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강아지 같은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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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강아지 같은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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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강아지 같은 교수님
2022.08.20.
오늘도 부지런히 병동을 오가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지금 살고 있는 원룸의 주인 아주머니였다.
여태 먼저 전화는 하지 않던 사람에게서 연락이 오니 의아하다. 월세도 꼬박꼬박 잘 입금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지?
혜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아가씨. 나 302호 주인인데. 잘 지내지?
“네. 무슨 일이세요?”
-이번 달이 계약 만기잖아.
“네. 그래서 제가 계속 살 거라고 얼마 전에 문자드렸었는데요.
-알아. 나도 봤어. 근데 이를 어쩌나. 그냥 방을 빼줘야겠어.
“네에? 방을 빼요?”
혜수는 보고 있던 태블릿을 놓고 벌떡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방을 빼요? 갑자기 왜요?”
-그 방을 쓰겠다는 사람이 생겼어. 월세를 더 쳐준다니까 나는 그럴 수밖에 없지.
“제가 드릴게요. 그 사람 얼마 더 준대요?”
-딱 지금 아가씨 보증금의 두 배, 월세는 세 배씩 더 준다네.
“두, 두 배랑 세 배요?”
혜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들어가 있는 보증금도 대출을 받아 넣은 건데, 그만큼을 더 내라고? 월세는 무려 세 배라고?
세상에. 그 낡은 방에 그 돈을 쓴다고?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아무튼 아가씨. 줄 수 있어?
“하지만 너무 비싸잖아요!”
-나도 급전이 필요해서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 이해 좀 해 줘.
“게다가 이번 달이면 사흘 남았잖아요. 미리 말씀을 해 주셔야지, 이렇게 급하게 말씀하시면 전 어떡해요?”
-미안해. 나도 오늘 낮에 부동산에서 연락을 받아가지고. 새로 들어온다는 사람이 꼭 이 집을 해야겠대. 그리고 안 그래도 내가 월세 올리려고 했어. 주위는 이미 다 올랐단 말이야. 여태 싸게 살게 해준 거 알지?
“…….”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삼 년 계약하자고 했잖아.
혹시나 혜수는 병원 일이 바쁘면 원룸이 필요 없게 될 수 있으니 몇 달만 계약하고 들어왔다. 그 일로 주인은 줄곧 혜수를 고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나가라고 하시면 어떡해요. 여기 대학가라 방 구하기도 힘들던데.”
혜수의 말이 길어지자 주인이 짜증을 냈다.
-아, 난 몰라 몰라. 어쨌든 이번 달 말까지니까 그때까지는 방 빼줘. 아니면 계약 만료일 전까지 돈 더 넣던가. 알았지?
그 말과 함께 전화는 뚝, 끊겼다.
“저기요, 아주머니! 아주머니!”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거절 버튼을 눌러버린다. 나중에는 아예 전화를 꺼놓아 혜수는 더는 말을 붙여보지도 못했다.
‘아악, 어떡해!’
어쩔 수 없이 혜수는 틈이 날 때마다 부동산에 전화하고 인터넷 매물을 뒤져보았다.
하지만 가을로 넘어가는 애매한 계절은 대학가에서 방을 구하기가 힘든 시기였다. 대부분 겨울 방학이 되면 다시 연락을 달라며 전화를 끊었고 가뭄에 콩 나듯 있는 매물은 혜수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비쌌다.
“그럼 매물 나오면 연락 좀 주세요, 꼭이요.”
여기저기 연락을 남겨놓고 방이 나면 전화를 달라고 했지만 울리는 전화벨 소리라고는 죄다 응급실이나 병동에서 절 찾는 전화다.
‘으아아, 이를 어째!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뾰족한 수를 만들지 못한 채 방을 빼야 하는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하아, 어쩌지.’
오후 내내 한숨을 쉬며 일을 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내려갔다. 하지만 밥맛도 없다. 밥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위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신 선생. 밥 먹어?”
“한 교수님.”
마침 승원도 밥을 먹으러 온 건지 혜수의 맞은편에 식판을 내려놓고 앉았다.
“시간이 늦었는데. 왜 이제 밥 먹어.”
“…….”
그런데 밥을 앞에 두고도 혜수의 표정이 좋지 않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승원이 눈썹을 치켜뜬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네가 왜 밥을 앞에 두고 제사를 지내.”
하지만 혜수는 지금 승원의 장난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하아.”
“왜? 무슨 일인데?”
“하아. 저 내일 방 빼야 해요.”
“방? 지금 사는 원룸?”
“네.”
“갑자기 왜?”
“주인 아주머니가 방 빼래요.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게 됐다고.”
“근데 내일 당장 빼래?”
“네. 내일이 계약 만기기는 한데 집을 못 구했어요. 저 어쩌지요. 하아.”
“큰일이네.”
승원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짐 많아?”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애초에 원룸 자체가 풀옵션이었어서.”
혜수가 입고 쓰는 옷가지들과 간단한 가재도구들, 그리고 책들이 전부였다. 아마 혜수가 보는 의학 서적이 짐의 가장 큰 부피와 무게를 차지하리라.
“흐음.”
잠깐 생각하는 듯하던 승원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우리 집에 갖다 놓을래?”
혜수도 같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 오빠 집?”
“우리 집 투룸이잖아. 방 하나 비거든. 거기 갖다 놔도 돼. 필요하면 와서 자도 되고. 침대도 하나 남아.”
혜수의 얼굴에 반짝 생기가 돈다.
“진짜? 정말?”
“그럼. 그것 때문에 이렇게 시무룩한 거였어?”
“응. 갑자기 나가라니까 당황했어. 부동산에 연락해 봐도 구하기가 힘들더라고.”
“여기가 대학가라 그래. 방학이 돼야 조금 여유가 있을걸.”
“그러니까. 여러 군데 알아봤는데 가끔 있는 곳은 진짜 비싸더라. 그래서 엄청 고민이었지.”
“우리 집에 와.”
“진짜 고마워, 오빠. 오빠를 생각 못 했네.”
“으이그, 고민하지 말고 나한테 진작 물어보지.”
“헤헤, 그러게. 오빠 최고.”
“우리 집에서 병원 다니면 이모부랑 이모도 걱정 덜 하실 거야.”
“음, 그렇네.”
혜수가 새로 이사하게 되면 그 집은 또 보안은 어떠냐, 혼자 살기 험한 곳은 아니냐, 내가 한 번 가봐야겠다 소리가 이어질 게 뻔했다. 승원과 함께라고 말을 한다면 엄마도 아빠도 대번에 오케이 할 것이다.
“이제 됐지? 밥 먹어, 얼른.”
“응. 맛있게 먹어 오빠.”
함박웃음을 지으며 밥을 입에 떠 넣는 혜수를 보며 승원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며칠 뒤, 혜수는 원룸을 정리하고 승원의 집으로 갔다.
혜수의 원룸에서 가지고 나온 짐들은 라면상자 여섯 개 분량이 다였다. 워낙 짐이 없기도 했고 집을 못 구할 경우를 대비해 숙소에도 짐을 일부 가져다 놓은 탓이었다.
승원이 도와준 덕분에 짐 정리도 금방이었다. 방 청소까지 끝낸 혜수는 거실에 늘어졌다.
“으아, 드디어 끝이다! 도와줘서 고마워, 오빠.”
“뭘.”
“참, 나 월세는 얼마나 주면 돼?”
“됐어. 레지던트가 집에 오면 얼마나 온다고. 어차피 노는 방 주는 건데 괜찮아.”
“그래도 그럼 안 되지! 뭐 갖고 싶은 가구나 가전은 없어? 내가 채울게.”
“없어. 아무것도.”
“그럼 생필품은?”
“괜찮다니까, 정말.”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한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말할게, 그럼.”
“알았어. 꼭 말해야 해.”
저녁으로는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배달시켰다. 그들을 안주 삼아 사 온 맥주로 목도 축였다.
“크으, 역시 이삿날에는 짜장면이지.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다, 오빠.”
“조금만 마셔. 내일 당직이라며.”
“에이, 이 정도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 뭐.”
“네가 술을 잘 마시기는 하지.”
“나 아빠 닮았잖아.”
“하하, 맞아.”
혜수는 맥주를 홀짝이며 승원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그랬듯 승원과의 이야기는 편안했고 재미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오빠 나 맥주 하나만 더 줘.”
“이게 마지막이야.”
“알았다, 뭐.”
승원에게서 맥주를 받아 까던 혜수가 갑자기 생각난 듯 외쳤다.
“참, 오빠!”
“왜?”
“그때 그 좋아한다던 여자는 어떻게 됐어?”
“……그건 왜?”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고백은 했어?”
“아니, 아직.”
아직 안 했다니! 대체 왜! 라 외치려는데 승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단단하고 곧은 목소리다.
“조만간, 곧 할 거야.”
“우와, 진짜?”
“응.”
“꺄악! 기대된다!”
“네가 왜 기대돼.”
“오빠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데 기대가 안 되면 돼?”
혜수는 과장되게 양손을 쭉 하늘 위로 뻗었다.
“한승원, 솔로 생활 몇 년 차이던가! 드디어 모쏠 탈출인가!”
“요게!”
승원은 혜수의 머리를 콩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왜 아직 고백 안 했어?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한 지 벌써 몇 달이나 지났잖아.”
“……준비가 덜 됐어.”
“무슨 준비?”
“그런 게 있어.”
“뭐래. 고백에 준비가 어딨어. 그냥 하는 거지.”
“……그런 경우도 있더라고.”
“흐응.”
혜수는 맥주를 꿀꺽 꿀꺽 마시고는 번쩍 엄지를 들어 보였다.
“크아, 무슨 준비인 줄은 모르겠지만 잘될 거야. 파이팅.”
“……고마워.”
“잘 되라는 의미에서 건배?”
“그래. 건배.”
승원도 맥주캔을 들어 모두 비우고 새로 한 캔을 땄다.
“혜수 넌 요새 다 괜찮아? 일은 어때.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고?”
“없어.”
“그래. 넌 그래 보여.”
“우이씨!”
고민이 없다고 말은 했는데 도영과의 일이 자꾸 떠오른다. 취기가 오르면서 알딸딸하니 마음속 이야기를 모두 비우고 싶어졌다.
‘그냥 내 이야기도 할까? 하지만…….’
고민하는 혜수를 보고 승원이 갸웃한다.
“왜?”
“음…….”
결국 혜수는 제 이야기도 털어놓기로 했다.
‘그래. 승원 오빤데 뭐 어때.’
하지만 선거 전에 도영과의 이야기는 조심해야 하니 다른 예를 들기로 했다.
“오빠, 있잖아. 내가 뭐 하나랑 같이 지내게 됐는데.”
승원이 의외의 단어에 갸웃한다.
“같이 지내? 뭐랑 같이 지내?”
“어, 그, 그러니까.”
머리를 굴리던 혜수는 떠오르는 대로 외쳤다.
“강아지! 강아지를 데려왔어.”
“이 집에서 개 키우게?”
“아니, 만약의 이야기야. 태클 걸지 말고 그냥 좀 들어봐.”
“그래. 계속해 봐.”
“내가 강아지를 데려왔어. 그리고 그 강아지도 날 엄청 좋아하나……. 음, 좋아할 거야. 아마도.”
“응.”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강아지는 주인이 있었던 거야.”
“주인이 있는데 데려오면 어떡해? 그건 범죄잖아.”
“아, 그럼 진짜 주인이 아니고 임시 보호. 임시 보호 중인 주인이야.”
“흐음, 그런데?”
“임시보호 기간이 끝나기 전에 강아지가 날 쫓아와 버린 거지. 물론 나도 반겼고.”
“음. 그래서 임시 보호 주인이랑 싸움이 벌어진 상황이야?”
“싸운 것까지는 아닌데 좀 껄끄러워진 거지.”
“아.”
“이런 상황이면 내가 잘못한 거야? 임시 보호 기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어야 해? 하지만 그 강아지가 날 너무 좋아하는걸. 지금 임시 보호 주인을 당장 떠나고 싶대.”
도영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단어 선택이다. 뭐? 나더러 강아지라고? 하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다른 비유가 없었다.
‘아이, 이게 맞나?’
말하고 보니 무언가 잘못된 비유 같기도 하다. 승원에게 제 의도가 정확히 전달이 되었을까 걱정이다.
승원도 곰곰이 생각에 빠진 듯했다.
“흐음…….”
잠깐 고민하던 승원이 솔로몬처럼 위엄 있는 표정을 짓는다. 목소리도 납작 깐다.
“아니야. 넌 잘못 없어.”
혜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나 잘못 없어?”
“그럼. 우리 혜수가 뭔 짓을 해도 난 혜수 편.”
“에이, 뭐야.”
“정말이야. 네가 강아지가 아니라 자연공원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뿐인 판다를 데려와도 난 혜수 편.”
“푸하하, 그게 무슨.”
“진짜라니까.”
“그럼 내가 물건을 훔쳐도?”
“훔친 이유가 있겠지. 네 편.”
“내가 길거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춰도?”
“응, 네 편. 대신 병원에 데려가 줄게.”
승원이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주먹으로 허벅지를 탕탕탕, 세 번 내리쳤다.
“푸핫, 내가 오빠를 막 때려도?”
“때려?”
“어. 막 물고 뜯고 할퀴고.”
“……그건 좀.”
“뭐야, 뭔 짓을 해도 다 내 편이라며!”
혜수는 승원이 농담을 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고 크게 웃고 말았다. 역시, 이런 비유로는 지금 제 상황을 완벽히 알릴 수 없구나 생각했다.
‘나중에 오빠에게 제대로 말해야겠다.’
승원은 푸하하 웃고 있는 혜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혜수야,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난 네 편을 들 거야. 네가 좋다면 나도 좋은 거니까.’
그날 밤, 혜수는 짐을 챙겨 일어섰다. 승원이 무척 아쉬워한다.
“자고 내일 같이 가자니까.”
“내일 아침에 콘퍼런스 있는데 혹시나 늦을까 봐 걱정돼서. 숙소가 마음이 편해.”
“네가 늦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는데.”
“혹시 모르잖아.”
“그럼 데려다줄게.”
“코앞인데 뭘 데려다줘.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럼 이 앞 골목까지만. 밤이라 어둡잖아.”
“알았어.”
혜수는 승원과 함께 집을 나왔다. 어두운 골목을 나란히 걷던 혜수는 순간 멈칫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짐과 동시에 작게 찰칵 소리가 들린 탓이다. 고개를 쭉 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혜수야, 왜?”
“누가 있는 줄 알았어.”
“누구?”
“아니야. 잘못 봤나 봐.”
혜수는 고개를 흔들며 계속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