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키스해도 돼?
(54/110)
54. 키스해도 돼?
(54/110)
54. 키스해도 돼?
2022.08.06.
로비를 뛰쳐나온 혜수는 닥치는 대로 걸어갔다. 눈앞에 가장 먼저 보이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 있다 보니 지하주차장까지 다다랐다.
처음부터 이곳에 목적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지금은 어디든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었을 뿐.
주차장 벽에 기대 시큰거리는 콧등을 벅벅 문지르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 뛰어나온다.
“교수님?”
도영이다. 얼마나 급히 쫓아왔는지 빗어 올린 머리카락이 전부 흐트러져 있고 호흡이 거칠다.
“신혜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보는 사람들이 많던데 조유민 선생님과 계셔야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하는 혜수지만 눈은 온통 붉어져 있다. 눈물은 흐르지 않지만 도영이 보기에는 이미 눈물이 흘러내리고도 남았다.
“신혜수…….”
괴로운 표정의 도영은 혜수에게 성큼 다가가 혜수를 당겨 안았다.
“교수님!”
깜짝 놀란 혜수가 급히 도영의 팔을 떨쳐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도영이 더욱 강하게 혜수를 옥죈 탓에.
“놔주세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어둡고 구석진 곳이지만 도영의 체격이 워낙 눈에 뜨이니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누군가가 차를 빼러 올 수도 있다.
그럼 아까 그 카페에서 유민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참아낸 노력이 쓸모없게 된다.
“좀 놔줘요. 네?”
거듭되는 혜수의 부탁에 손의 힘이 빠진다. 하지만 손을 완전히 떼지는 않는다.
“할 말 있어.”
“전 없어요. 얼른 조유민…….”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자니 가슴이 시큰거린다. 시린 속을 꾹꾹 눌러 삼키고 겨우 다음 말을 이었다.
“조 선생님한테 다시 가셔야지요.”
“아니, 안 가. 내 말 좀 들어줘.”
“자꾸 이러실 거예요?”
“어.”
“…….”
도영도 쉽게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알겠어요, 그럼 제가 갈게요.”
손을 힘껏 뿌리치려 했으나 꿈쩍도 않는다.
“조금이면 돼. 응?”
“하아…….”
결국 혜수는 도영이 이끄는 대로 발을 옮겼다. 둘은 옆에 있던 계단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어두컴컴했고 지하실 특유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혜수는 벽에 기대 팔짱을 단단히 끼고 도영을 척, 올려다봤다.
“왜 데려왔어요?”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좋아요. 하실 말씀이 뭔데요? 하시고 얼른 가세요.”
“사과하지. 마음 풀어.”
“전에도 말했지만 교수님이 사과하실 게 뭐가 있어요.”
“……혜수야.”
“교수님이 원해서 약혼한 것도, 결혼 계획을 잡은 것도 아니잖아요?”
또 빈정이 섞인 말에 도영은 더욱 침음을 흘렸다.
“네 마음 아픈 걸 알아.”
혜수에게 도영의 손이 다가갔다. 혜수는 손을 들어 도영의 손을 완전히 뿌리쳤다.
“알면 저 좀 내버려 둬요. 제 마음이 정리되면 그때 다시 봐요, 우리.”
돌아서는 혜수를 도영이 다시 붙잡았다.
“가지 마.”
“지금은 고운 말이 안 나올 기분이라서 그래요.”
“날 욕해도 돼. 때려도 돼. 그러니 가지 마.”
“정말요?”
“그걸로 네 마음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곰곰이 생각하던 혜수는 자신 있게 말했다.
“후회하기 없기예요.”
“후회 안 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혜수는 주먹을 쥐고 도영의 어깨며 등을 콩콩 때렸다. 나 상처받았다고, 속상하다고 온몸으로 외쳤다.
살갗이 마찰하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울린다.
하지만 도영의 몸은 이 정도 힘에는 아무런 대미지를 입지 않는 것 같았다. 약간의 출렁임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심지어 몸이 단단하니 오히려 때리는 사람의 손만 아프다.
한참 손을 휘두르고 맥이 쭉 빠져버린 혜수는 팔을 툭 떨어트렸다.
“이게 뭐예요. 아무 소용 없잖아. 오히려 제 손만 아픈걸요.”
툴툴대는 혜수의 볼을 도영이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소용없지 않아. 난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제가 뭐라 그랬는데요?”
“솔직하게 말해?”
“네.”
“주도영 바보, 축구, 멍게, 말미잘.”
“흐읍.”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아차 싶어 다시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으나 늦었다. 도영의 눈빛은 이미 기회를 잡은 것을 아는 듯하다.
“칫. 마지막에 해삼이 빠졌잖아요.”
“아, 잊었군. 주도영 바보, 축구, 멍게, 말미잘, 해삼. 이젠 맞아?”
“……네.”
고개를 끄덕이며 픽, 웃으니 도영이 성큼 다가온다.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몸이 또 한 번 제게 힘을 실어 온다. 도영의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서늘한 지하실의 공기가 흩어진다.
이건 반칙이다. 마지막으로 날이 서 있던 마음까지 사르르 녹아내려 버리잖아.
“조유민 말은 잊어. 나는 절대 결혼하지 않아.”
“하지만 날짜를 잡는다고 하셨잖아요.”
“그 또한 연극이야. 선거를 위한 하나의 계획. 날짜를 잡았다는 기사만 나갈 거야. 날짜는 선거 이후이고 선거만 끝나면 틀림없이 파혼할 테니 걱정 마.”
“…….”
혜수가 대답 없이 안겨 있기만 하자 도영이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해. 조금 전에 결정된 거라.”
“…….”
“널 불안하게 하는 게 뭔지 알아.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날 믿고 기다려 줬으면 좋겠어.”
이번엔 작은 대답이 돌아온다.
“교수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그럼?”
“아깐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요. 제가 투정 부린 거예요.”
혜수는 손을 뻗어 도영의 오른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기다란 손가락이 혜수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얽어온다.
“왜 그렇게 화가 나던지. 교수님의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린애처럼 질투나 하고 말이에요.”
순간 도영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뭐라고?”
“네?”
“방금 뭐라 그랬지?”
“어린애요?”
“아니, 그다음.”
“지, 질투요?”
“맞아. 그거.”
“그게 왜요?”
“그거 정말 좋은 단어라는 걸 이제 알았어.”
도영은 환하게 웃었다. 비록 이 상황과는 맞지 않을지는 몰라도 지금 도영은 무척 기뻤다.
혜수가 유민에게 품은 감정이 ‘질투’라고 말을 해줘서. 질투라 함은 애정을 바탕으로 그 위에 생기는 감정이니까.
“아, 신혜수.”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도영이 혜수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덕분에 둘의 사이는 무척 가까워졌다.
이번에야말로 단 몇 미리만 움직이면 입술이 겹칠 것이다.
기대감에 쿵쿵, 심장이 떨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귀에서도 박동이 느껴진다. 맞대고 있는 도영의 몸에서도 거친 호흡이 느껴졌다.
“해도 돼?”
단어가 하나 빠졌지만 혜수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작게 끄덕이자 순식간에 도영의 입술이 들이닥쳤다.
말캉한 입술이 제 입술을 머금는다. 달콤한 늪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이렇게 감미로운 키스가 있다니. 도영의 집에 다녀온 날 꿈에서 꾸었던 거친 키스와는 다르게 한없이 부드러웠다.
따뜻하고 애정 어린 그 온기가 좋아서 혜수는 더욱 도영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그에 맞추어 도영도 더욱 혜수를 강하게 안아주었다.
도영은 혜수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끝날 것 같았던 키스는 또 새로운 키스로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 직전 도영이 혜수를 놔주었고 혜수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눈을 깜빡여 정신을 차려보니 보이는 것은 금방이라도 또 달려들 것 같은 도영의 얼굴이다.
혜수는 급히 한 손을 들어 제 입을 막고는 다른 손으로는 도영을 가슴팍을 밀어냈다.
“이, 이제 그만 하세요.”
“왜?”
“…….”
혜수가 우물쭈물하자 도영이 또 묻는다.
“왜 그래?”
“더 하다간 녹아서 없어질 것 같단 말이에요.”
“뭐?”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던 도영은 곧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혜수가 이번에는 도영의 입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조용히 해요. 밖에서 다 들리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도영은 다시 혜수를 품에 안았다.
시간이 꽤 흘렀다. 이러다 여기서 하루를 꼴딱 보내겠다.
“저 이제 가야 해요. 오더도 다시 봐야 하구요.”
도영의 손이 혜수의 등에서 스르르 떨어졌다. 손길엔 아쉬움이 가득하다.
“다음에 만나요.”
“또 여기서?”
“음…….”
“다음엔 우리 집으로 와.”
“……봐서요.”
“봐서?”
“네.”
도영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 말을 하면 내가 더 안달할지 아는 것 같군.”
묘하게 진득한 말에 혜수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그런 게 아니고요! 아무튼, 전 갈게요.”
밖으로 나가려는 혜수를 도영이 붙잡았다.
“잠깐만.”
“네?”
“내가 먼저 나가지. 누가 있을지도 모르니. 조금 있다가 나와.”
“네, 그럴게요.”
도영이 나가고 마음속으로 30을 센 혜수는 문으로 귀를 기울였다. 조용하다. 이만하면 되겠다 싶어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헉! 저 선생님이 여기 왜 있어?’
문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 3년 차 황재성과 도영이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재성은 차에 다녀온 듯 손에 차 키를 쥐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혜수가 문을 열고 나오는 걸 본 재성이 눈썹을 치켜뜬다.
“신혜수. 너 거기서 뭐해? 눈은 새빨개 가지고는.”
도영과 혜수를 번갈아 보던 재성이 알듯 말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삐딱하게 한다.
덜컥 겁이 났다.
‘큰일이다. 눈치챈 건가?’
혜수가 봐온 재성은 그리 입이 싼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혜수의 비밀을 확실히 지켜줄, 저와 돈독한 사이인 사람은 또 아니라 생각한다.
‘어떡하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재성이 다가와 혜수를 잡아챘다.
“교수님, 그럼 저흰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혜수를 데리고 주차장을 우다다 달려간다.
끌려가면서도 혼란스럽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왜 날 끌고 가?
멀어지는 도영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당혹이 한가득인데 차마 쫓아오지는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서야 재성은 혜수를 놔주었다. 인심 가득한 말투로 젠체한다.
“넌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주차장까지 끌려와서 혼나냐?”
“예?”
“내가 방금 너 구해준 거라고. 그 좁은 데서 얼마나 무서웠니. 불쌍한 것.”
아무래도 재성은 혜수가 도영에게 또 혼이 나고 나온 거라 생각한 듯했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나 보다.
“괘, 괜찮아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혼나긴 했는데 참을 수 있어요. 그럼 전 이제 가볼게요.”
말을 더듬으며 도망치듯 뛰어가는 혜수의 등 뒤로 재성의 갸름한 눈초리가 따라붙었다.
***
모처럼 오프인 토요일 오전, 도영은 L백화점으로 갔다.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으니 검은 세단이 도착한다. 곧 어머니 은숙이 지팡이를 짚고 내렸다.
“어머니.”
“도영아, 언제 왔어? 일찍 왔네.”
“조금 전에 왔습니다. 예상보다 차가 막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늘 그랬듯 빈말이라고는 모르고 무뚝뚝하게 사실만 대답하는 도영이다. 은숙은 하하, 가볍게 웃으며 도영의 팔짱을 꼈다.
“오랜만에 아들이랑 외출하니까 좋다. 너도 그렇니?”
몇 주 전부터 도영에게 연락을 해 겨우 받아 낸 토요일 약속이다. 오늘 은숙은 도영에게 목걸이를 하나 골라 달라 할 참이었다.
“왜 답이 없어?”
“…….”
“응?”
이번에는 들릴락 말락 하게 네, 라고 들려온다. 은숙은 또 쿡, 웃고 말았다.
둘은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명품관이 늘어서 있는 층으로 가니 화려한 간판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은숙이 멈춘 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아몬드 브랜드의 숍이었다.
“목걸이 좀 보려는데, 괜찮니?”
“네.”
은숙과 도영이 안으로 들어가자 점원들이 벌떡 일어나 아는 체를 한다.
“오셨어요, 사모님.”
“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사모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이에요.”
“뭘요.”
“오늘은 아드님이랑 오셨나 봐요.”
매니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도영에게도 말을 붙였다.
“교수님, 뉴스에서 많이 뵀어요. 곧 결혼하신다면서요. 축하드려요.”
“…….”
도영은 대답 없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아하하하…….”
서늘해지는 도영의 시선을 보며 매니저는 급히 은숙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사, 사모님, 오늘은 어떤 제품을 보여드릴까요?”
“목걸이를 좀 보러 왔어요. 다이아몬드가 메인인 걸로 보여주세요.”
“네, 사모님.”
매니저가 진열되어 있던 목걸이를 종류별로 꺼내기 시작했고 은숙은 도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도영아, 목걸이 좀 골라줄래?”
“그러죠.”
곧 매니저가 여러 디자인의 목걸이들을 가져왔다. 까만 벨벳 천 위에 놓인 커다란 다이아몬드 들은 그 자체로도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은숙은 하나씩 짚기 시작했다.
“이건 어떠니?”
“괜찮습니다.”
“그럼 이건?”
“괜찮습니다.”
“이번 것은?”
“괜찮네요.”
“이거는?”
“괜찮습니다.”
“이거…….”
“괜찮네요.”
“이…….”
“괜찮습니다.”
“ㅇ…….”
“괜찮습니다.”
몇 번 더 괜찮다는 대답이 이어지고. 결국 은숙이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도영아! 다 괜찮으면 어떡하니!”
“다 괜찮은 걸 어떡합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도영을 보고 은숙은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어휴, 그중에 골라달라니까. 응?”
“제 눈에는 다 똑같아 보입니다만.”
“너 정말!”
좀처럼 협조를 해주지 않는 도영을 보며 속이 터지려 하던 중, 도영이 한 디자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뚫어지게 진열대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다.
“도영아, 뭐해?”
“이걸 보고 있었습니다.”
도영은 기다란 검지로 한 목걸이를 가리켰다. 가운데 박힌 보석만이 돋보이는, 깔끔한 솔리테어 디자인의 목걸이였다.
여태 목걸이에는 티끌만 한 관심도 보이지 않던 도영이 한 디자인을 찍어내자 은숙이 고개를 갸웃한다.
“이건 왜?”
“주문하려고 합니다.”
“이 목걸이? 이거 골라주는 거야?”
“아니요. 별개로 제가 주문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