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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교수님, 진짜 미워요 (66/110)


66. 교수님, 진짜 미워요
2022.09.17.



 
도영은 이를 꽉 악물었다.

어제 승원의 집 앞에서 혜수를 기다리며 어떤 감정을 느꼈던가.

혜수가 혼자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한 것에 대해 가졌던 죄책감과 미안함이 절망과 무력감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승원에 대한 분노로 뒤바뀌었다.

사사건건 저를 방해하는 한승원이, 사촌의 탈을 쓰고 혜수를 넘보는 승원이 가증스럽다. 눈앞에 승원이 있다면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을 것이다.

도영은 간신히 숨을 삼키고 혜수에게 물었다.


“내게 언제 말할 셈이었지? 한승원과 같이 산다고.”

“조만간 말하려고 했어요. 일단은 사촌 오빠라는 걸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아니. 기다리면 안 됐어. 바로 말을 했어야 했어.”

“미리 말 못 한 건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교수님. 짐을 옮겨놓았을 뿐, 그 집에서 산 것은 아니에요. 교수님도 아시잖아요. 저 최근에는 집에 갈 시간도 없었다는 거.”

“…….”

“이렇게 화내실 이유 없어요. 거긴 정말 많은 친척 중 한 명의 집일뿐이고, 그것도 짐을 보관하는 장소로만 썼다구요.”

“그렇지만 어젠 거기서 잤지.”

“…….”

도영도 안다. 혜수가 과가 바뀐 이후로는 이틀에 한 번꼴로 당직을 섰고, 당직이 아닌 날에는 논문을 마무리하느라 집에 한동안 가지 못했다는 것을.

먼 곳에 있었지만 매일 같이 전화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나누었기에 세세히 안다.

하지만 화가 난다.

혜수가 승원과 사촌 사이인 것과 승원의 집으로 이사했다는 사실을 제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친척의 집으로 이사를 갔으니 괜찮다고? 가족이라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한승원은 혜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지 않은가!

넌 한승원이 네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아? 술에 취해 쓰러진 너에게 속이 시커먼 그 새끼가 어떤 짓을 했을지 어떻게 알아!

도영은 혀끝까지 나온 말을 겨우 삼켰다.


“왜 나한테는 부탁하지 않았지? 그러한 사정으로 갈 곳이 없어졌다고.”

“교수님은 미국에 계셨잖아요. 그리고 한국에 계셨다 하더라도 승원 오빠의 집이 병원과 더 가까우니 오빠에게 부탁했을 거예…….”

“한승원, 한승원! 그 이름 좀 그만 이야기할 수 없어?”

갑작스레 커진 소리에 혜수는 말을 삼켰다.

조금씩 이해가 가지 않기 시작한다. 도영은 지금 이상하다. 평소 보여주던 모습이 전혀 아니다.

아랫사람이 실수를 해 질책을 하더라도 감정이 섞인 화를 내기보다는 가르치기 위함이 목적이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정말로 화를 내고 있다.

나름 참는다고 하는 것 같은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승원 오빠와는 고작 사촌일 뿐이고, 짐 둘 곳이 없어서 짐을 옮겨놨을 뿐인데.

이유도 다 설명을 했는데 왜 이렇게 화를 내? 왜 이해를 하지 못해?

커다란 눈만 깜빡이는 혜수를 보며 도영이 서늘하게 말했다.


“당장 짐 싸서 내 집으로 와.”

“네?”

“내 집으로 오라고.”

“잠깐만요, 교수님. 제가 왜 그래야 해요?”

“난 네가 그 집에 한 발이라도 들이는 것 봐 줄 생각이 없으니.”

한동안 생각하던 혜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안 갈 거예요.”

“……어째서?”

“제가 교수님과 이상한 사이라는 소문이 사그라든 지 겨우 첫날이에요. 제가 그 집에 들락날락해서 좋을 건 없어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

“아니. 난 조유민과 파혼할 거야. 당장. 그러니 내 집에 발을 들여도 상관없어.”

혜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파혼이요?”

“그래. 더 이상은 너와의 사이를 숨기지 않겠어.”

단단한 도영의 말에 혜수는 아연실색을 했다.

도영은 자신이 말한 것은 무조건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다. 저렇게까지 마음을 먹었으면 곧 실행할 거다.

혜수는 도영의 팔을 붙잡았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혜수의 격한 부정에 도영이 살풋 눈을 찡그린다.


“안 된다니, 무슨 소리지. 그동안 조유민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바로 너잖아. 난 네가 더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아.”

“선거가 아직 안 끝났잖아요. 부모님이랑 약속한 거 지키셔야죠.”

“지금은 어겨도 돼. 아버지는 당선될 거야.”

“아니요, 약혼을 유지하자는 약속은 선거가 끝날 때 까지잖아요. 선거는 선거고, 약속은 지켜야 해요.”

이런 분란을 만들고 교수님의 옆에 선들 교수님의 부모님이 절 반가워할까. 계획을 어그러뜨린 여자라고 미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은 생각만 해도 싫다.

그리고 만에 하나, 드문 확률이겠지만 선거에서 패하게 되면 그 화살이 다 누구에게 날아올까. 바로 나다.

그렇게 되면 난 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까. 싫다. 정말 싫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그런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선거는 곧이에요. 조금만 참으면 돼요. 그때까지는 절대 안 돼요.”

심지가 굳은 혜수의 말에 도영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하, 신혜수, 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넌 선거 생각할 필요 없어. 넌 네 행복에만 집중하면 돼.”

“어떻게 그래요? 교수님과 만난다는 건 교수님의 배경과 과거까지 전부 껴안는다는 거잖아요. 전 신경 안 쓸 수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잖아. 네가 신경 쓸 일 만들지 않겠다고 하잖아.”

혜수는 도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교수님이 파혼을 하시게 되면 전 신경이 무척 쓰일 거예요. 지금 우리의 관계를 숨기는 것보다도 더.”

“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화가 반복되었다. 도영은 당장 파혼을 하겠다며 날뛰었고, 혜수는 절대 안 된다며 막아서고.


“시간 낭비하지 말지.”

“마찬가지 생각이에요. 그리고 교수님은 제가 싫다는 건 하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이러시는 거예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혜수다. 대화는 도돌이표처럼 처음으로 자꾸 돌아간다. 지친 도영은 결국 하, 숨을 내쉬었다.


“일단 다음 질문. 소문에 관해서는 왜 내게 미리 말하지 않았지?”

“…….”

“진작 내게 말을 했으면 좋았잖아.”

“……그건. 말씀드려도 크게 바뀔 건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바뀔 것이 없다니?”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만든 소문이라 생각했어요. 교수님이 나서게 되면 오히려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을까 해서요. 또 교수님이 미국에서 바쁘시기도 했고…….”

“아무리 바빠도 널 위한 시간을 만들지 못할까!”

“……교수님께 걱정을 안겨드리기 싫었어요.”

“다른 곳에서 들으면 더 걱정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해?”

“…….”

“조유민과의 파혼도 그렇고 왜 전부 내 의견과 다르게 생각을 하지? 날 그렇게 믿지 못해?”

“그런 게 아닌 걸 아시잖아요.”

“네가 그 시간들을 혼자 견뎠을 것을 생각하면 나는!”

도영은 다시 머리를 쓸어올렸다.


“하아. 또 내게 말하지 않은 것. 있어?”

“네?”

“내게 또 말하지 않은 것 있냐고!”

“……없어요.”

“정말 없어?”

“네.”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어야 할 거야. 내게 더 숨기는 것이 없다는 것.”

“없어요. 진짜예요.”

그리고 도영에게 추궁당하는 혜수도 평정심을 잃어갔다.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교수님은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걸까. 고작 사촌 오빠네에서 잠을 잔 것뿐인데! 내가 무슨 대역죄라도 졌나?

게다가 자기는 사람들한테 유민과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줬다면서! 내가 누구 때문에 그 헛소문들을 견뎠는데, 그거 하나 이해해 주지 못해?


‘이거 내가 억울해해도 되는 거 맞지?’

이런 생각들을 거쳐 혜수는 불퉁하게 말했다.


“왜 저한테만 뭐라고 그래요?”

“뭐?”

“교수님께 승원 오빠가 사촌이란 거랑 이사에 대해 미리 말 못 한 건 정말로 미안해요.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줄은 몰랐어요.”

“미안한 걸 안다니 다행…….”

“그렇지만 교수님도 너무한 거 아세요?”

너무하다는 말에 도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내가 너무하다고? 왜?


“제가 술 먹고 잘 때 교수님은 조유민 선생님이랑 다정하게 고기 구워 먹으니 좋았어요?”

“잠깐만, 신혜수. 그게 무슨 소리야?”

“사이가 그러어엏게 좋다면서요? 병원에 아주 소문이 다아아 났던데요?”

혜수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나가버리려는 듯 뒷걸음질을 친다. 금방이라도 이곳을 나가려는 듯한 모습에 도영이 눈매를 찌푸렸다.


“이리 와.”

도영은 혜수를 붙잡으려 했지만 혜수는 잽싸게 손을 피하고 더욱 문에 가까이 갔다.


“아주 천생연분이라던데요?”

“가지 마. 네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으니 와서 이야기해.”

“아니요, 더 이상 대화 안 해요. 해봤자 말이 안 통하잖아요.”

혜수는 계단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저 화났어요. 교수님, 진짜 미워요!”

마지막으로 큰소리를 빵빵 친 혜수는 그렇게 문을 닫고 사라졌다.

졸지에 어두컴컴한 계단실에 혼자 남겨진 도영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내가 조유민과 다정하게 고기를 구워 먹다니? 무슨 소리야? 천생연분은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혜수에게서 들은 여러 가지 말 중 가장 충격적인 말은…….


‘내가 밉다고?’

도영은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내가 똑바로 들은 것이 맞나?’

 

***

도영은 3년 차 황재성의 콜을 받고 응급실로 내려갔다.


“환자 어디 있어?”

“이쪽입니다, 교수님.”

재성이 가리키는 베드로 가보니 한 젊은 남자 환자가 침대에 누워 끙끙대고 있었다.


“CT에서 프리 에어(free-air:복강 내에 보여서는 안 되는 공기가 보임)가 있던데.”

“네. 이수호 환자 3시간 전에 TA(교통사고)로 복부를 강하게 가로수와 부딪힌 뒤 복통 호소하며 내원하였습니다.”

“피불라(fibula:비골) 골절이 있다며. OS(정형외과)는 연락됐어?”

“네. 연락했습니다. 곧 내려올 겁니다.”

도영은 환자의 이불을 들춰 살펴보았다.

그런데 다리에 부목이 대어져 있다. 누가 응급처치를 했는지 도로에서 구할 수 있는 나뭇가지와 천 등으로 다리를 정확하게 고정해 놓았다.

깔끔한 모양새 하며 혈관과 신경이 눌리지 않도록 감싸 놓은 것이 예사 솜씨가 아니다.


“이거 누가 한 거지.”

“모르겠습니다. 병원에 올 때부터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목격자분이 한 게 아닐까요?”

“119를 통해서 온 게 아니야?”

“네. 지나가던 운전자가 차에 싣고 왔다고 합니다.”

“음. OS 진료 결과 나오면 나한테 노티 해. 수술이 필요하다면 코오피(co-operation:동시에 여러과가 협동하여 수술) 할 테니.”

“네, 교수님.”

“보호자는?”

“가족은 지금 오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은 목격자만 있습니다.”

“이분을 데리고 왔다는?”

“네. 밖에 있습니다.”

“한번 만나 보지.”

사고 현장 상태를 듣는다면 수술에 훨씬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도영은 사고를 목격한 사람이 있다면 가급적 당시 이야기를 들어왔다.

잠시 뒤. 한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군데군데 머리가 희끗한 남자는 비싼 브랜드의 옷은 아니지만 얼룩 하나 없이 깔끔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절 왜 보자고 하신 건가요?”

“환자 때문에 여쭤볼 게 있어서입니다.”

“네, 어떤 것이 궁금하세요?”

“어떻게 환자를 데리고 오셨습니까?”

“그게 어찌 된 거냐 하면…….”

남자는 퇴근을 하던 중 교통사고를 목격했단다.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도저히 아픈 사람을 두고 갈 수가 없었고 제일 가까운 이곳으로 왔다고.


“그러면 다리는 직접 치료하신 겁니까?”

“맞습니다. 부끄럽게 그걸 보셨습니까?”

“혹시 의료계 종사자이십니까?”

“아, 아닙니다.”

“정말 훌륭하게 처치하셨더군요. 정형외과 전문의가 했다고 해도 될 만큼이었습니다.”

“하하, 그랬나요.”

대화를 나누던 중 환자의 진짜 보호자가 도착했다.

남자는 보호자에게 가 환자가 어쩌다가 다쳤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환자의 누나라는 보호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남자에게 고마워했다.


“동생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사례라도 꼭 하고 싶은데요.”

“아이고,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한 건데요.”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는 여자를 끝까지 만류한 남자는 인상 좋게 웃으며 응급실을 떠났다.

멀어지는 남자를 보며 도영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저 얼굴 익숙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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