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또 거짓말
(65/110)
65. 또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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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또 거짓말
2022.09.14.
다음 날 새벽, 혜수는 깨질 듯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아고고. 삭신이야.”
낯선 풍경에 주위를 둘러보니 승원의 집에 있는 제 방이다.
“여기는 언제 왔대? 으으.”
찌뿌둥한 몸을 쭉쭉 펴며 주방으로 나갔다.
“승원 오빠?”
그런데 찾는 승원은 없고 식탁 위에 잘 구워진 계란프라이가 두 개 놓여 있다. 옆에는 작은 쪽지도 있다.
-혜수야, 응급 수술 있대서 먼저 나간다. 오늘 너도 당직이라며. 냉장고 안에 꿀물도 있어. 속이 비면 술이 잘 안 깰 테니 다 먹고 와. 꿀돼지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어이없는 내용에 혜수는 쪽지를 식탁 위로 휙 날렸다.
‘허, 참. 꿀돼지라니. 이 오빠가 지금 아침부터 시비 거는 거야? 날 뭘로 보고?’
콧김을 빵 내쉬었지만 목은 타는지라 냉장고를 열었는데. 하필이면 선반 제일 앞에 잘 타진 꿀물이 놓여 절 유혹한다.
‘……마실까.’
꿀꺽, 침을 몇 번 삼킨 혜수는 결국 컵을 들고 말았다.
“크으.”
역시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위장으로 들어가니 정신이 번쩍 깬다.
혜수는 과음을 할 경우엔 늘 차가운 꿀물로 해장을 해왔다. 그걸 아는 승원이 준비를 해 둔 것이다.
‘뭐, 맛은 있네. 오빠 센스는 인정.’
그런데, 쓰린 위장을 달랬더니 이번에는 허기가 급 몰려온다.
‘배고파. 이럴 때는 느끼한 걸 먹으면 딱인데.’
먹을 것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니 식탁 위에 곱게 놓인 계란프라이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먹을까.’
하지만 고민이다. 저것까지 다 먹으면 내가 꿀돼지임을 정말로 인정하는 것 같잖아.
‘허, 참. 내가 기름진 거 찾을 건 또 어떻게 알았담.’
잠시 고민하던 혜수는 결국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 계란을 먹었다. 배에서 음식을 넣어달라 이리 요동을 치니 꿀돼지고 뭐고 먹고살자는 생각부터 든다.
“그런데 내가 여기 어떻게 왔지? 분명 네 병까지 깐 건 기억이 나는데.”
어젯밤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려는데 가물가물하다. 생각을 해보려 할수록 머리가 띵하다.
“윽. 어제 너무 많이 마셨나.”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기억을 되돌려보니 승원이 데려왔던 것 같다.
중간에 저를 안고 있던 승원이 등을 내보이며 계단을 올라가야 하니 업히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곧 제게 다가오던 커다랗고 따뜻한 등도 기억난다.
‘주 교수님 목소리도 들렸던 것 같은데…….’
어젯밤 저를 부르는 도영의 목소리가 꽤 오랫동안 들렸다. 방문인지 현관문인지 모르겠는데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은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하던 혜수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꿈을 꾼 것이겠지. 지금 교수님은 미국에 계시는걸.’
병원에 출근한 혜수는 바로 병동으로 올라갔다. 당직 교대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지만 미리 환자 파악을 해 둘 생각이었다.
스테이션에 들어가기 전 혜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아.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날 보며 수군대려나.’
저를 둘러싼 추문이 있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벌레 보듯 보는 것. 매일 각오를 하고 출근은 하지만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분위기가 조금…… 다른데?’
어제까지만 해도 혜수가 등장하기만 하면 공기가 싸늘해지면서 모여있던 사람들이 흩어졌었다. 마치 뒷담화의 주인공이 등장한 것처럼.
그런데 오늘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공기는 계속 훈훈하며 저를 보며 웃어주는 사람들도 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이것도 나 때문인가 하고 있는데 한 간호사가 다가온다.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혜수를 아는 척도 하지 않던 고참 간호사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듣는 인사에 얼떨떨해하며 마주 인사를 해줬다. 그러자 간호사가 더욱 살갑게 웃으며 다가온다.
“미안해요, 선생님.”
“네?”
“미안해요. 그동안 오해해서.”
“오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 선생님은 어제 취하셔서 모르시겠구나. 어제 회식 때…….”
그리고 혜수는 식당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다.
승원이 저와 사촌 관계임을 밝힌 것, 입국 시험에 대한 해명을 했다는 것. 출제된 시험지는 병원장 조병억의 관리하에 들어가기 때문에 유출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는 것.
“전 소문만 믿고 선생님이 그런 분이라 찰떡같이 믿었지 뭐예요. 정말 죄송해요.”
“아, 그. 네. 전 정말 아니에요.”
“그러게요. 제가 너무 한쪽 말만 들었네요. 선생님이 그럴 분은 아니라 생각은 했는데.”
“하하, 네.”
“정말 미안해요. 그동안 모질게 대한 건 잊어주세요, 네?”
“……그럼요.”
“그리고 주 교수님이랑 조유민 선생님은 정말 사이좋은 커플이 맞더라구요. 괜히 선생님이랑 엮었지 뭐예요.”
“예?”
“어제 주 교수님이 회식 때 오셨거든요.”
“교수님이 오셨다구요?”
금시초문이다. 도영이 일찍 귀국하겠다는 말은 없었는데. 부랴부랴 휴대폰을 뒤져봐도 부재중 전화도, 돌아오겠다는 메시지 한 통 온 것이 없다.
“네. 마지막쯤에 오셨더라구요.”
“그, 그랬어요? 왜 벌써 오셨지?”
“일정이 빨리 끝났나 보죠.”
“그런데 교수님이랑 조유민 선생님이 사이가 좋아요?”
“그럼요. 아주 그냥 눈에서 하트가 뚝뚝 떨어지던데요.”
“……그랬군요.”
“그럼 전 가볼게요. 정말 미안했어요, 선생님.”
“아, 네.”
그 간호사가 사라지고 이번에는 인턴들이 다가와 사과를 한다.
“미안해요, 선생님.”
“죄송해요.”
혜수는 괜찮다 말하며 겨우 웃어 보였다. 이후로도 줄줄이 사과가 이어졌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스테이션이 진정되었다. 한숨 돌린 혜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차트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꾸 속에서 따끔한 것이 치밀어 오른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렇게 험담을 해대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었다. 잘못에 대해 곧바로 사과를 하는 것이 고맙기도 하지만, 꽤 씁쓸했다.
‘다시는 이런 일 겪고 싶지 않아.’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근거 없는 말이 얼마나 빨리 퍼질 수 있는 것인지 제대로 느꼈다. 거기에 더해 소문이라는 것이 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도.
또 서글펐다. 도영과 유민이 사이좋은 커플임을 보여줬다고 한 것이.
도영과 유민은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이란 걸 알지만 우울하다. 대체 교수님이 어제 어떤 행동을 하셨기에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걸까.
‘그런데 나한텐 왜 연락도 없지?’
한동안 심란한 얼굴로 모니터를 보던 혜수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일하자, 일!’
그 시각 이식혈관외과의 메인 병동인 68병동.
그곳에는 도영이 이끄는 난데없는 회진이 진행되고 있었다.
예고 없이, 그것도 토요일 꼭두새벽에 갑자기 등장한 도영 때문에 미처 준비를 제대로 못 한 의료진들은 바짝 긴장했다.
“어떡해. 나 환자 정보 다 못 외우는데.”
“나도. 큰일이다.”
“진짜 조심해야 해. 이러다 오늘 곡소리 난다고.”
모두가 예측했던 대로 분위기는 살벌했다. 처음부터 도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각오를 하기는 했지만 돌아오는 건 그 이상이었다.
누구든 조그만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도영은 전혀 봐주지 않고 무섭게 몰아붙였다.
바쁘게 진행된 출장과 오랜 비행 탓에 짜증이 쌓인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평소 실수를 다그치는 것보다 훨씬 심했다.
마침내 어제 응급 수술을 한 환자를 마지막으로 공포의 회진이 끝났다. 대충 떠올려 봐도 혼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회진이었다.
“하. 개판이군.”
도영은 이를 갈며 병실을 나왔다. 레지던트들은 숨도 마음대로 쉬지 못하고 도영을 뒤따랐다.
“우리 오늘 죽었다.”
“미치겠네. 나 더 찍히면 안 되는데.”
“쉿, 조용.”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도영에게서 떨어질 질책과 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도영이 태블릿을 턱 내려놓더니 병동을 그냥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교수님 어디 가셔? 회진 이게 끝이야?”
“어라? 진짜 어디 가시네?”
“끝났나 봐.”
“그러네.”
“하아, 다행이다. 죽는 줄 알았네.”
남겨진 이들은 그제야 숨을 좀 들이켰다.
도영은 그대로 66병동으로 향했다. 갑자기 나타난 도영을 보며 간호사들은 눈을 키웠다.
“주 교수님이 여기 왜? 이식혈관 환자 여기 있어?”
간호사들은 급히 차트를 뒤졌다. 혹시 자신이 까먹은 환자가 있나 해서다. 하지만 도영은 혜수에게 곧장 다가갔다.
“신혜수 선생. 잠깐 나와.”
간호사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을 부르는 게 아니어서.
어제 회식이 있기 전이었다면 도영이 혜수를 부르는 상황에서 또 혜수를 향해 양다리니 어장관리니 하는 말들이 쏟아졌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저 도영의 희생양이 된 혜수를 불쌍하게 볼 뿐.
“저요?”
“그래.”
“네.”
혜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도영을 따라갔다.
‘나 왜? 나 이식혈관 아닌데? 아, 저번처럼 화난 척 부른 다음에 얼굴 보자는 건가?’
잘 됐다. 교수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둘만 남게 된다면 왜 이리 갑작스럽게 온 건지, 어제 회식 때 유민과 보여준 다정한 모습은 뭔지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며 도영을 따라 계단실로 갔다.
“교수님, 언제 오셨어요?”
도영은 대답 없이 문을 쾅 닫았고 혜수는 큰 소리에 흠칫 놀랐다.
“신혜수.”
“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무슨…….”
“한승원과 사촌이라는 것.”
‘아!’
“그리고 한승원 집에서 산다는 것.”
이제야 알겠다. 지금 도영이 이렇게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눈속임용이 아니라 정말로 화가 난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원인은 자신이라는 것을, 일단 거짓말에 대해 잘못을 빌어야 한다는 것을.
도영은 거짓말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으니까.
“교수님, 그건 제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사정이 있…….”
“내가 거짓말을 싫어하는 것을 알 텐데. 왜 날 또 속인 거지?”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해요.”
“사과를 듣자는 게 아니야.”
“…….”
“묻잖아. 이유가 뭐지.”
서늘한 시선 속에서 생각을 정리한 혜수는 입을 열었다.
“작정하고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에요. 처음엔 사촌이란 게 알려지면 다들 절 승원 오빠의 힘으로 의국에 들어온 사람이라 생각할 것 같았어요. 그런 이야기는 듣기 싫어서 그랬어요. 요즘 다들 그 문제에 예민하니까요. 이번에 제가 부정 입국을 했다는 소문이 난 것처럼요. 그래서 모른척하기로 했어요.”
그 말에 도영이 코웃음을 쳤다.
“좋아. 처음에는 그랬다 쳐. 그럼 이후에라도 왜 말하지 않았지. 나에게 말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을 텐데.”
“……정말 죄송해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맞다. 도영에게 말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봉사활동을 다녀온 날, 혜수는 일부러 승원의 전화를 피했다. 그 분위기를 깨는 것도 싫었고 거짓말임을 알리면 도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스러웠다.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도영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는 슬그머니 말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집어넣었다.
도영과의 달콤한 시간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꾸 뒤로 미뤘다. 그렇지 않아도 몰래 만나야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으니까 방해받기 싫다는 욕심이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도영이 이렇게 화를 낼 줄 알았더라면 미리 말했을 텐데.
“그리고 또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교수님이 싫어하실 것 같아서요.”
“하아. 그래도 말을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게다가 동거? 하.”
도영은 기가 차다는 듯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대체 언제부터 거기서 산 거지? 이전에 갔던 건물은 한승원의 집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아니었던 게 맞아요. 이사를 간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이사를 했다고? 왜?”
“갑자기 집이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오빠네에 신세를 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넌 나에게 또 그걸 숨겼지.”
“아니에요! 결코 교수님을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니에요. 그저 시간이 맞지 않았던 거예요. 오빠 집에는 정말로 급작스럽게…….”
이후 혜수가 뭐라 더 말했지만 도영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반복되는 ‘오빠’라는 단어에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머릿속에 어제 승원이 혜수를 안고 식당을 나가던 장면이 자동으로 재생되었기에.
도영이 매서운 눈빛을 하고 가만히 있자 혜수도 말을 삼켰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가고 도영이 또 묻는다.
“어젠 어디서 잤지?”
혜수가 재깍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도영의 목소리가 더욱 서늘해졌다.
“어디서 잤어.”
“……승원 오빠 집에서 잤어요.”
“하.”
도영이 성난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어제 혜수는 승원의 집에 있었던 것이 맞구나. 한승원 그 자식이 데리고 있으면서 끝까지 거짓말을 한 것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