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우리는 사촌입니다
(64/110)
64. 우리는 사촌입니다
(64/110)
64. 우리는 사촌입니다
2022.09.10.
며칠 전 도영이 소문을 들은 날.
도영은 아주 오랜만에 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날이 바짝 선 승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이야?
“한승원. 너도 내 목소리는 듣기 싫을 테니 본론만 말하지. 병원에 혜수에 관한 소문이 도는 것 알아?”
-들었어. 말도 안 되는 얘기더군!
승원이 이를 갈았다. 승원도 며칠 전 친한 레지던트에게 소문을 전해 들은 뒤 이를 어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한승원, 네가 날 좀 도와줘.”
-…….
“논문 제출 날 우리 과와 합동 회식이 있지. 거기서 혜수와 네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해줘.”
잠깐 침묵하던 승원이 코웃음을 친다.
-주도영. 내가 왜 그런 해명을 해야 해? 우리가 연인이라는데.
그랬다. 승원은 이 소문들 중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다.
바로 혜수와 제가 연인이라는 대목. 사촌으로 알려졌다가 이후에 사귄다고 알려지는 것보다는 애초에 연인으로 알려지는 것이 나을 테니까.
그래서 해명을 하더라도 도영과의 추문과 입학시험 유출 소문에 대해서만 할 생각이었다.
-주도영, 나와 관련된 소문은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네 약혼녀나 신경 써.
당당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영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떻게 해결한다는 거지? 시험 유출.”
-……생각 중이야.
그러자 비아냥 섞인 웃음이 들려온다.
“너 혼자서는 쉽지 않을 텐데. 네가 우리 과 시험을 누가 어떻게 내고 어떻게 보관하는지 알 턱이 없으니까.”
-너에게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있지.”
-정말이야? 무슨 방법인데?
“원한다면 방법을 알려주지. 대신 넌 혜수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하겠다고 약속해.”
-……정말 방법이 있는 거야?
“약속이나 해.”
-…….
“끊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즉각 대답이 없자 도영은 제 성질대로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끊어진 휴대폰을 보며 승원은 한동안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주도영과의 거래를 수락하는 것만이 답인가.’
생각 끝에 승원은 다시 도영에게 전화를 했다.
‘혜수가 나와 연인이라는 소문은 포기하자. 지금 더 중요한 것은 부정 입국에 대한 것을 해결하는 것이야. 혜수는 그 사실에 더 스트레스를 받을 테니.’
게다가 도영은 지금 미국에 있으니 혜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다. 도영의 도움이라도 받아 이 상황을 해결할 사람은 저밖에 없다.
그렇게 도영과 승원은 상대방에게 하나씩 내어주기로 했다. 도영은 승원에게 시험 유출에 관한 소문을 잠재울 방법을 알려주고, 승원은 아무런 사이가 아니기로 밝히기로.
하지만 도영은 노아가 일반 병실로 옮겨지자마자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조금만 더 있어 달라는 이식 센터장의 부탁을 뒤로 한 채 돌아왔다.
승원에게 모든 걸 맡겨놓을 수는 없었다. 이 소문의 주인공 중 하나는 자신이고 제가 직접 해결해야만 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서다.
다만, 자신이 없어도 노아를 보는 데는 조금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를 하느라 며칠 밤을 새웠다.
갑작스레 나타난 도영이었지만 승원은 전혀 동요 없이 하고 싶은 말을 이었다.
“혜수와 저는 여러분이 아시는 연인 관계는 아닙니다. 어쩌다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도영을 한번 흘긋 쳐다본 승원은 숨을 들이켰다.
“저와 혜수는 사촌입니다. 정확히는 이종사촌.”
“!”
도영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테이블 위도 또 시끄러워졌지만 도영의 동요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촌이래!”
“연인이 아니었던 거야?”
“그럼 헛소문인가?”
“양다리가 아니네?”
“에이, 그것도 오해였나 봐.”
우두커니 서 있는 도영을 한 번 힐긋 쳐다본 승원은 혜수를 일으켰다. 술에 완전히 취해버린 혜수는 힘없이 승원에게 안겨들었다.
혜수를 안아 든 승원은 도영을 지나쳐갔다. 큰 충격을 받은 듯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한 도영의 바로 곁을 스치며.
식당 문 앞까지 간 승원은 다시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 시선은 마지막으로 도영에게 향했다.
“참. 그리고 소문에 맞는 게 하나 있긴 하더군요. 바로 이 항목입니다. 혜수와 제가 동거한다는 것. 네, 맞습니다. 혜수와 저는 동거하는 사이가 맞습니다.”
“!”
도영의 눈이 더욱 세차게 흔들린다. 혜수가 승원과 사촌이라는 것도 금시초문인데, 같은 곳에 산다니. 여기 들어오기 전에 준비한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 떨리는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승원은 빙긋 웃었다.
“동거라니 어감이 이상한데요. 얼마 전 혜수가 갑자기 살 곳이 없어져 저희 집 빈방을 하나 내주었을 뿐입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은 당연히 없겠지요?”
승원은 혜수를 한 번 더 품으로 끌어당겨 추스른 뒤 다시 도영을 쳐다보았다. 더 날카롭게 벼려진 눈빛이다.
“그리고. 주도영 교수와 우리 혜수의 관계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직접 해명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요. 약혼녀가 버젓이 있는 남자가 제 동생과 추문에 휩싸이다니, 사촌 오빠로서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네요.”
“!”
“제가 아는 혜수는 주 교수와 전혀 접점이 없는 아이거든요. 그러니 주 교수, 그 소문에 대해서는 직접 해명해 주세요.”
도영의 눈썹이 더욱 치켜 올라갔다.
이는 예상했던, 승원과 계획했던 시나리오가 전혀 아니다. 승원이 해명을 하는 것에 더해 직접 저를 겨냥할 줄이야.
‘한승원, 저 새X가!’
승원과 혜수를 보고 있던 식당 안 사람들의 고개가 이번에는 도영에게로, 그리고 유민에게로 돌아갔다.
“주 교수님 왜 말이 없어?”
“신혜수랑 그렇고 그렇다는 건, 그럼 진짜인 거 아냐?”
“그래, 한승원 교수님이랑 혜수에 관련된 것들은 다 밝혀졌으니 이제 주도영 교수님이랑 혜수에 관련된 걸 해명해야지.”
“개꿀잼. 이거 주말 드라마 같다.”
“원래 치정극이 제일 재밌는 법 아니겠니.”
“조용히 좀 해 봐. 교수님 뭐라 하시는지 듣게.”
식당 안은 점점 더 소란해졌다. 승원은 여전히 도영을 노려보고 있었고 도영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침내 도영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온다. 사람들은 모두 도영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똑똑히 밝혀드리겠습니다. 그러려고 여기 온 것이니까요. 신혜수 선생과 저는 여러분이 들으셨던 것처럼…….”
그 순간 유민이 자리에서 휙 일어났다. 예쁘게 미소를 지어 보인 유민은 그대로 도영에게 사뿐사뿐 걸어갔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도영의 팔을 감아 드는 그 다정한 모습에 사람들의 입이 헤 벌어졌다.
“우리 교수님이 그동안 논문 쓰시느라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옆에서 지켜보는 제가 안쓰러울 정도였답니다.”
‘우리’라는 단어에 사람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어우, 뭐야. 닭살이야.”
“사이좋다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유민은 애교 가득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지금은 이렇게 미국에서 회식에 참가하시기 위해 바로 오셨어요. 힘드실 텐데도 불구하고요. 이렇게 좋은 날에 축하만 해도 모자랄 텐데, 근거 없는 소문으로 계속 교수님을 괴롭혀야 되겠어요?”
유민과 친한 몇몇 레지던트들이 맞아, 맞아, 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유민을 내려다보던 도영이 하,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조유민, 그 입 닥쳐. 쇼는 이제 그만하지. 난 지금 당장 너와의 파혼을…….”
순간 유민이 휘청한다. 발이라도 헛디딘 것인지 몸이 기우뚱한다.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유민을 도영은 손도 대기 싫은 듯 그냥 지켜보기만 했고 유민은 마침 근처에 지나가던 종업원을 밀고 말았다.
문제는 그 종업원이 달구어진 숯을 넣어둔 화로를 들고 있었다는 것.
“어머!”
종업원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넘어졌고 화로는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그리고 테이블은 난리가 났다.
“앗, 뜨거워!”
“아악!”
화로에서 나온 숯에 직접 닿아 화상을 입은 사람, 옷에 닿아 구멍이 난 사람, 숯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트는 사람들로 식당 안은 혼란스러워졌다. 숯이 물컵에 빠져 치익, 수증기가 곳곳에 피어오른다.
결정적으로, 숯 하나가 휴지를 모아둔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곳에는 불길마저 일기 시작했다.
“불이야!”
“물 뿌려, 물!”
하지만 다들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였던 터라 입으로 떠들고 발만 동동댈 뿐 누구 하나 그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다. 겨우 물컵을 집어 뿌려도 자꾸 헛나가 쓸데없는 바닥만 적신다.
그사이 불길은 점점 더 거세졌고 화로가 엎어진 테이블은 점점 연기로 뒤덮였다.
“불 좀 꺼!”
“소화기, 소화기 없어?”
결국 불은 식당 주인이 뛰어와 쓰레기통에 물을 붓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뿌옇던 공기가 맑아지고 매캐한 냄새가 좀 사라지자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어휴, 깜짝이야.”
“십 년 감수했네.”
“넌 안 다쳤어? 불에 가까이 있었잖아.”
“으악, 내 옷 구멍 났어. 이거 비싼 건데!”
유민은 급히 자신이 밀어버린 식당 종업원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죄송해요, 제가 발을 헛디뎠어요. 안 다치셨어요?”
“어, 네. 괜찮아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나저나 손님들이 다쳐서 어째요.”
종업원은 혹여나 자신이 사람들의 치료비를 배상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했다. 유민은 즉시 다정하게 종업원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니에요, 이건 제가 해결할게요. 저 때문인데요, 뭘.”
“아이고, 그래 주시면 저는 정말 고맙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없어진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없어진 사람은 혜수를 안고 있던 승원, 그리고 도영이었다.
승원의 집. 침대 위에 혜수를 눕힌 승원은 옆에 걸터 앉아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렇게 다 정리되는 거겠지?’
조금 전 식당에서 혜수와의 관계와 시험 유출 건에 대한 해명을 해냈다. CCTV까지 보게 되었으면 문제가 더욱 귀찮아질 뻔했으나 다행히 유민이 그만두자 말했다.
또 불 때문에 소란이 일어 대답은 끝까지 듣지 못했지만, 남은 도영이 혜수와의 제 관계에 대해서도 해명했을 것이다.
‘곧 아버지 선거이니 혜수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 말했겠지.’
일이 이렇게 되자 혜수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소문이 났던 게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병원 안에서 혜수와 남인 척하다 보니 거슬리는 상황들이 많았다. 다정히 어깨동무를 하는 것, 팔짱을 끼는 것 등등 혜수와의 만남에 제약이 많았다.
‘이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물론 이후 혜수와 사귀게 되어도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사촌이라 말했지만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밝히면 되니까.
“소송만 끝나면 전부 말해줄게, 혜수야.”
승원은 낮게 읊조리며 곤히 잠든 혜수의 볼을 쓰다듬었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찹쌀떡 같은 볼이 움찔한다.
“너랑 나랑은 남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라고.”
그때, 쾅쾅,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승원은 현관으로 가 문에 붙어 있는 외시경으로 밖을 보았다.
험악한 표정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예상했던 대로 도영이다. 식당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혜수를 데리고 빠져나왔는데 도영이 곧바로 뒤따라 온 것이다.
문 너머에서 도영의 거친 목소리가 험악하게 들려온다.
“한승원! 문 열어. 당장.”
“내가 왜 열어야 하지?”
“혜수. 안에 있지?”
“무슨 소리야? 혜수는 여기 없어.”
“그럼 어디 있다는 거지.”
“난 몰라.”
“네가 데리고 나갔는데 모른다고?”
“어. 몰라. 그러니 너 지금 여기서 이럴 이유 없어.”
쾅. 도영이 다시 문을 세게 내리쳤다.
“이 문 열어. 내가 직접 확인할 테니.”
“싫은데? 내가 왜 열어줘야 해?”
덜걱덜걱, 문고리를 비트는 소리가 난다.
“당장 열어!”
“돌아가. 계속 이렇게 소란을 피운다면 경찰을 부르겠어.”
쾅.
“열라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집 안에는 네가 찾는 신혜수 없어.”
쾅쾅, 이제는 문고리를 내려치는 소리가 났다. 도영의 분노 섞인 절규도 들려온다.
“사촌이란 걸 그동안 잘도 숨겼군! 나와, 나와서 이야기해!”
“…….”
“게다가 동거? 하, 기가 차서.”
“…….”
승원은 중문을 꽉 닫아버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지만 듣지 못한 척했다.
몇 달 전, 외과와 정형외과의 합동 회식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그날 밤.
도영의 연구실 앞에서 얼마나 혜수를 기다렸던가. 당시 승원은 심장이 갈기갈기 난도질당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온몸이 떨리도록 느껴지는 아픔과 혼란함,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고통이었다.
그리고 오늘.
도영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처음부터 의도하진 않았지만 놀랍도록 닮았다. 그러니 도영도 아마 그때 제가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승원은 입술을 비틀며 혜수의 곁으로 다시 돌아갔다.
‘혜수야, 신혜수…….’
혜수의 방에 들어가기 전, 도영이 임용을 축하한다며 사주었던 책장이 발에 챘다. 책장 곳곳엔 도영과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도 놓여 있다.
‘…….’
한동안 액자를 쳐다보던 승원은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저릿하게 슬퍼 오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하고 결국 혜수의 옆에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