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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진통제 말고 견과류 (57/110)


57. 진통제 말고 견과류
2022.08.17.



 
도영은 과장 상훈의 호출로 의국으로 갔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상훈이 환하게 웃으며 도영을 반겨준다.


‘또 무슨 꿍꿍이지.’

도영을 상훈이 저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다. 다른 이들처럼 윗사람에게 알아서 설설 기지 않고 뻣뻣하니 누가 좋아할까.

그러니 상훈이 이렇게 환히 웃을 때는 도영에게서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과장님.”

“어, 앉게.”

도영이 소파에 앉자 상훈이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자네 노아 기억나나?”

“노아 스미스 말씀이십니까? 2년 전 제가 수술을 했던?”

“그래, 그 노아. 그때 미국에서 와서 자네에게 KT(신장이식)을 받고 돌아갔지.”

태어날 때부터 신장이 하나뿐이었던 노아는 처음 병원에 왔을 때 신동맥 협착에 의한 신부전이 이미 오래된 상태였다.

병이 심해지면서 제대로 먹지도, 생활하지도 못했던 노아는 나이에 비해 무척 왜소했고 혈압조차 쉽게 조절되지 않아 미국에서도 손을 쓰지 못해 도영에게 의뢰된 환자였다.

당시 도영은 노아의 신장 이식과 혈관성형술을 성공적으로 집도하였고 노아의 케이스는 유명 외과 학회지에도 게재되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네, 기억납니다. 이후 큰 문제 없이 생활하고 있다 들었습니다만.”

“그래. 그랬는데 이번에 문제가 생겼나 보더군.”

“어떤 문제 말씀이십니까?”

“부모가 노아를 완치된 걸로 착각을 한 건지 병원을 주기적으로 다니지 않았나 봐. 이번에 아주 오랜만에 병원에 왔는데 애 상태가 말이 아닌 거지.”

“…….”

“검사를 했더니 eGFR(사구체여과율)이 3%가 안 나오더래. 그동안 버틴 게 신기할 정도래.”

“……레날아터리(renal artery:신동맥) 상태는 어떻습니까?”

“스텐트 주위로 다시 협착이 진행되어 있대. 물어보니 약을 안 먹였다더군”

“……하.”

잠시 말을 잇지 못한 도영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다시 한국에 온답니까?”

“그게…….”

상훈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자네가 좀 와줄 수 없겠냐는데.”

상훈도 도영이 장거리 비행을 절대 하지 않음을 안다.

이유는 모르지만 도영은 연자로 초청을 받을 때도, 심지어 일생에 한 번 있으면 영광스럽다는 유명 학회에서 큰 상을 받을 때도 매번 가지 않았다.

그 어떤 상황이라도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것은 피해왔다. 일본이나 중국처럼 가까운 거리만 가뭄에 콩 나듯 갈 뿐. 그걸 아는 학회에서도 요즘은 아예 초청장을 보내지를 않고 상장과 트로피만 택배로 보낸다.


“자네가 외국에 잘 안 가려 하는 건 알아. 그런데 그쪽 사정이 안 된대. 노아가 도저히 여기 올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래.”

“…….”

“당장 오늘내일 하는데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어떻게 타고 와. 한국까지 이송하는 비용도 문제고. 부모는 이제 이렇게까지 하느니 그냥 포기하겠다 한다는군.”

‘포기’라는 단어에 도영의 눈썹이 꿈틀한다.


“투석을 하고 있기는 한데 혈압 조절이 전혀 안 되나 봐.”

“……하.”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수술 당시 노아가 3살이었으니 이제 겨우 5살이 된 아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목숨은 부모의 손에 달려 있음을 몰랐단 말인가. 어떻게 살려낸 아이인데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놓고서는 포기를 하겠다니!

또 싸늘한 눈빛을 하고 입을 꾹 닫고 있는 도영을 보며 상훈이 말을 더듬는다.


“가, 갈 수 있겠나? 가, 강요는 아닌데 그쪽에서는 꼭 와주면 고맙겠다는데……. 그……. 우리 병원이랑 교류도 가장 활발한 곳이니 자네가 가주면 의국 입장에서도 큰 도움이 될 거란 말이…….”

상훈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아이의 목숨도 목숨인데 미국에서도 손꼽히게 유명한 병원의 외과와 협력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는다는 걸 넘어서서 그곳에 도움을 주는 의국이 된다는 것. 한대 외과 의국의 명성을 더 올릴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말에 도영의 눈빛은 점점 더 서늘해진다. 상훈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아하하하. 힘들까? 힘들겠지? 그,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안 된다고 연락을 하지, 뭐.”

“…….”

도영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모든 수술에 최선을 다해 임하는 도영이지만 노아는 특히 기억에 남는다. 수술의 난이도 자체도 쉽지 않았으며 신장뿐만 아니라 간, 심장, 폐 어느 하나 온전한 기능을 가진 장기가 없었기에 사력을 다해 집도했고 보살폈었다.

2년 전, 육 개월의 긴 입원 생활을 끝내고 퇴원하던 날 저를 보며 방긋방긋 웃던 노아.

처음 병원에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보기 좋게 살집도 오르고 혈색도 좋아졌던 노아였다. 한국어를 익혀 혀 짧은 발음으로 고마워요, 선생님 하며 손을 흔들던 노아.

그 천사 같던 아이가 또 병마와 싸우고 있다니.


‘갈까?’

도영은 흘긋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도영이 장거리 비행을 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팔 때문이었다.

언제 통증이 올 줄 모르는 상태에서 비행기를 탈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식은땀을 흘리는 그 모습을, 근육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는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는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그래서 꼭 필요한 단거리 비행 위주로 출장을 다녀왔다.

하지만 요즘은 경련이 아예 발생하지 않는다. 어머니 은숙을 만나 악몽을 꾼 날,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이 또한 혜수 덕분임을 도영은 아주 잘 안다.


‘지금이라면 갈 수 있을지도.’

자신이 살려냈던 아이가 또다시 자신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자신이 아니면 그 아이는 곧 세상을 떠날 것이다.

지금 이 손에는 한 아이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살릴 수 있는 생명을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경련 때문에 포기해야 하나.

한참을 더 침묵하던 도영이 드디어 입을 뗐다.


“가겠습니다.”

“뭐? 진짜!”

의자에서 튀어 오른 상훈이 덥석 도영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도영이 상훈의 손을 뿌리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정 조율해서 알려주십시오.”

“그래, 고마워, 정말 고마워!”

 

***

인천국제공항.

수속을 한 뒤 환전을 하기 위해 은행을 찾던 도영은 저 멀리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했다. 작은 머리에 어깨까지 닿는 갈색의 찰랑한 머리카락, 활기차고 당당한 발걸음.


‘신혜수?’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일요일인 오늘 도영을 배웅하기 위해 당직도 바꾸고 공항에 나오겠다는 혜수를 필사적으로 말린 게 몇 번이었던가.

3주나 되는 긴 시간 동안 혜수를 못 보는 것은 매우 아쉽지만 공항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누가 혜수와 제가 있는 것을 보고 인터넷에 올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혜수에게 닥칠 일들이 걱정이다.

눈을 깜빡여 자세히 보니 혜수보다 키도 작고 머리카락 길이도 더 길다. 뒤돌아보는 얼굴은 더더욱 다른 사람이다.


‘헛 게 다 보이는군.’

줄곧 혜수를 떠올려서 그런가, 별 착각을 다 한다 생각하며 도영은 환전을 마쳤다.

출국장으로 이어지는 검색대를 향해 가던 도영은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주위로 두리번거리는 한 할머니와 부딪혔다. 할머니가 외마디 소리를 친다.


“윽!”

그런데, 할머니의 목소리가 묘하다. 푹 눌러 쓴 등산용 모자 아래로 보이는 뽀글한 파마머리, 알록달록한 꽃무늬 점퍼와 바지, 구부정한 허리까지 겉모습은 누가 봐도 노인인데 목소리는 너무 젊다.


‘노인이 아닌가?’

“어르신, 부딪힌 곳은 괜찮으십니까?”

할머니를 부축하며 모자 아래의 얼굴을 가늠하려는데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님!”

“!”

100미터 바깥에서 들어도 구분할 수 있는 목소리, 혜수의 목소리다.


“신혜수?”

외치기는 했는데 순간 후회했다. 당직인 혜수가 여기 있을 리는 없으니 또 헛것을 들은 게 아닐까 해서.

그런데, 이게 웬걸. 할머니가 검지를 입에 갖다 대는데 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쉬잇, 교수님. 맞아요, 저 혜수예요.”

헉, 진짜 신혜수다. 당황한 도영은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너, 여긴 어떻게 왔어?”

“배웅해 드리려고 왔죠.”

그러면서 모자를 살짝 추켜올리고는 씨익 웃는다.

어울리지도 않는 할머니 분장까지 하여 이곳에 나타난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도영은 푸하하, 배를 잡고 한참을 웃었다.


 
눈물이 나도록 웃는 도영을 보고 혜수가 입을 삐죽인다.


“왜 웃으세요?”

“지금 이걸 변장이라고 한 건가?”

“네. 감쪽같죠?”

“……그, 어, 음, 그렇군.”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렇게나 으쓱해 하는데 하나도 안 감쪽같다, 네 모습 그대로다, 모자를 조금이라도 들추면 안 되겠다, 라고는.


“왜 미리 온다 말을 하지 않았어. 출국장에 들어갔으면 어쩔 뻔했어.”

“놀라게 해드리려고 했죠. 그리고 교수님이 절대 나오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맞아. 그랬지. 그런데 왜 나왔어.”

“드릴 게 있어서요.”

“게다가 오늘 당직이었지 않나?”

“바꿨죠. 반나절만.”

헤헤, 웃던 혜수가 도영을 잡아 끈다.


“아직 시간 여유 있으시죠? 저희 저리로 가요.”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간 혜수는 도영을 마주 보고 섰다. 그러더니 도영의 오른손을 잡아올린다.


“출국 전에 마지막으로 잡아드리고 싶어서요. 오지 말라고 하셨지만 안 들키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래서 변장하고 왔어요.”

“…….”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오시길 빌게요. 에, 그러니까 제 말은 팔이 전혀 안 아프실 거란 뜻이에요.”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도영은 왜 왔냐, 잔소리를 하는 대신 빙긋 웃고 말았다.


“그리고 이거요.”

혜수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리더니 곧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투명한 병 안에는 구운 아몬드와 캐슈너트 등이 들어 있었다.


“이건……?”

“혹시 미국에서 몸이 안 좋으실 때가 있으면 드시라구요. 진통제랑 신경안정제는 줄일 수 있으면 줄이는 게 좋잖아요.”

“……캐슈너트로?”

구운 견과류가 어떻게 진통제를 대신해? 라 생각하며 턱을 기울이는 도영을 보며 혜수가 황급히 덧붙였다.


“어, 물론 약효 자체는 당연히 없겠지만 플라시보라고 생각해 주세요. 제가 만든 거니까요!”

“아.”

혜수가 준 것이라면 정말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혜수의 손길도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도영의 통증을 잠재우고는 하니까.

이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도영에게 혜수는 밤새 오븐으로 제가 직접 구웠다고 젠체를 했다.


“단 걸 안 드시니까 뭘 준비할까 하다가 생각난 게 이것밖에 없었어요. 구운 견과류니까 미국 입국 심사에서도 통과될 거예요.”

혜수가 도영의 손을 펴 손바닥에 병을 올려주었다. 바쁜 와중에 견과류를 손질하고 굽고, 예쁜 병에 담아 포장까지 해놨다.

제 손을 한동안 바라보던 도영은 혜수를 당겨 힘껏 끌어안았다.

혜수를 발견하고 나서부터 줄곧 근질근질하던 가슴이 이젠 쏟아지듯 벅차올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충분해. 고마워.”

놀란 혜수가 두 손을 뻗어 밀어냈지만 아랑곳 없이 껴안았다.

혜수가 흔드는 손을 뒤로하고 도영은 보안 검색대를 통과했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출국장으로 들어간 도영은 고개를 들어 표지판을 바라보았다. 게이트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도영은 누군가의 캐리어를 미처 보지 못하고 넘어질 뻔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겨우 중심을 잡고 다시 몸을 일으켰으나 품 속에 넣어두었던 유리병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병이 산산조각 났다.

혜수가 진통제 대신이라고 넣어두었던 견과류들이 바닥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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