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 드디어 알았다 (62/110)


62. 드디어 알았다
2022.09.03.



 
로체스터의 한 호텔.

도영은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입학시험 유출이라.’

도영은 오늘 처음 혜수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다.

몇 시간 전, 과장 상훈과 귀국 후의 수술실 사용에 대한 논의를 할 때였다.

긴 통화 끝에 결론이 났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런데 필요한 대화는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상훈이 뜸을 들이는 것이다.


“다른 할 말씀이 남았습니까?”

-크흠, 그…… 자네, 그 소문이 사실인가?

“무슨 소문 말씀입니까?”

-아하하……. 못 들었구만. 요새 이것 때문에 병원이 난린데.

또 쓸데없는 얘기를 하려는 건가 생각한 도영은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런데 멀어지는 휴대폰에서 의외의 단어가 들려와 다시 귀를 갖다 댔다.


-신혜수 선생이 말일세.

“우리 과 1년 차 신혜수 선생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신 선생이 말이야. 지금 소문이 돌고 있는데. 어떤 거냐 하면…….

다른 이들과 교류가 없고 남 이야기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온 도영이다. 당연히 이런 소문에 늦을 수밖에 없었다.


‘내 귀에 들어온 정도면 지금쯤 온 병원에 소문이 다 퍼졌겠지.’

이전이라면 승원에게 화젯거리 정도는 들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승원과도 사이가 틀어졌다. 심지어 지금 도영은 미국에 있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혜수가 도영과 만난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조심한다고는 했지만 누군가 봤을 수도 있다. 도영은 죄책감에 한동안 입술을 아프도록 짓씹었다.


‘그런데. 한승원과의 삼각관계에 동거는 또 뭐지?’

승원과 혜수가 같이 있는 것을 도영도 몇 번 보았지만 연인으로 볼 정도는 아니었다. 또 지금 승원이 혜수에게 마음을 품기는 했지만 그것은 일방적이다. 동거 또한 마찬가지다. 얼마 전에 가본 혜수의 집은 승원의 집과 가깝기는 했지만 전혀 다른 곳이다.

게다가…… 입학시험 유출이라는 것은 정말로 말도 되지 않는다.

도영이 아는 혜수는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다. 자신이 맡은 일은 미련하다 할 정도로 열심히 하는 아이다.

물론 시험을 유출했다는 승원 또한 그럴 사람이 아니며, 출제된 시험지 또한 그리 허술하게 관리되지 않는다. 시험지 보관 장소는 승원처럼 갓 교수 임용을 받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내용을 종합했을 때, 도영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와 관련된 사람이다.’

확실하다. 자신만 아니라면 혜수는 이런 소문에 휘말릴 아이가 아니니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왜 내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거야.’

지금껏 혜수와 통화를 할 때면 혜수는 늘 밝게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고 있냐 물으면 그렇다, 아무런 일도 없다고만 말을 했기에 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

도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지금까지 혜수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난 왜 아무것도 모른 채 혼자 혜수가 이 일들을 견디고 참게 만들었을까.

미안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병동에서 동동거리며 일하고 있을 혜수에게 찾아가 용서를 빌고 싶었다. 이런 소문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모든 것은 내 탓이라고.

또 사람들에게 소리 높여 말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신혜수라고. 조유민은 계약 관계일 뿐이며, 단 한 톨의 마음도 없다고.


‘빌어먹을! 왜 약혼 따위를 해서는!’

선거가 끝난 뒤 파혼을 하면 간단할 거라 생각하고 쉽게 동의한 자신에게 화가 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대했어야 했는데!’

자연스레 약혼에 동의하게 만든 사고에 대한, 저를 이렇게 만든 의사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도영은 전지훈련을 가던 중 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그 사고로 같이 동승하고 있던 어머니 은숙은 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들이 이송된 곳은 수술실이 하나뿐인 작은 병원이었다. 도영의 상태가 워낙 위중했기에 더 멀리 갈 수가 없었다.

은숙은 우선 아들을 먼저 수술실로 넣었다. 도영을 두고 다른 병원에 갈 수가 없었기에 꺾여버린 자신의 다리는 뒤로 한 채 아들을 지켰다. 장장 10시간이 넘는 도영의 수술이 끝나고서야 은숙이 수술실에 들어갔다.

그 후 은숙은 다리를 절게 되었고, 설상가상 도영은 의사의 잘못된 판단으로 커다란 후유증을 가지게 됐다.

다리를 저는 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한정적이었던 데다가 도영의 치료에 집중하느라 연기를 할 시간마저 없었다.

결국 은숙은 은퇴를 선언했다. 자신의 꿈 많았던, 빛나던 인생은 포기하면서.

도영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울분이 참을 수 없게 차오른다.


‘그 사고만, 아니 그 의사만 아니었어도!’  

 

 
거친 숨을 내쉬던 도영은 휴대폰을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 이상 혜수와의 관계를 숨겨서는 안 된다. 지금 아버지의 지지율이 70퍼센트가 넘어간다.

이제 파혼을 해도 도영이 지켜주고 싶던 어머니의 바람에도 영향이 없을 것이다. 도영은 빠른 손짓으로 연락처를 검색했다. [아버지.]
 

그 시각, 환자가 끊긴 틈을 타 한숨만 폭폭 내쉬던 혜수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혼자서는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으니 이제는 승원에게 말을 해야 할 때다 싶다.


‘오빠한테 말하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의를 하자. 머리 하나보다는 둘이 낫겠지.’

긴 통화음이 지나가고 승원이 마침내 전화를 받는다.


“오빠, 나야.”

-어, 혜수야. 무슨 일이야?

“물어볼 게 있어서. 지금 통화 잠깐만 할 수 있어?”

-응, 뭔데?

“오빠 혹시 소문 들은 거 있어? 나랑 오빠에 관한 건데.”

-소문?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승원에게서 대답이 다시 들려왔다.


-난 모르겠는데. 우리에 관한 소문이라니, 들어 본 적 없어.

“아, 그렇구나. 그럼 내가 얘기해 줄게. 무슨 소문이냐면, 되게 황당한 건데. 있잖아, 오빠랑 내가…….”

순간 휴대폰 너머에서 승원의 외침이 들린다.


-엇, 혜수야!

“어?”

-나 수술 환자 들어왔다. 어쩌지, 지금 끊어야겠는데.

“아, 알았어. 그럼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할…….”

-아니야. 수술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내가 전화할게. 알았지?

“어, 어. 알았어.”

점점 다급해지는 승원의 목소리에 혜수는 그러겠노라 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의아하다. 이 시간에 승원이 수술실에 있다니.


‘오빠 오늘 당직 아니랬는데.’

고개를 기울이던 혜수는 뭐, 대타로 들어갔겠지 생각하고 의자에 다시 털썩 앉았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헤쳐나갈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시 도영의 방.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지나고도 기철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머니 은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지금이 한국 시간으로는 밤이기는 해도 전화를 받지 않을 시간은 아닌데.


‘왜 받지를 않아!’

이를 벅벅 갈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번갈아 가며 전화를 하고 있는데, 잠깐 쉰 틈을 타 벨소리가 울린다. 어머니인가 했더니 화면에 뜬 발신인은 조유민이다.

유민의 이름을 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필 자신이 미국에 온 이 시기에, 병원을 비운 시기에 소문이 났다.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다면 그런 소문을 만들어 가장 큰 이득을 볼 사람은 누굴까.


‘…….’

잠깐의 생각 끝에 도영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평소라면, 받을 이유가 없다면 절대 수락하지 않을 유민의 전화였지만 이번에는 받아야 했다.


“조유민.”

-안녕하세요, 교수님.

“무슨 일이지.”

-잘 계세요? 메이 클리닉은 어때…….

“본론만 말해.”

-네, 교수님.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요.

“소문?”

-네. 저는 당연히 헛소문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대로 보고…….

“뜸 들이지 말고 제대로 말해. 무슨 소문.”

-신혜수 선생과 교수님에 관한 소문이에요.

“……모르겠는데. 어떤 내용이지.”

-혜수가 교수님을 다른 목적으로 대한다는 겁니다.

“…….”

-전 그런 소문이 돌아도 상관없는데 교수님이 불편하실까 해서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사람들에게 해명을 하려고 합니다.

“언제 들었지.”

-네?

“그 소문 언제 들었냐고. 언제 들었는데 왜 이제야 말을 하는 거지?”

-오, 오늘 들었습니다. 죄송해요, 저도 듣자마자 연락드린 것이라…….

예상치 못했던 질문인 데다가 저를 질책하는 듯한 말투에 유민이 말을 살짝 더듬었다.


“오늘?”

-네, 교수님.

“오늘이라고.”

-네.

즉각 들려오는 대답에 도영의 목소리가 한층 더 서늘해졌다.


“조유민.”

-네?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약혼녀 행세는 집어치우라고.”

-…….

“나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마.”

-……네.

“생각조차 하지 마. 역겨우니까.”

-네, 교수님.

상처가 될 것이 분명한 말들에도 유민은 숨소리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답을 했다.


“그리고. 다시는 내게 사적인 일로 전화하지 마. 마지막 경고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기 전, 도영이 씹어뱉듯 말했다.


“소문이라는 건 말 그대로 누군가가 말을 퍼트리고 있다는 건데. 누굴까, 그 사람.”

-…….

“당연히 조 선생은 모르겠지?”

질문을 했지만 답을 원한 건 아니었나 보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도영은 종료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한참 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도영은 다시 휴대폰을 집어 한동안 쳐다도 보지 않던 연락처를 검색했다. [한승원.]

***

승원과 도영이 맡은 국가 지원 연구 사업의 최종 마감 날, 정형외과와 일반외과의 합동 회식이 열렸다.

두 과는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종종 합동 회식을 해왔는데 특히 오늘은 논문의 완성을 축하하는 것이 주제였다.

비록 주인공 중 하나인 도영은 이 자리에 없었지만 누구도 도영의 부재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먹고 마시는 데에는 시종일관 서늘한 표정만 짓고 있는 도영이 없는 것이 나았기에.


“이번 회식 장소는 대가 한우입니다. 아예 통째로 빌렸습니다.”

기존처럼 교수들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의국원에다가 간호사들과 인턴까지 다 모이는 터라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서 아예 대관을 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한우래!”

“대가 한우 엄청 비싼 곳이잖아! 아싸!”

 

늦은 밤, 혜수는 홀로 고깃집으로 향했다. 회식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고작 1년 차가 당직도 아닌 주제에 회식을 피할 길은 없었다.

어느새 높이 오른 달을 보며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절로 한숨이 나온다.

마지막 수술 환자까지 보고 났더니 어느새 병원에 저 혼자 남아 있는 게 아닌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병원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까지 내려갔는지 충분히 알고 있는데 말이다.


‘달은 또 왜 이렇게 밝아. 내 마음은 온통 까만데.’

한숨을 푹푹 쉬며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는 이미 고기 냄새가 가득하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 레지던트들이 모여있는 테이블로 가니 빈자리가 딱 하나 있다. 바로 유민의 맞은편이다.

……하필. 그리고 유민의 왼쪽에는 향단이 경애가 있고, 주위로는 그들과 친한 레지던트들이 몰려 앉아 있다.


‘저기에는 앉기 싫은데.’

“다른 자리는 없어요?”

“죄송합니다, 손님. 다른 곳은 다 찼어요. 아니면 교수님들 좌석은 몇 군데 비어 있는데. 거기로 안내해 드릴까요?”

“……아닙니다. 그냥 저기 앉을게요.”

혜수는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수술 끝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어서 와, 신 선생. 고생했어.”

유민이 방긋 웃으며 어서 앉으라 손짓한다.


“네.”

혜수가 앉으니 물수건이며 물컵이며 젓가락도 챙겨준다.


“얼른 먹어. 배고프겠다.”

“……감사합니다.”

혜수를 챙기는 유민을 보며 경애는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이 착한 것, 그렇게 살아서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헤쳐나갈래? 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