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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약혼 목걸이 (63/110)


63. 약혼 목걸이
2022.09.07.



 
회식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좋았다. 당연했다. 불금인 데다가 목청 높여 자랑할 만한, 국가가 지원하는 연구 사업 달성 축하가 회식의 주제였으니.

두 과의 의국장은 오늘 돈을 제대로 쓰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질 좋은 한우 등심과 술들이 끊임없이 서빙되었고, 그에 맞춰 분위기도 점점 달아올랐다.

특히 교수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난리도 아니다. 오늘의 주인공 승원을 중심으로 앉은 교수들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가득 채운 술잔으로 파도타기를 하지를 않나, 테이블을 두드려가며 폭소를 터트리지를 않나. 요란하게 승원을 축하했다.

하지만 혜수가 앉아 있는 주위에는 미묘한 공기가 쌓여갔다. 혜수를 자꾸 챙기는 유민, 그런 유민을 안쓰럽게 보는 경애와 그 친구들이 그 원인이다.


‘뭘 자꾸 노려봐.’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들이 자꾸 꽂힌다. 따끔거리는 시선 속에서 혜수는 눈을 내리깐 채 부지런히 입에 고기를 넣었다.


‘맛있는 거나 먹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데.’

눈앞에 차려진 고기는 무려 투 플러스 한우다. 요 몇 년간 먹어본 고기 중 가장 때깔이 좋다. 의국장이 비싼 곳이라고 며칠 전부터 생색을 내더니 과연 마블링이 고급지다.


“여기 소주 한 병만 주세요.”

당당하게 손을 들어 술을 주문한 뒤에는 스스로 잔에 따랐다.

고기 한 점, 술 한 잔 번갈아 입에 넣다 보니 여기가 천국인가 싶다. 고소하고 짭짤한 고기가 기름지다고 느껴질 때쯤, 달콤하고 씁쓸한 소주가 혀를 씻어주니 참으로 조화롭다.


‘캬아. 이 맛이 진짜지.’

술이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다.


‘크, 달다, 달아.’

아무리 흔들리지 말자, 헛소문 따위는 무시하자 다짐은 했어도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던 건지, 술이 음료수마냥 꿀떡꿀떡 잘도 들어간다. 혜수는 한 병을 금세 비우고 또 다음 병을 깠다.
 

쉴 새 없이 화로의 숯이 리필되었다. 식당 내부도 더욱 후끈해졌다. 유민의 얼굴도 점점 상기되더니 나중엔 손부채를 만들어 연신 흔든다.


“더워? 에어컨 더 세게 틀까?”

유민의 옆에 바짝 붙어 시중을 들던 경애가 바로 에어컨 리모컨을 찾았다.


“아니야, 언니. 그냥 내가 옷을 벗을게.”

유민이 카디건을 벗었다. 그러자 목에 걸린 번쩍이는 다이아 목걸이가 드러났다.

다이아몬드를 둘러싸는 꽃 모양의 장식이 화려한 데다가 알도 큼직한 것이, 얼핏 봐도 레지던트의 일 년 치 월급은 쏟아부어야 겨우 가질 수 있는 물건처럼 보였다.

경애가 호들갑스럽게 묻는다.


“어머, 유민아. 웬 목걸이야? 처음 보는 건데? 새로 샀어?”

유민은 수줍게 웃었다.


“이거 교수님이 미국 가시기 전에 사주신 거야. 약혼반지 대신이기도 하고, 우리 한동안 못 보니까. 겸사겸사.”

유민의 주위로 꺄악, 꺄악 소리들이 퍼져나갔다.


“역시. 요즘 다양한 보석들 쓴다 그래도 예물용은 다이아지. 클래식은 영원하잖아.”

“그래? 그런 의미가 있는 줄은 몰랐어.”

유민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그런데 교수님 정말 자상하시다. 반지는 일할 때 걸리적거리니까 목걸이로 사주신 거 아니겠어?”

“응, 그래서 목걸이로 골랐다고 말씀하시더라.”

“너무 예쁘다! 너랑 너무 잘 어울려.”

“고마워, 언니.”

“교수님 안목 역시 보통이 아니네. 뭐, 평소 하고 다니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응.”

“둘이 정말 잘 어울려.”

“고마워.”

흐흐 웃고는 고기를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던 경애가 앗, 소리를 쳤다.


“그런데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일단 아버님 선거 끝나고 결정하려구. 당선되시면 바쁘실 거라 일정을 다시 봐야 해.”

“에이, 당선되겠지. 여론조사 결과 보면 매번 1등이시던데. 그것도 압도적이더만.”

“교수님이랑 나도 꼭 당선되시길 바라고 있어.”

유민은 또 예쁘게 웃었다.


“크, 유민이 넌 일등 며느릿감이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모르는 거랑은 비교도 안 되지.”

경애는 보란 듯 혜수를 흘겨보았고 주위에 앉은 레지던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유민은 경애의 팔을 살짝 잡으며 작게 그러지 마, 언니, 라는 말을 했다. 작게 말한다고는 하는 것 같았는데 혜수에게는 다 들려 혜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후로도 테이블에는 유민의 약혼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결혼식은 어느 호텔에서 할 거냐,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느냐, 신혼집은 어디인가 등등.

듣기 싫었지만 코앞에 앉아 있으니 입력되는 걸 막을 수가 없다.


‘머리 아파. 듣기 싫어.’

혜수는 조용히 술잔만 기울였고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이 점점 늘어났다.

어느 순간 혜수는 유민도, 경애도, 말도 되지 않는 소문도, 저를 짓누르던 스트레스도 다 놓아버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혜수가 테이블 위로 고꾸라지자마자 한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로 승원.

테이블 정 중앙에 앉아 있던 사람이, 더군다나 체격이 다른 이들보다 월등한 승원이 요란하게 일어나니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모일 수밖에 없었다.


“왜 일어나? 한 교수?”

“한 교수, 왜? 술 더 줘?”

승원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대로 레지던트들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쟤 어디 가?”

“한 교수, 어디 가!”

사람들의 시선이 제 뒤로 졸졸 따라붙었지만 아랑곳없이 한 곳을 향해 갔다.

마침내 승원의 걸음이 멈추고, 승원은 제 슈트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옷을 목표점을 향해 가져갔다.

바로 웅크리고 자고 있는 혜수의 등으로.

사람들의 눈이 커다래진다.


“한 교수,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럼 그게 진짜였어? 둘이 동거한다는 것?”

“헉.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레지던트들이 앉은 테이블은 물론 교수들이 앉은 테이블에도 동요가 일었다. 교수들도 이미 그 소문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탓이다.

덮어 준 옷이 흘러내린다. 승원은 옷을 집어 다시 여며준 뒤 자세를 바로 했다. 식당 한가운데에 장신의 남자가 우뚝 서니 구석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까지 전부 모인다.


“안녕하세요, 교수님들, 그리고 선생님들. 제가 오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한 번 쉰 승원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들 아시고 계시겠지만, 요즘 신혜수 선생과 저에 관해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나오는 주제에 헉,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오늘 해명하려는 건가 봐.”

“신혜수는 자는데? 한승원 교수님만 해명한다는 건가?”

“조용히 해 봐. 들어나 보자.”

승원은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웠다.


“전 시험을 유출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이 신 선생도 시험 문제를 미리 보고 오지 않았구요. 그건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술렁술렁, 테이블 위로 소란이 일어났다.


“신혜수가 아니라고? 정말?”

“보증은 뭘로 해?”

“그러게. 어떻게 증명할 거야.”

“그래. 저 말만으로 뭘 해결한다는 거야.”

그런 주위의 반응에 용기를 얻었는지 경애가 목청을 높인다.


“교수님, 증거가 있나요? 말만으로 신혜수의 결백을 증명할 수는 없어요. 더군다나 수술 전 환자에게 껌을 씹어도 된다고도 하는 신혜수인데. 어떻게 입국 시험 1등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터무니없는 질문에 승원은 경애를 노려보았고 경애는 찔끔하고 말았다.

승원의 시선이 너무 무서웠다. 당장이라도 저를 어떻게 할 것 같은 살기 가득한 눈빛. 대천사로 불려왔던, 늘 웃고 다니던 승원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뒷골이 당기는 오싹함에 경애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고 승원은 입술을 비틀었다.


“물론 그것에 대한 해명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해드리죠. 박상훈 과장님.”

“어? 나?”

외과 과장 박상훈이 자신을 가리켰다.


“나? 나 왜?”

“외과 입국 시험은 누가 언제 출제합니까?”

“어, 음. 매해 11월 말쯤 우리 과 교수들이 내지. 나를 비롯해서 각 분과 주임 교수님들이 하지.”

“작년에는 언제 출제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상훈은 휴대폰을 꺼내 달력 앱을 실행했다.


“보자. 11월 26일부터 일주일 동안 문제를 뽑고 시험지를 만들었네.”

“시험일은 언제였습니까?”

“12월 5일. 늘 인턴 필기시험보다는 우리 의국 시험을 일주일 먼저 치러 왔으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왜?”

상훈은 이 상황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승원을 바라보았다. 소문에 말려들었으니 해명하겠다 나선 것 같은데, 과연 승원이 어떻게 빠져나갈까.


“작년 11월 26일부터 12월 5일까지. 저는 한국에 없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11월 중순부터 출국한 상태였으니까요. 정확히 12월 17일에 입국했습니다. 한대 외과 자체 시험은 물론 인턴 시험까지 모두 끝난 뒤죠.”

승원은 이 상황을 미리 준비한 듯 주머니에서 비행기 표까지 꺼내 보였다.


“하지만 교수님. 그걸로도 완전히 결백을 증명할 수는 없어요. 또 다른 지인이 시험지를 보고 교수님께 전달해 줬다면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유민과 경애를 따르는 또 다른 레지던트가 툭 던진다. 승원은 한동안 그 레지던트도 눈에 담았다. 레지던트가 찔끔 어깨를 떤다.


“한대 외과의 입국 시험 문제지. 누가 보관하는지, 어디에 보관하는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이 질문에 주위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희한하게도 상훈만 뭔가를 알겠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짓는다.


“인쇄된 시험지는 대회의실의 금고에 보관합니다. 바로 병원장실 옆에 있는 대회의실요. 그곳은 시험 전에는 출입이 금지되지요.”

“…….”

“그리고 당시 시험지를 보관하고 비밀번호를 설정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경애와 레지던트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 알아?”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과장님 아니야? 과장님이 최종적으로 편집하시는 건데.”

한번 혀를 찬 승원은 분명하고 똑똑한 목소리로 외쳤다.


“바로 조병억 원장님입니다.”

“!”

“작년 조병억 원장님이 취임하신 해부터 시험지는 원장님께 전달되어 원장님이 직접 비밀번호를 설정하셨죠. 맞습니까?”

승원이 상훈을 바라보았고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작년부터 그러기로 바뀌었지.”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면, 혜수가 시험 문제를 미리 알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

식당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기세등등하던 경애조차 입을 답싹 다물었다.


“이렇게 말씀드렸는데도 혜수와 제가 의심된다 하시면 원장실 앞에 설치한 CCTV를 다시 되돌려 보면 되겠지요. 그곳에 대회의실에 접근한 사람도 나올 테니까요.”

승원이 여태 당당하게 앉아 있던 유민을 보았다.


“조유민 선생, 어떻게 생각해? 그 CCTV에는 과연 누가 등장할까?”

모두가 유민의 입을 쳐다보고 있던 그때. 입을 앙 말아 물고 있던 유민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닙니다. 저희 아버지는 매사에 정확하시고 공명정대하신 분입니다. 비밀번호를 유출하실 리가 없습니다. 시험이 치러지기 전에 회의실에 가실 이유도 물론 없구요.”

그 말에 승원이 빙긋 웃는다.


“여러분, 들으셨죠? 입국 시험을 유출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정말 다 헛소문이었던 거야?”

“아니란 거야? 그럼 시험 유출한 사람은 실제로 아무도 없다는 거야?”

“유출됐다는 것 자체가 조병억 원장님이 관련된다는 거잖아. 그럼 없다는 거겠지.”

테이블 위로 또 한차례 소란이 지나갔다. 승원은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제가 아는 혜수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바른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아이입니다. 그건 같이 일해보신 여러분들도 잘 아실 텐데요.”

이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한 번이라도 혜수와 같이 일을 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더 이상 근거 없는 소문으로 제 동생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으면 합니다.”

웅성웅성, 또 테이블이 시끄러워졌다.


“들었어? 동생이래.”

“동생? 동생이면 친동생? 아니면 아는 동생?”

“뭐야, 가족이란 거야? 사귀는 사이라며?”

“좀 조용해 봐. 들어보자.”

그때, 입구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술렁한다. 식당의 문이 열리면서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등장한 탓이다.


“주, 주도영 교수님?”

급하게 뛰어오기라도 한 것인지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도영이 식당 입구에 우뚝 서 있었다. 그에게서는 미처 숨기지 못한 예민하고 날 선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주 교수님!”

“어랏, 주 교수. 여기엔 어떻게 왔어? 아직 귀국 날짜는 한참 남았는데?”

도영은 아무런 대답 없이 혜수와 승원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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