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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내 유일한 욕심 (56/110)


56. 내 유일한 욕심
2022.08.13.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방 안을 비췄다.

도영은 번쩍 눈을 떴다. 해가 완전히 뜨기까지는 한참이 남았지만 절로 잠에서 깨버렸다.


‘아. 전부 꿈이었나.’

도영은 어느새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꿈은 오랜만이군.’

사고 이후 종종 끔찍했던 사고와 관련된 꿈을 꿨다. 늘 같은 내용이지는 않았다. 어느 날은 사고 당시의 장면만이 나오고 어느 날은 대학생이 된 이후가 나오고.

그런데 오늘처럼 수술방에서 누워 있는 장면은 처음이다.

하아, 한숨을 길게 내쉬던 도영은 오른팔에 퍼지는 아릿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 통증은 경련이 시작할 때의 느낌이다. 사고와 관련된 꿈을 꾸고 나면 여지없이 통증이 찾아온다.


‘갑자기 왜.’

꿈도 그렇고 통증도 그렇고 혜수를 만나고서부터 한동안 괜찮았었는데, 또 왜.


‘어머니를 봬서 그런가.’

지팡이 없이는 걷지 못하는 은숙의 다리를 볼 때마다 도영은 깊은 죄책감을 느껴왔다.

저만 아니었다면 은숙은 제대로 수술을 받았을 테고 다리도 멀쩡했을 거다. 촉망받던 배우의 이른 은퇴도 없었겠지. 그러니 조금 전 꿈도 그 죄책감이 원인이리라.


‘제길.’

도영은 입에 약을 털어 넣은 뒤 비틀비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문득 병원에서 당직을 서고 있을 혜수가 그립다.


‘보고 싶어.’

어차피 월요일이 되면 만나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통증이 잦아들면 오후에라도 병원에 가봐야겠다 마음먹었다.


‘정말 보고 싶다.’

강한 진통제 여러 종류를 한 번에 삼켰더니 약 기운이 전신에 퍼지는 게 느껴진다.

천장이 빙빙 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볼록 튀어나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몽롱한 머릿속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를 차지하던 것은 혜수.

그렇게 도영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 시각, 당직 인계를 한 승원은 옷을 갈아입고 병원 바깥으로 나왔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끼이익 하고 차가 서는 소리가 난폭하게 들린다. 잠시 뒤, 탁탁 험한 발소리가 나더니 승원의 앞에 길게 그림자가 늘어졌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보니 승원의 모친 지선이 사나운 눈초리를 하고 승원을 노려보고 있다.


“오랜만이구나.”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어머니.”

“하, 어머니?”

지선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나불대는구나. 네가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날 안 볼 줄 알았니?”

“그러게요. 이제 직접 뵈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지선이 이를 빠득 악물면서 소리쳤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변호사에게서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전 더 이상 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 생활.”

“닥쳐! 누구 마음대로!”

지선이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승원에게 던졌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종이들에는 언뜻 가정법원, 조정 등의 단어들이 보였다.

승원은 허리를 굽혀 서류들을 주웠다. 한 장씩 반듯하게 정리하여 지선에게 다시 내밀었다.


“돈이 걱정이신 겁니까? 소송에 들어갈 비용은 제가 모두 낼 겁니다. 혹시 또 다른 비용이 발생한다면 제게 청구하세요. 앞으로의 생활비 또한 제안 드렸던 액수만큼 매달 이체를…….”

철썩.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승원의 턱이 휙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배은망덕한 것! 그동안의 은혜도 모르고!”

“……은혜요?”

다시 지선을 바라본 승원의 눈이 점점 붉어져 갔다. 타격이 가해진 왼쪽 볼도 붉게 부풀어 올랐다.


“그래, 은혜! 널 먹여주고 입혀주고 지금껏 키워준 은혜!”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는 보상을 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보상?”

지선이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질렀다.


“너 때문에 내가 견뎌온 세월이 얼만데! 내가 널 보면서 얼마나 치욕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

“내 인생을 보상하려면 그까짓 생활비로는 턱도 없어! 난 그 푼돈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은 돈인가.

물론 지선이 제게서 받아낼 수 있는 것도, 승원이 줄 수 있는 것도 돈밖에 없기는 하다. 승원은 서글픈 마음을 꾹 눌러 삼켰다.


“……그 인생이 정말 제 탓인가요?”

“그래. 모두 네 탓이야, 네 탓! 내 앞에 나타난 네 탓!”

“…….”

지선의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넌 절대로 몰라. 내가 널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 너 때문에 그 집안에서 어떤 모욕을 받아왔는지! 그걸 난 보상 받아야겠어!”

승원이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렸다.


“이상하네요. 절 선택한 것도 그 인생을 선택한 것도 모두 어머니 아닙니까. 이제 와서 그 모든 선택을 부정하시는 건가요.”

“무슨 소리! 난 널 선택한 적이 없어. 모든 건 한제형, 그이의 결정이었어! 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을 뿐이었어!”

승원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잊으셨습니까? 제겐 더욱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당시 전 고작 선택당하는 입장이었을 뿐이니까요.”

“…….”

“어머니. 아니, 당신이 그 집안에서 받은 대우 또한 저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분노를 제게 투사하지 마세요.”

“…….”

지선은 이번에는 말을 받아치지 않고 승원을 쏘아보기만 했고 승원도 지선을 곧게 쳐다보았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단 한 톨의 애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원망과 슬픔만이 있을 뿐.

결국 승원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한숨을 크게 내쉰 뒤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지치고 피곤한, 꽉 잠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만합시다. 서로 힘들잖아요.”

“웃기지 마! 그만해도 내가 그만해!”

“이미 이리된 것을 더 이상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뭘 어쩌냐고? 내가 만족할 만한 보상을 네가 가져오면 돼!”

소리를 빽 지른 지선은 승원의 손에 들린 서류들을 잡아챘다. 몸을 휙 돌리고는 제 차로 걸어갔다.

씩씩대는 뒷모습을 보던 승원이 희미하게 말했다.


“제가 당신께 단 한순간이라도 가족인 적이 있었나요?”

지선이 멈칫한다. 서류를 쥔 손이 부들거린다.


“아니. 꿈도 크구나. 감히 그런 걸 바랬던 거니?”

그 대답과 함께 지선은 제 차에 올라탔다. 작년, 지선의 닦달에 못 이겨 승원이 구입해 준 외제차다.

부릉, 커다란 엔진 소리와 함께 지선의 차는 떠났다.
 

승원은 차 안에 올라탔다. 힘이 빠져버린 고개를 털썩 떨구었다.


‘이렇게 최악의 상황까지 오기는 싫었는데.’

그래도 어릴 적에는 지선과 제형이 세상의 전부인 적이 있었다. 보육원에서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못하고 지내던 승원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그들이니까.

지선과 함께 보육원을 나올 때 승원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그 세상은 조금도 단단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무너지고 흩어져 버렸고, 지금은 이렇게 진흙탕에 처박혔다.


‘어머니와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돼버렸지? 조금이나마 관심을 보여주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승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곳에 내 자리는 없었어. 처음부터.’

제형에게도 저는 대를 잇는 도구일 뿐이었으니까. 승원에게 주어지던 제형의 지원도 모두 남에게 이상한 가정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이제는 아니까.


‘하아…….’

괴로움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혜수가 보낸 메시지다.

-오빠, 퇴근해? 밤새 수술했다며. 수고했어, 푹 쉬어!

승원은 저도 모르게 아아, 작게 소리를 냈다.


‘역시 혜수 너구나.’

다시 내게 새로운 세상이 되어 준 소중한 아이, 혜수.

나의 유일한 온기, 사랑스러운 신혜수.

한참 메시지를 쳐다보던 승원은 저릿한 심장을 갈무리하고 내비게이션을 켰다. 원래 가려던 목적지를 변경하여 설정한 뒤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쾅쾅대는 소리에 도영은 잠에서 깼다. 밖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누군가 문을 사납게 두드려대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팔을 보니 다행히 경련은 멈춰 있다.

이런 적도 처음이다. 꿈을 꾸었는데도 경련이 악화되지 않고 절로 멈춘 것은.


‘신기하군. 이것도 혜수로 인한 안정감 때문인가.’

머리를 한 번 흔들어 남아 있는 어지러움을 떨쳐낸 도영은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한승원?”

괴로운 얼굴을 한 채 서 있는 사람은 승원이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표정을 또다시 짓고 있는 승원을 보며 도영은 승원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한승원. 무슨 일이지.”

물었지만 답은 안다. 아마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겠지. 승원이 이 정도로 괴로워하는 것은 늘 가족과의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도영은 아무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승원이 천천히 입을 뗀다.


“도영아. 네게 꼭 할 말이 있어.”

승원의 사정을 모두 알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도영이 유일하고 도영의 사정을 모두 아는 사람 또한 승원뿐이다. 그 사실은 승원과 도영 둘 다 잘 알고 있다.


“……들어와.”

비틀대며 걸어간 승원은 소파로 가 쓰러지듯 앉았다.


“무슨 일이지.”

“…….”

대답 없는 승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영은 주방으로 가 찻잔에 찻잎을 부었다.

곧 주방에는 향긋한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도영은 차를 들고 소파로 가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얼굴의 승원의 앞에 놓아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는 흥분한 신경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


“마셔.”

도영과 승원은 늘 이래왔다. 어릴 적부터 투닥거린 일이 있으면 누군가 먼저 다른 화젯거리로 말을 꺼내거나 음식을 건넸다.

그러면 둘은 언제 싸웠냐는 듯 음식을 나눠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이 화해의 시도임을 말하지 않아도 서로 잘 아는 탓이다.


“…….”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승원은 한참이 지나도 찻잔을 건드리기는커녕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바닥에 뭔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묵묵히 발끝만 보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우리는 화해할 수 없다는 걸 넌 아니, 라 묻는 것 같다.

고집스러운 그 모습에 하, 한숨을 내쉰 도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차 마시지 않을 거면 나가. 너와 내가 지금 이렇게 마주 보고 대화할 사이는 아니니까.”

“……부탁이 있어, 도영아.”

“무슨.”

“…….”

승원은 한참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혜수 말이야.”

갑자기 튀어나오는 혜수의 이름에 도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신 선생은 왜?”

“……도영아. 나한테는 혜수가 없으면 안 돼.”

“뭐라는 건지.”

“그러니 네가 물러나면 안 될까?”

“허, 지금 그따위 이야기를 하러 온 건가? 그 말을 하려고 문을 부서져라 두드렸어?”

“제발, 혜수를 더 흔들지 말아 줘.”

도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 말 하러 온 게 전부라면 헛수고했군. 난 너와 더 이상 할 말 없어. 나가.”

한 치의 가능성도 보여주지 않는 도영을 보며 승원은 절망감을 느꼈다.


“제발, 도영아. 내가 뭘 하면 될까. 무릎이라도 꿇을까?”

말을 마친 승원은 지체 없이 소파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갔다. 한 다리씩 무릎을 굽혀 바닥에 꿇어앉았다.


“뭐 하는 짓이야. 일어나.”

도영이 승원을 일으키려 했지만 승원은 도영의 팔을 뿌리쳤다.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혜수가 없는 미래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어. 네가 물러나 줘. 응?”

“…….”

“넌 다 가졌잖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널 좋아해 주는 약혼녀도 있고 무엇보다 널 사랑해 주는 엄마도 있잖아.”

승원은 도영의 엄마 은숙이 도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

도영이 잦은 수술과 통증으로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때, 은숙은 도영의 옆에서 그를 늘 지켜주었다. 도영이 밤새 아파할 때면 은숙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제가 대신 아파해줄 수 없음에 슬퍼했다.

그리고 비록 도영과의 사이가 틀어지기는 했지만, 아버지 기철도 어릴 적에는 도영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


“난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고 지금도 아무것도 없어. 그건 너도 알잖아, 응?”

“…….”

“그런 내게 와주고, 그런 날 웃게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혜수야.”

“하…….”

“도영아, 그 아인 내 인생의 전부야.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러니 나에게서 혜수를 빼앗지 말아 줘. 부탁이야.”

승원의 물기 젖은, 애처로운 말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하지만 도영은 미동도 없었다. 그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승원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그런 도영의 모습에 승원은 더욱 깊은 절망감을 느꼈고 떨리는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도영아, 제발. 너도 알잖아. 내가 지금까지 욕심낸 건 혜수가 유일하다는 것. 응?”

“얘기는 끝났나.”

“도영아.”

“할 말 끝났으면 나가지.”

“……주도영.”

승원의 목소리는 이제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도영아.”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지.”

“도영아!”

도영은 다시 한번 문을 가리켰다.


“내 얘기는 끝났어. 더는 할 이야기 없으니 이만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제발.”

“네가 나가지 않으면 내가 나가. 어쩔래?”

“…….”

결국 승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붉어진 눈으로 한동안 도영을 노려보던 승원은 비틀대며 거실을 걸어 나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뒷모습이 조금씩 멀어진다. 결국 승원은 완전히 사라졌고 철컥, 문이 닫혔다.

승원의 간절함으로 시끄럽던 집이 조용해졌다.


‘제길!’

도영은 거칠게 벽에 기대섰다. 이번에는 쾅, 하고 커다란 소리가 집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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