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정체 모를 소문
(59/110)
59. 정체 모를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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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정체 모를 소문
2022.08.24.
요즘 혜수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우선 병원 일이 잘 흘러갔다. 주치의 일도 완전히 익숙해져 실수를 하는 일이 매우 드물었고 가장 큰 숙제였던 연구팀 논문까지 마무리 지어 도영에게 이메일로 제출했다. 이제 도영이 최종 편집해 마감일에 맞추어 보내기만 하면 된다.
또 집이 없어진 일도 잘 해결이 됐다. 승원이 도와준 덕분에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든든한 집을 얻었다.
마지막 이유는 도영. 비록 지금은 미국에 있는 도영이지만 늘 혜수가 깨어 있을 때를 맞춰 전화를 해주었다.
도영과의 대화는 늘 따스했다. 그는 마음의 위안이었고 일상의 자극제였다.
‘물론 아직은 이 관계가 비밀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것도 곧 없어지겠지.’
혜수는 선거가 끝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도영과 당당하게 야외 데이트를 즐길 곳을 미리 찾아 놓기도 했다.
늦은 밤, 저녁을 배불리 먹기는 했지만 병동을 오가다 보니 금세 배가 고프다.
‘의국 가서 컵라면이나 먹을까.’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데 창밖에 비가 온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져 있고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던가? 낮에만 해도 화창했는데.’
일기예보와 전혀 다르니 이상하다 생각하며 의국에 갔을 때였다. 늘 열려있던 탕비실 문이 닫혀 있다.
‘문이 닫혀 있네? 안에 누가 있나?’
벌컥 열어보니 테이블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다. 경애와 다른 윗년차 레지던트들이었다. 그들이 혜수를 보고는 화들짝 놀란다.
“선생님들, 안녕하세요. 뭐 드세요?”
혜수의 인사에도 대답도 없이 허둥지둥 먹던 것을 정리하고 탕비실을 휙 나가버렸다.
‘바쁘신가?’
의아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컵라면에 더운물을 부었다. 고소하고 매콤한 냄새가 솔솔 풍긴다.
“맛있겠다. 빨리 익어라!”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면서 휴대폰을 보니 아빠 신정섭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다.
-혜수야, 오늘도 당직이라며? 별일 없고?
-응. 응급실 아직 조용하네. 이대로 응급실 문 닫았으면 좋겠다.
-하하.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더라.
-ㅜ.ㅜ알아요. 그냥 내 소원이지, 뭐.
-우리 딸 힘내. 조금만 더 참아. 2년 차 되면 그래도 나아질 거야.
-응, 아빠도 오늘 야간이지? 할 일 많아?
-많아도 뭐, 네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난 CCTV만 쳐다보고 있으면 되는걸. 우리 딸 정말 대단해.
-에이, 아빠도 다 해보셨으면서.
-하하. 언제 적 이야기야.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순찰하러 가야겠다. 힘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응, 알았어요. 아빠도 힘내요♥
다음 날 아침, 브리핑을 하기 위해 혜수는 의국의 회의실로 갔다. 의국원들이 제법 모여 있는지 회의실로 뻗어 있는 복도까지 잡담 소리가 새어 나온다.
“……주도영.”
“……약혼…….”
“입국…….”
“……조작”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드문드문 도영의 이름이 들려왔다. 요즘도 병원 사람들은 모이면 심심찮게 도영과 유민의 이야기를 하곤 하니 또 그런 건가 했다.
그런데, 혜수가 회의실에 들어가자 일순 들려오던 소리들이 뚝 끊긴다. 무리 지어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후다닥 제 자리로 찾아간다.
‘뭐지? 어제 탕비실에서도 이랬던 것 같은데.’
연달아 또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 자꾸 이런 일이 생기니 사람들이 저와 포함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일단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고 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늘 혜수의 뒤에 앉는 재성이 말을 붙여온다.
“신혜수, 너 말이야.”
“네, 선생님?”
혜수를 보며 눈을 끔뻑이던 재성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음, 아니다.”
“무슨 일이신데요?”
“아니야. 브리핑 준비나 해.”
재성은 헛기침을 하더니 태블릿으로 더욱 고개를 숙였다. 더 말을 붙여보려 했는데 때마침 과장 상훈이 들어와 브리핑이 시작되어 버렸다.
이상한 상황은 병동에서도 이어졌다. 회진을 하기 위해 병동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간호사와 인턴들이 속닥속닥거리다가 혜수를 보자마자 어색하게 움직이며 흩어져 버리는 게 아닌가.
이쯤 되자 혜수는 지금 사람들이 이러는 것이 저 때문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
미국 미네소타주에 위치한 도시인 로체스터.
그곳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메이 클리닉이 있다. 특히 메이의 이식센터는 세계에서 몰려드는 특이한 케이스의 환자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었다.
도영은 새벽같이 일어나 중환자실로 가 노아의 상태를 살폈다.
그때, 중환자실의 문이 열리며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린다. 도영과 같은 수술팀이 되어 노아의 수술을 한 외과 의사 제니퍼 브라운이 들어온다.
오늘도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 탑에 육감적인 다리 라인을 보여주는 스커트 차림이다. 중환자실에서 노아를 보며 밤을 새웠음에도 반짝이는 생기가 흘러넘쳤다.
제니퍼는 그대로 도영에게 가 방긋 웃으며 아는 체를 했다.
“도영, 오늘도 일찍 왔네.”
“브라운.”
도영이 제니퍼를 보는 듯 마는 듯한 뒤 다시 노아로 시선을 돌리자 제니퍼가 도영에게 더욱 바짝 다가갔다.
“도영, 어젯밤에 노아 혈압이 계속 높았어.”
“음.”
차트에서 혈압의 추이를 본 도영은 노아와 연결된 약물 펌프를 몇 가지 조절했다.
“와, 도영. 이 약을 이렇게도 써? 난 이렇게 조절하는 거 처음 봐.”
애교 섞인 목소리로 과장된 포즈를 취하며 제니퍼가 한 발 더 도영에게 다가갔다. 도영은 그대로 발을 옮겨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딱 목소리만 전달될 정도로 거리를 벌렸다.
“브라운, 난 오늘 에코(echo:심초음파)를 다시 찍을 생각이야. LVH(left ventricular hypertrophy:좌심실 비대)가 더 진행됐을지도 몰라. 원래 하트페일러(heart failure:심부전)도 있었으니 지금쯤 하는 게 좋겠어.”
“알았어, 도영.”
“소변량은?”
“시간당 체중당 1.8. 이뇨제 쓰지 않아도 그 정도는 나와.”
“그래. 오늘 밤은 내가 지켜보지.”
말을 마친 도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환자실을 나갔고 제니퍼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흐음, 오늘도 싸늘하네, 도영은.”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 제니퍼?”
“무슨 소리. 내가 이렇게 해서 안 넘어오는 남자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제니퍼가 탐스러운 금발을 손으로 쓸어 어깨 뒤로 넘겼다. 그런 제니퍼를 간호사가 위아래로 훑는다.
“하긴, 네 외모면 누군들 안 홀리겠어.”
“도영 정말 멋있지 않아? 동양인 중에 저런 외모를 가진 남자는 처음 봤어. 한국인은 다 저렇게 생긴 건가? 한국에 가보고 싶어졌어.”
“잘해 봐, 제니퍼. 도끼질 계속하면 결국 오크 나무도 넘어간다잖니. 그런데 오늘은 도영 안 따라가? 식당에 가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 지금 가려던 참이야.”
옷매무새를 만진 제니퍼는 도영이 지나간 길을 또각또각 그대로 밟아나갔다.
***
오전 내내 혜수는 바쁘게 일했다. 점심으로는 겨우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하나 사 먹고 병동에 다시 올라갔을 때였다.
혜수는 스테이션의 뒤에 있는 준비실에 들어갔다. 그곳에 있는 데스크에 간호사들이 주치의가 할 일이 있으면 재료를 준비해 놓는다.
그런데, 데스크 위에 환자 정보가 적힌 스티커가 한가득 있는 게 아닌가. 이 스티커는 환자의 병실, 이름, 검사 항목을 적어놓은 스티커로 ‘이 환자에게서 이걸 검사해주세요’라는 뜻이었다.
문제는 평소 혜수가 하던 양에 비하면 세 배는 늘어 있다는 것.
‘갑자기 왜 이렇게 많아?’
자세히 보니 인턴들이 해야 하는 검사들이 이곳에 섞여 있다.
‘인턴 샘들 일이 왜 여기 있지?’
인턴의 일을 모아두는 데를 보니 휑하다. 인턴은 벌써 여기에 다녀갔고, 일도 다 처리했다는 뜻이다.
‘배정을 잘 못해뒀나? 신규가 들어왔나?’
어찌 된 것인지 물어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밖에서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너도 신혜수 선생님한테 시켰어?”
“어. 당연하지. 안 시키면 바보 아냐? 이렇게 다 해주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혜수는 기척을 더욱 숨기고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뒤에서 그런 짓을 하고 다닐 줄이야. 천사표인 척하더니 그게 다 연기였던 거지. 지금 생각해 보니 딱 봐도 좀 어딘가 구리게 생겼어.”
“맞아.”
“우리 앞으로도 계속 시키자. ABGA(동맥혈가스검사) 하기 싫었는데 잘 됐다. 기회는 왔을 때 이용해 먹어야지.”
“응.”
“지수 너는 근데 신혜수 샘이랑 나름 잘 지내지 않았어? 전에 네 환자 컴플레인 해결해 줘서 엄청 고마워했잖아.”
혜수는 대화의 주인공들을 알아챘다.
‘이지수랑 박세정?’
그들은 지금 외과에 소속된 인턴들이었다.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사회에서 만난 선후배 관계 정도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에이, 그때 난 신혜수 샘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지.”
“감히 조유민 선생님을 건드리다니. 용기가 대단하다. 지수 너도 줄 잘 서라.”
“줄? 무슨 줄?”
“으이고, 이 답답아. 조유민 선생님 아빠가 누구야. 조병억 원장님 아니야!”
“아, 맞다. 그랬지.”
“그럼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어. 알지.”
‘하, 이것들이!’
아직 여름이 완전히 지나지 않았다. 인턴들이 의사가 되어 병원에 들어온 지 반년도 되지 않았다.
여전히 환자에게서 직접 피를 뽑고 각종 관을 넣는 것들에 미숙한 인턴들이 몇 있었고 혜수는 그런 인턴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인턴들이 계속 실패하면 당하는 환자도 힘들고 인턴도 힘들 테니 차라리 제가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인턴 샘, 정 못하겠으면 저한테 도와달라 말해요. 제가 알려줄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렇게 인턴들의 일 몇 가지를 종종 도와주며 지내왔다.
얼마 전에만 해도 지수가 계속 도뇨관 삽입을 실패하자 보호자가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런 보호자에게 사과를 하고 대신 삽입을 해준 것이 혜수다.
그런데…… 이걸 이렇게 악용할 줄이야.
‘가만 안 둬!’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려던 혜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 병원에 저와 관련된 소문이 도는 것 같다. 그것도 좋지 않은 내용들로. 어떤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대뜸 건드리기부터 한다면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
‘먼저 소문에 대해 파악하고 해결하자. 그게 순서야.’
혜수는 휴대폰을 들어 승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빠, 바빠?
-아니, 왜? 무슨 일이야?
병원에 내 소문이 도나 봐, 라고 썼던 혜수는 메시지를 지우고 다시 적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없는데 승원에게 괜한 걱정을 시키나 싶어서다.
-혹시 소문 들은 것 있어?
대번에 답장이 온다.
-무슨 소문?
역시 승원은 아직 들은 게 없나 보다. 아무래도 교수에게는 레지던트나 인턴들의 이야기가 늦게 전달되기는 한다.
-아니야, 아무것도.
혜수는 다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어떻게 하면 티가 나지 않게 소문을 알아낼 수 있을지 고심했다.
다음 날, 병동의 준비실에 갔을 때.
혜수는 제 앞으로 남겨진 어마어마한 양의 채혈 스티커를 발견했다. 심지어 어제보다 더 양이 늘어났다. 인턴들이 또 혜수에게 일을 떠넘긴 것이다.
‘와 나, 보자 보자 하니까!’
당장 인턴에게 전화해 화를 내려던 혜수는 숨을 골랐다.
가뜩이나 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 그들에게 저에 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하면 더 악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대응해서는 안 된다.
혜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쟤들을 어쩔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