래도 닦을 것을 가지러 가는 것일 거다. 걸레를 두는 비품실은 꽤 먼 곳에 있으니 미화원이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제 나가요.”

이상하게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도영의 옷깃을 끌고 문밖으로 한 발짝쯤 나갔을까. 신음 소리가 작게 들린다.


‘어?’

그제야 혜수는 뒤를 돌아보았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도영을 발견했다.


“교수님? 왜 그러세요? ……설마?”

급히 도영의 팔을 내려다보니 오른팔 근육들이 수축하고 있다.


“헉! 팔이 또 아픈 거예요?”

도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제가 잡아드릴게요. 손 어서 주세요.”

혜수는 도영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여태껏 혜수의 손이 닿으면 경련은 멈췄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 너무 무리하셨나 봐요.”

조금 전 도영은 소독액을 잔뜩 뒤집어썼다. 차가운 수술실과 알코올이 섞인 소독액은 피부의 온도를 급격히 떨어트렸다.

게다가 아까 수술 중 시야를 가리는 장 때문에 이리저리 팔을 많이 움직였다. 또 혜수를 부축하기 위해서도 강하게 움직였다.

이 모든 상황이 만나 근육의 경련을 일으켰을 것이다.


“어떡해, 손이 너무 차가워요.”

혜수는 양손으로 도영의 오른손를 감싸 쥐고 호호 따뜻한 바람을 불어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행히 이번에도 효과가 있는지 떨리던 근육이 점차 가라앉는다. 도영의 찌푸린 미간도, 입술 새로 나오던 신음도 조금씩 사그라든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한결 낫군.”

조금 더 지나서는 근육의 수축이 완전히 멈췄다. 그래도 혜수는 도영의 손을 놓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잡고 있을게요. 아직 손이 너무 차가워서요.”

“고마워.”

“이거랑 화났던 거랑은 별개인 거 아시죠?”

뾰로통한 혜수의 표정을 보며 도영이 쿡, 웃었다.


“물론.”

그 웃음에 혜수도 히죽 웃고 말았다.
 

이렇게 모든 게 잘 해결되는 줄 알았다. 혜수는 도영의 상태가 조금만 더 안정되면 그동안 섭섭했던 것들과 이해가지 않던 것들에 대해 다 털어놓아야겠다 생각도 했다.

하지만, 수술실 문이 다시 스르륵 열리더니 누군가의 몸이 반쯤 보인다.


‘벌써 오셨어? 지금은 손을 잡고 있어야 하는데!’

동동거리던 혜수는 어쩔 수 없이 도영을 끌고 또다시 창고로 뛰어갔다.


“교수님, 이리로요!”

도영과 제 몸을 또 창고 안에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헉헉대는 숨을 진정시키며 창밖을 내다보니.

이번에는 미화원이 아닌 3년 차 재성이다. 어쩐지. 미화원이 다시 돌아오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했더니.

그런데, 걱정이다.


‘설마 우릴 본 건 아니겠지?’

혜수가 재성의 몸을 반쯤 봤으니 재성도 혜수를 봤을 수 있다.


‘하필 재성 선생님이야. 더욱 조심해야 하는 사람인데.’

재성은 전에 혜수와 도영이 주차장에 같이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번에야말로 도영과 자신의 사이를 들킬지도 모른다.

혜수는 숨을 죽이고 초조히 재성의 행동을 따라갔다.

다행히 재성은 둘을 보지는 못했나 보다. 혜수와 도영이 숨은 창고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대신 뭘 두고 갔는지 서랍이며 의자 밑이며 여기저길 뒤진다.


“교수님, 재성 선생님이 뭘 찾으러 왔나 봐요. 나갈 때까지만 이렇게 있어요.”

“그러지.”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혜수는 도영의 여전히 손을 꼭 잡은 채 창을 통해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


‘선생님, 빨리 좀 나가요, 네?’

하지만 뭘 찾는 건지 재성이 수술실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직도 컴퓨터 아래며 서랍장을 뒤지고 있다. 미화원 아주머니가 와서 소독액이 흥건한 바닥을 다 닦고 나갔는데도 말이다.


‘아오, 뭘 하시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도영에게 푸념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휙 뒤를 쳐다봤다.


“재성 선생님은 대체……!”

혜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제야 저와 도영의 자세가 눈에 들어와서.


“어, 어, 그…….”

시야 가득히 들어오는 장면은 도영의 가슴이다. 혜수는 도영의 어깨 안에 완벽히 파묻혀 있었다.

등 뒤엔 차가운 문이, 눈앞에는 도영의 몸이 있다.

브이라인으로 파여 있는 수술복이 앞으로 쏠리기까지 해 도영의 가슴이 반쯤 드러나 있다. 소독액을 뒤집어써 매끈하게 코팅된 피부는 주황빛 조명을 받아 더욱 도드라졌다.


“어, 어…….”

당황한 혜수와는 달리 도영은 이렇게 있어도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왜 그러냐는 듯 또 쳐다볼 뿐이다.

혜수가 손을 뻗어 도영을 밀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않는다.


“교수님, 조금만 뒤로…….”

“왜?”

“오, 옷이…….”

도영도 고개를 숙여 제 옷 상태를 바라보았다. 반쯤 드러난 제 가슴을.


“아.”

간결한 음성이었다. 혜수와는 다르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다.

혜수가 눈을 어디다 둬야 하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오히려 가만 있으라 타박을 한다.


“쉿. 들키겠군. 조용히 해.”

“하, 하지만 너무 가까운데요.”

“내 바로 뒤에 상자들이 쌓여 있어. 뒤로 움직이다가 들키면 어쩌려고?”

“네에…….”

혜수는 어쩔 수 없이 잠자코 숨을 죽였다. 최대한 도영에게서 떨어지려 노력하며. 파드득파드득 대는 혜수를 보며 도영은 소리 죽여 웃었다.
 

이러다 숨이 막히겠다 생각될 즘, 창밖을 살피던 도영이 낮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왜요?”

“다음 수술을 준비하나 본데.”

“네?”

급히 밖을 내다보았다. 정말로 재성은 어디로 사라졌고 간호사들이 들어와 있다. 분주히 초록포에 쌓인 기구들을 헤치며 다음 수술을 준비한다.


‘우리 수술은 끝이라 수술실을 닫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슨 과지?’

얼핏 안면이 있는 산부인과 레지던트의 얼굴이 보인다. 준비하는 수술 기구도 보니 뭘 할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어떡하죠? 지금 수술 코니제이션(conization:원추절제술)처럼 보이는데. 짧은 수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시간은 잡아야 할 거예요.”

“어쩔 수 없지. 기다려야지. 선생이라도 나갈래?”

잠깐 생각하던 혜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괜히 이목을 집중시킬 것 같아요.”

한 명이 나간다 해도 나머지 한 명이 남아 있는 것을 혹시나 들킨다면 어차피 둘이 있다 들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그게 그거니 차라리 이곳에 관심을 아예 끄게 숨어 있자는 판단이었다.


“그래, 그럼. 잠시만 이렇게 있지.”

그렇게 둘은 창고 안에 갇히게 되었다. 다행히 창고 문 앞에는 산부인과 수술에는 쓰지 않는 복강경 기계가 떡하니 놓여 있어 당장 들어올 사람은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 이렇게 꼬이냐. 제발 여기로는 아무도 오지 마세요.’

혜수의 타는 속도 모르고 수술은 착착 준비되었다. 산부인과 교수가 들어오고, 마취를 하고, 환자의 자세를 잡고, 수술이 시작되고.


‘후우, 이렇게 한 시간만 잘 숨어 있자. 그러면 돼.’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먹자마자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옷은 젖어 있지, 둘 사이에는 빈틈이 없지. 상대의 살결과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도영의 숨소리, 도드라지는 흉곽의 움직임, 그 특유의 묵직한 향까지 모두 지나치게 가깝다.

콩콩콩콩.

혜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달음박질치는 심장을 억눌렀다.


‘진정해, 신혜수.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우린 지금 숨어 있어. 게다가 난 아직 화가 나 있다고.’

도영을 피해 최대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래도 워낙 좁은 공간이라 그게 그거다.


‘아이 참.’

저만 불편한 건가 싶어 도영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검은 시선이 저를 샅샅이 훑고 있다.

척추부터 찌릿한 느낌이 난다. 대체 언제부터 저를 이렇게 보고 있었던 것일까.

급히 고개를 숙이려고 했지만 도영이 손을 들어 혜수의 목 뒤로 가져왔다.

커다란 손이 목덜미와 뺨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도영의 손에서는 옅은 화학 약품 냄새가 났다.

손이 지나가는 피부에서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느껴진다. 피하려고 했으나 그만큼 도영도 다시 다가온다.

귓가에 들리는 도영의 낮은 음성이 간질간질하다.


“얼굴이 붉은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정말?”

“네.”

도영이 픽 웃는다. 마치 네 머릿속은 내가 훤히 알고 있지! 하는 느낌이다.


“교수님. 그냥 뒤로 조금만 가주시면 안 될까요?”

흐음, 글쎄, 하던 도영이 혜수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검은 눈이 단단하게 마주쳤다. 손길은 상냥하기 그지없는데 시선은 강렬하다.

저를 옭아매는 그 눈빛에 혜수는 피하는 것도, 손을 뿌리치는 것도 하지 못했다.

순간 도영의 입이 혜수의 입을 집어삼켰다. 겹쳐지는 입술 사이로 쓴 소독약의 맛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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