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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그녀의 첫사랑 (67/110)


67. 그녀의 첫사랑
2022.09.21.


다음 날, 도영은 68병동으로 들어섰다. 어제 응급으로 수술을 하고 병실로 옮겨진 환자의 상태를 살펴야 했다.

도영을 본 간호사들이 우르르 일어나 인사를 한다.


“오셨어요, 교수님.”

“이수호 환자 몇 호실입니까?”

“8호실에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8호실로 가 문을 열려던 도영은 멈춰 섰다. 병실 안에서 굉장히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기에.


‘설마. 아니겠지.’

도영은 유리창으로 안을 흘긋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정말로 그곳에서 의외의 사람을 발견했다.


‘혜수가 저기 왜?’

혜수가 수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혜수는 이식혈관외과의 주치의가 아니니 수호를 찾아갈 이유가 없다. 그런데 수호의 침대에 붙어 서서 활짝 미소 지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저기서 뭐 하는 거지?’

도영은 문 뒤에 몸을 바짝 붙였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듣고 싶었다.

지나가는 간호사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안에서 끊이지 않고 혜수와 수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신혜수, 나한테는 저렇게 안 웃어주면서!’

얼마 전 계단실에서 혜수와 말다툼을 한 이후로 혜수는 도영을 딱 같은 과 교수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사람으로 대했다.

무엇 때문에 저리 단단히 화가 난 것인지 찬바람이 쌩쌩 불어 말 한마디 붙이기도 어려웠다.

어제저녁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혜수가 너무나 보고 싶었던 도영은 참다못해 혜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말이 심했다며 화해를 청할 생각이었고 네가 너무 그리웠다고도 말할 생각이었다.

초조히 긴 통화음을 흘려보내고, 드디어 혜수가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할 말이 있으니 제 방으로 오라는 도영의 말에 혜수는 단박에 난 거기 갈 이유가 없다며 딱딱하게 대답했다.

당황하여 멍하니 있으니 할 말 없으시면 끊겠다며 먼저 전화를 끊기까지 했다.

그때의 그 충격이란!

그래도 혹시나 오지 않을까 하여 도영은 방을 계속 지켰지만 혜수는 결국 오지 않았다. 또 그 충격이란!


‘저 둘. 대체 뭐야?’

도끼 눈을 뜨고 그들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휙 뒤를 돌아본 도영은 깜짝 놀랐다. 마찬가지로 도끼 눈을 치켜뜬 승원이 서 있었기 때문에.


“한승원, 너 뭐야? 여긴 외과 병동인데.”

“그러는 주도영 넌. 여기 숨어서 뭐 하냐?”

“내 병동이야. 신경 꺼.”

“나도 그러고 싶은데 끌 수가 없는데.”

“무슨 헛소린지.”

“저 환자. 이수호, 32세.”

뜬금없이 환자의 정보를 읊는 승원을 보며 도영이 인상을 썼다.


“대체 뭐 하자는…….”

“신성고등학교 2학년 3반 출신 이수호. 군필.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남. 키 183으로 추정. 취미는 농구에 특기도 농구. 농구를 잘했지만 공부도 무척 잘해 대학교는 한대로 진학. 전공은 컴퓨터 공학. 종교는 무교. 대학교 1학년 때 유럽여행을 두 달간 감.”

수호의 정보가 줄줄 읊어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다 아는 거지?”

도영의 물음에 승원이 이를 갈며 대답한다.


“32세 이수호가 진료를 봤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와 봤는데. 역시나였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말해.”

한 템포 쉰 승원이 비장하게 말했다.


“저 사람. 이수호. 혜수의 첫사랑이야.”

“!”

바짝 굳은 도영을 보며 승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


“혜수가 중학생 때 학원에서 만난 뒤 첫눈에 반했다던가. 난 혜수에게서 전해 들었던 거고. 내가 이렇게 줄줄 외울 정도면 혜수가 어느 정도로 저놈을 좋아했었는지 알겠지? 저놈 얘기 듣느라 귀에 딱지 앉았던 것만 생각하면 내가 지금도!”

“!”

도영과 승원의 시선이 한동안 얽혀들었다.


“그렇다면!”

“그래!”

 

 
도영과 승원은 앞뒤 할 것 없이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수호 오빠, 잘 지냈어요?”

“그럼. 그런데 네가 여기 의사가 된 줄은 몰랐어. 공부 잘하는 줄 알았지만 의대에 갔구나. 정말 대단하다.”

“에이, 뭘. 그 정도 아니야.”

“많이 바쁘지? 아, 일단 휴대폰 번호 좀 줘 봐.”

혜수는 배시시 웃으며 수호가 내민 휴대폰에 제 전화번호를 찍어주었다.


“그런데 오빠는 그대로네요.”

“하하, 많이 늙었지. 그대로기는.”

“아니에요! 정말 똑같은걸.”

“넌 더 예뻐졌다? 네가 혜수라고 말 안 했으면 난 몰랐을 거야.”

“어머나…….”

몸을 배배 꼬며 분홍빛으로 발그레 얼굴을 붉히던 혜수는 누군가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느낌에 옆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교수님?”

전신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사람은 도영이다. 그 표정은 또 어떤가.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는 병실을 다 태워버릴 느낌이다.


“여긴 어떻게……?”

“내 환자 보러 교수가 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아, 네.”

도영에게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옆으로 돌아섰는데 그 뒤엔 승원도 서 있었다.


“한 교수님? 교수님은 또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TA 환자라며. 다리는 괜찮은지 봐야지.”

혜수가 고개를 갸웃한다. 보통은 응급실에서 모든 부위를 다 살피니까 어제 당직이 봤을 텐데. 게다가 혜수가 알기로 지금 수호의 담당 정형외과 교수는 승원이 아니다.


“ER(응급실)에서 다 봤을 텐데요.”

“크흠. 다리는 내가 제일 잘 보잖아? 그러니 내가 다시 봐줘야지.”

“아…….”

뭔가 이상한데 하면서도 혜수는 승원의 뒤로 물러났다. 혜수가 나가지 않고 계속 서서 침대를 기웃거리자 승원이 손짓한다.


“혜수야, 넌 나가.”

“아니에요. 옆에서 볼게요. 교수님들 어시스트할게요.”

그러자 도영이 굳이 혜수의 앞으로 끼어들며 혜수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옆에서 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 얼른.”

이번에는 승원까지 합세해 혜수와 수호의 사이를 가린다.


“나가, 혜수야. 가서 일해.”

“지금 할 일 없는데요.”

“그럼 쉬고 있어. 오늘 당직이잖아.”

두 남자가 혜수의 앞을 가로막고 시야를 완전히 차단해버렸다. 커다란 덩치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서 있으니 고개를 돌리고 까치발을 들어도 도무지 틈이 나지 않는다. 꼭 병풍을 친 것 같다.


“……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혜수는 병실을 나와야 했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혜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수호에게서 오는 메시지에 답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진짜 반갑다. 널 여기서 만날 줄이야.

-저도요, 오빠.

-부모님은 잘 계시고?

-네. 두 분 다 건강하세요. 오빠 가족들은요?

-우리도 다 잘 지냈지. 누나는 여전해. 아주 그냥……. 후. 나 고딩 때까지 누나한테 맞고 다닌 거 알지?

-ㅎㅎㅎ알죠.

줄줄이 이어지는 추억 가득한 얘기에 혜수는 웃음을 한가득 지었다.


“뭐가 그리 재밌지?”

갑자기 들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도영이 서 있다. 삐딱하게 짚고 있는 다리 하며 한 손을 가운에 넣고 있는 것까지 불량하기 그지없는 자세다.


“할 일은 다 하고 노는 건가?”

불만이 가득한 물음에 혜수는 입을 삐죽였다.


“네. 다 했습니다만. 보실래요?”

혜수는 차트를 열어 직접 오더를 하나하나 확인시켜 줬다.


“됐죠?”

그러고는 다시 휴대폰을 보기 시작하는 혜수를 보며 도영은 이를 꽉 악물었다.


“하, 네가 좋대? 다시 만나기라도 하재?”

뜬금없는 말에 혜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폰 이리 줘.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어.”

도영이 손을 뻗어오자 혜수는 잽싸게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왜 이래! 갑자기 또 왜 심술이람!


“싫어요!”

혜수는 혀를 한 번 쏙 내밀고는 달아났다.


“신혜수. 이리 안 와?”

“싫어요!”

“거기 당장 서.”

“교수님 같으면 서겠어요?”

혜수를 잡으러 가려던 도영은 때마침 우르르 몰려오던 인턴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피를 뽑으러 가려던 길인지 채혈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8호실 이수호 님부터는 내가 갈게.”

“그래. 그럼 난 12호실부터 갈게.”

‘이수호?’

혜수를 쫓는 와중에도 수호의 이름이 콕 박혀 들린다. 도영은 발걸음은 멈추고 8호실로 가겠다던 인턴을 불러 세웠다.


“저기, 너.”

“네, 네?”

도영이 말을 걸자 인턴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나 생각부터 들어서다.


“이수호 님이라 그랬나?”

“네, 맞습니다.”

“음……. 8호실은 한 명뿐인가?”

“네. 이수호 님만 뽑으면 됩니다.”

잠깐 생각하던 도영은 경쾌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하지.”

“네?”

“내가 한다고. 채혈.”

“예에?”

교수가 피를 뽑는 일은 가뭄에 콩이 나는 것보다 드문 일이기에 잘못 들었나 하고 있는데, 도영이 바구니를 휙 채갔다.


“선생은 9호실부터 해. 8호실은 내가 간다.”

“네, 네…….”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인턴을 두고 도영은 8호실로 향했다. 뚜벅뚜벅, 걸음걸음마다 전투의 의지가 흘러넘쳤다.

8호실로 가자 수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도영이 자꾸 오는 탓이다. 손을 꼽아보니 오늘만 해도 네 번째다.


“교수님? 이번에는 무슨 일이세요?”

“피 뽑으러 왔습니다. 팔 내미세요.”

“교수님이 피를 직접 뽑아요?”

“네. 저희 과는 그렇습니다.”

“아……. 네.”

이상하다 생각됐지만 검사를 위해 피를 뽑겠다는데 거부할 수는 없지 않나. 수호는 소매를 걷어 팔을 내밀었다.


“환자 확인하겠습니다.”

수호가 찬 팔찌에 바코드를 갖다 대던 도영은 이를 빠득 물었다.

군살 없이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팔이 눈에 크게 들어와서다.

농구를 잘했다더니 지금도 하는 건가. 도영의 눈에는 지금 수호의 몸이 제 몸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네 이놈. 세상에서 제일 아프게 찔러주마.’

주사기를 꺼내 바늘의 굵기를 확인했다.

이런, 고작 21게이지(gauge:바늘의 굵기, 숫자가 작을수록 굵음)라니. 더 굵은 바늘을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한 게 한이 된다.

못해도 18게이지, 아니, 경막외마취를 할 때 쓰는 그 두꺼운 걸 가져왔어야 했는데!

번뜩이는 도영의 눈빛을 보며 수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교수님.”

“네.”

“안 아프게 해주세요…….”

하! 도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걱. 정. 마. 시. 죠.”

한 번 입술을 비틀어 보인 도영은 도드라진 혈관을 향해 주사기를 가져갔다.


“따끔합니다.”

곧 예상되는 아픔에 수호는 눈을 꾹 감았다.

예리한 바늘이 피부를 뚫으려는 그때. 끼익 문이 열리고 웬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아아아!”

‘아빠?’

바늘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수호를 똑 닮은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빠…… 라고?’

아이는 수호에게 힘차게 달려갔고 수호도 기쁘게 웃으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우리 승찬이 왔어?”

“아빠, 마니 아팠어요?”

“아니야. 아빠 하나도 안 아팠어.”

“진짜예요? 내가 호 해주려 그랬는데.”

“아이, 고마워라. 그런데 엄마는?”

“엄마는 조오기 밖에요. 의사 선생님이랑 이야기한대요.”

“아하. 그랬구나.”

승찬이 도영을 올려다보았다. 도영의 높은 키 만큼 목이 뒤로 크게 젖혀진다.


“아빠 그런데 이 커다란 사람은 누구예요?”

“인사해, 승찬아. 여기도 의사 선생님이야.”

“안녕하세요.”

꼬물대며 인사를 한 승찬이 입을 크게 벌렸다.


“우와. 아빠는 의사 선생님이 여러 명이에요?”

“어, 맞아. 그런데 아빠 지금 주사 맞아야 하거든? 잠시만 뒤돌아서 있을래?”

“응, 아빠.”

“승찬이 참 착하다.”

승찬을 쓰다듬어 준 수호는 다시 팔을 내밀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이제 뽑아주세요.”

“……네.”

도영은 잽싸게 바늘을 꽂고 채혈을 했다. 검붉은 피가 주사기에 순식간에 차올랐다.


“다 끝났습니다.”

그런 뒤에는 도망치듯 3호실을 빠져나왔다. 등 너머에서 감탄을 연발하는 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야. 저 의사 선생님 짱이다. 하나도 안 아파! 아빠는 병원에 저렇게 피 뽑는 사람들만 있으면 백 번도 더 뽑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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