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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특제 폭탄주
2022.08.31.



 
남자가 연신 쳐진 눈꼬리를 치켜 올린다.


“신혜수?”

“네, 저 혜수예요. 기억 안 나세요? 절 보시고 우리 의국의 미래가 밝다! 하셨었잖아요.”

“내가?”

혜수는 더욱 행동을 크게 하며 방긋방긋 웃었다.


“네! 전 선생님이 의술이 뛰어나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도 선생님의 성함을 잊은 적이 없는데, 선생님은 이렇게 절 금방 잊어버리시기예요?”

“어? 내가 뛰어나?”

남자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귓가로 향한다.


“그럼요, 선생님이 여기 의국에 계실 때 신의 손이었단 이야기가 아직도 전해져 오는걸요.”

“그래, 내가 그랬었지? 아하하하.”

술에 거나하게 취했지, 칭찬도 들었지, 기분이 좋아진 남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킬킬, 크게 웃었다.


“그때 그 수술실에서 선생님이 재수 없는 마취과와 한판 뜬 이야기는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구요.”

“맞아. 마취과 놈들, 지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맨날 수술실에 앉아서 졸고만 있는 것들이. 에잉, 드러운 것들.”

그 틈을 타 혜수는 지수와 세정에게 손짓을 했다.


‘빨리 가. 저리 가. 얼른!’

혜수와 남자의 대화를 들으며 눈치만 보던 지수와 세정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혜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님, 의국에도 한 번 오시면 참 좋을 텐데요. 저희한테 한 수 가르쳐 주세요, 네?”

“흠흠, 내가 수술이 요새 많아서 말이야. 시간이 날 지 모르겠네. 자네 이름이 뭐라 그랬지? 신…… 뭐?”

“네, 선생님! 1년 차 신혜수입니다!”

“그래, 그래. 신혜수. 으허허허.”

“네, 선생님. 제가 한 잔 올릴게요.”

혜수는 빈 맥주컵에다가 맥주와 소주, 사이다를 섞어 남자 앞에 대령했다.

혜수가 자랑하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사이다의 달달한 맛에 쭉쭉 들이키다 보면 어느새 만취해 있고,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맥주와 소주의 절묘한 향과 맛의 비율에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는 그 술……은 개뿔.

그냥 소맥에 사이다를 잔뜩 섞었다. 술에 취한 사람이니 달달한 맛이 들어가면 무조건 맛있다 느끼겠지.


“선생님, 이거 제가 특허 낼까 생각 중인데요. 한번 드셔보시겠어요?”

“이게 뭐야? 맥주? 아닌데. 색깔이 연한데. 소맥인가?”

“아니요, 일단 한번 드셔보세요. 제가 오늘 선생님을 뵈면 대접하기 위해 특별히 갈고 닦았답니다.”

“으하하하, 너 말 참 이쁘게도 한다잉?”

맨정신에 들으면 손발이 오그라들 말이었지만 술에 잔뜩 취한 남자에게는 그저 저를 추켜세워주니 기분이 좋아지는 말들일 뿐이다.


“그래, 그거 이리 줘 봐라.”

남자는 혜수의 손에서 잔을 뺏어 단숨에 들이켰다. 달콤한 맛이 혀를 듬뿍 적시더니, 마무리로는 알싸한 탄산과 알코올이 목젖을 탁, 치고 넘어간다.


“어? 뭐야, 이거? 맛있는데?”

“그렇죠? 역시! 선생님을 위해 준비한 술이니 그렇습니다!”

“으허허, 한 잔 더 타봐.”

“예이!”

혜수는 신나게 다시 폭탄주를 말아 남자에게 주었다.

그렇게 말고, 마시고, 말고, 마시고, 말고.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들이 바닥을 보일 때쯤, 남자는 드디어 테이블 위로 뻗어버렸다.


“흐음, 음냐 음냐.”

코를 테이블에 박은 채 드르렁 코를 고는 남자를 내려다보던 혜수는 휴, 땀을 훔쳐냈다.
 

다음 날, 회진이 끝나고 인턴 지수가 혜수에게 다가왔다. 혜수에 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뒤로는 찬바람이 쌩쌩 불던 애가 먼저 말을 건다.


“저, 신 선생님.”

“지수 샘? 무슨 일이에요?”

“선생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지수가 머뭇대며 말을 꺼냈고 혜수는 지수가 소문에 관해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임을 직감했다.


“지수 샘, 지금 시간 돼요?”

“네, 됩니다.”

“그럼 우리 차 한잔할까요?”

“네, 선생님.”

혜수는 지수를 데리고 로비의 카페로 갔다. 커피를 두 잔 시켜 지수의 손에 한 잔 쥐여 주고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뭘요.”

혜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먼저 말을 꺼냈다.


“저한테 말해줄 게 뭐예요?”

“저…….”

손톱을 만지작거리던 지수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요, 선생님.”

“…….”

“제가 해야 할 일을 선생님께 고의로 미뤘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앉아요, 앉아. 누가 보면 내가 샘을 갈구는 줄 알겠어요.”

혜수는 지수를 당겨 제 옆에 다시 앉혔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시는 안 그럴 거죠?”

“네!”

지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요. 세정이도 뉘우치고 있어요. 지금 MRI 가느라 오지는 못했는데 정말 죄송하대요…….”

“좋아요. 이번에는 봐주죠.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선생님. 여쭤보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혹시 지금 병원에 저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나요?”

“……네.”

“무슨 소문이에요? 알려줘요.”

“……선생님, 그거 사실 아니죠?”

“뭔지 알아야 사실의 진위를 판정해 주죠. 얼른 말 해줘요.”

“충격받으실까 봐요.”

“괜찮아요. 각오 단단하게 했어요.”

“네.”

숨을 크게 들이쉰 지수가 띄엄띄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병원에 입국 시험을 조작해서 들어온 레지던트가 있다고 소문이 났어요.”

혜수는 눈을 키웠다.

의외의 주제다. 저에 관한 소문이라면 도영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웬 조작?


“그래서요?”

“지금 우리 병원에 입국 시험을 자체적으로 치루는 과는 외과밖에 없잖아요. 다른 과들은 다 인턴 시험으로 평가하니까.”

“그렇죠. 그럼 그 시험을 조작한 사람이 누군데요?”

조마조마하며 물었다. 설마 내 이름이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난 아무런 힘도 없는데 무슨 수로 조작을 해?


“선생님이요.”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듣고 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저, 저요?”

“네, 선생님이래요.”

“아니, 무슨 근거로요? 증거는 있대요?”

“한 레지던트가 회식에 갔다가 들었대요. 외과 입국할 때 시험 치는 거, 미리 시험 문제를 빼돌려서 문제를 알려줬다고. 술에 취한 교수님이 다 말했대요.”

“어느 교수님이요?”

“그건 모르겠대요. 옆방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들었대요.”

“……그게 저라는 증거는 아니지 않나요?”

어이가 없다. 누가 말한 건지도 모르는 소문의 희생양이 내가 되다니.


“선생님이 입국 시험 1등이라면서요.”

“!”

말도 안 돼. 내가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밤잠 설쳐가며 얼마나 공부했는데. 그 결과가 부정 입국으로 이어질 줄이야. 혜수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건 말이 안 돼요. 단순히 그것만으로…….”

“게다가 지금 외과 레지던트 중에 교수님들과 끈이 있는 사람은 조유민 선생님이랑 선생님뿐이라서요.”

“끈이요?”

“네. 교수님들과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이요.”

“저랑 조유민 선생님이요?”

맞다. 유민의 아버지도 병원장이니 끈이 있는 셈이다.


‘설마 승원 오빠와 사촌지간인 것이 다 알려졌나? 그런데 조유민 선생님이 아닌 나로 추려진 이유는 뭐지?’

곧 인턴이 그 이유도 말해줬다.


“하지만 조유민 선생님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입국할 수 있다는 의견들이에요. 아빠가 병원장이고 평판도 좋으시니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고…….”

하, 이유가 기가 막히다. 혜수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가지고 있다는 그 끈은 뭔데요?”

“선생님이 사귀는 사람이 여기 교수잖아요.”

“!”

승원과 가족인 것을 말해줄 줄 알았는데, 사귄다는 내용이 나올 줄이야.

여러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설마 내가 주 교수님과 그런 사이라는 것을 누군가 아는 것인가?

역시 선거가 끝날 때까지는 마음을 억눌렀어야 했나? 내가 너무 성급했나?

교수님과의 관계가 발전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소문의 주인공이 안 되지 않았을까?


“제가, 제가 사귀는 사람이 누군데요?”

하지만, 지수의 대답은 또 예상을 뛰어넘었다.


“정형외과 한승원 교수님이요.”

“네?”

“두 분, 동거하는 사이라고 하던데요.”

“허…….”

너무 당황스러우면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런 것인가. 혜수는 한참을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한승원 교수님과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사촌이라는 얘기를 하려다 말을 삼켰다.

사촌이라 밝혀도 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가족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면 더욱 불리해질 수도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이 덧씌워져 제 소문에 기름을 붓게 될지도. 신중하자, 신혜수.


“아무튼, 저랑 한승원 교수님은 절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에요.”

문제는 소문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 지수가 계속 말을 잇는다.


“그런데 요즘 선생님이 주도영 교수님께도 집적거리고 있다고…….”

“네에?”

혜수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주, 주 교수님 아버지가 서울 시장 당선이 될 것 같으니까 그쪽으로 갈아타려 한다고들 말해요. 교수님 집안을 보고요.”

“하!”

첩첩산중이다. 대체 나와 관련된 헛소문이 몇 가지나 생긴 거야?

하지만 소문이 더해질수록 혜수는 오히려 머릿속이 맑아짐을 느꼈다. 이쯤 되니 이 소문의 정체를 알 것 같아서.

처음 승원과 입국 조작의 주인공으로 지목되었을 때는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쳐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 이건 모두가 오해에 빠진 상황이다, 그러니 오해를 풀면 되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도영에게 작업을 건단 얘기까지 나오니 확실해졌다.

이건 날 일부러 엿 먹이기 위해 누군가가 지어낸 악의적인 소문이란 것이.


 
지수가 표정이 좋지 않은 혜수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전 처음 그 소문을 들었을 땐 선생님이 그럴 분이 아닐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들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니까…… 휩쓸려서 같이 나쁜 짓을 했어요.”

“…….”

“변명하는 건 아니에요. 충분히 반성하고 있습니다.”

지수는 고개를 다시 푹 숙였고 혜수는 지수의 얼굴을 바로 해주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제가 더 고맙죠, 선생님. 저희가 그렇게 얄미운 짓을 했는데도 회식 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인턴의 사죄가 이어지는 와중 휴대폰이 울렸다. 병동에서 일이 있다고 인턴을 부르는 전화다. 혜수는 인턴을 일으켰다.


“제가 시간 너무 많이 뺏었죠? 바쁠 텐데 미안해요. 가서 일 봐요.”

“아니에요. 선생님. 또 궁금한 것 있으시면 여쭤보세요.”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정말로.”

병동으로 다시 올라가며 혜수는 골똘히 생각했다.


‘누가 그랬을까.’

누군가 이중, 아니 삼중으로 함정을 파고 저를 기다리고 있다.


‘대체 누구지? 이렇게 날 모함할 사람이.’

제게 머리끈을 내밀며 곤란한 듯 웃던 유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저만 보면 못 잡아먹을 듯 굴던 경애의 얼굴도 지나갔다.

아니면 또 다른, 내가 모르는 사람일까?
 

소문에는 발 대신 날개가 달린 듯했다. 누군가 고의로 퍼트리는 게 확실한 것처럼.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간 소문 덕에 병원 어딜 가나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시선이 쏟아졌다.

여러 소문 중 혜수에게 가장 악영향을 준 소문은 그것이었다. 혜수가 유민의 약혼자인 도영에게 집적거린다는 것.

병원장의 딸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는지 사람들은 입을 모아 유민을 대신해 혜수를 욕해줬다. 평소 유민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 것도 한몫했다.

이번 소문이 더해지면서 유민은 로맨스 소설의 가련한 여자 주인공 이미지를 얻었고, 혜수는 남자 주인공을 가로채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는 악녀 이미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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