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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약혼 다음은 결혼 (53/110)


53. 약혼 다음은 결혼
2022.08.03.



 
도영에 대한 부러움이 반, 시기와 질투가 반인 대화에는 욕이 빠지지 않았다. 이제 도영의 팔은 경직되는 단계를 넘어 떨리기 시작했다.


“읏…….”

도영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참다못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안 돼!’

혜수는 도영을 더욱 굳게 잡아주었다. 진심을 다해 제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저런 말은 무시해요. 교수님은 멋진 사람이니까요.’

잠시 뒤,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졌고 혜수의 바람 덕인지 팔의 경련도 더 악화되지는 않았다.


“사람들 다 갔나 봐요. 제가 더 주물러드릴게요.”

“으읏…….”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경련이 완전히 멎었다.


“아, 멈췄어요. 다행이에요. 교수님, 괜찮…….”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도영을 올려다보는 순간. 도영이 혜수를 끌어당긴다.


“!”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몸이 완전히 도영에게 안겨져 있다. 품 속에서 바르작거리자 도영이 더욱 가까이 붙어온다.


“교수님, 노, 놀랬잖아요.”

“신혜수. 넌 정말…… 아.”

도영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혜수를 힘껏 안아왔다. 맞닿은 체온이 뜨겁다. 쿵쿵, 떨리는 도영의 심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혜수야, 혜수야, 속삭이던 도영은 혜수의 목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도영은 아무리 껴안아도 부족한 듯 혜수를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혜수가 자꾸 꼼지락대자 그제야 팔의 힘을 조금 풀어줄 뿐이다.

마침내 고개를 든 도영이 혜수의 귓가에 작게 키스한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아까 내 방에 오지 않은 이유는 뭐지?”

“아, 그건…… 조유민 선생님 때문에요.”

“조유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파혼할 거라고 얘기했잖아.”

“선거 전에는 그러면 안 되잖아요. 혹시나 저 때문에 조유민 선생님 측에서 파혼을 하자고 하면 어떡해요.”

“그럴 리가. 조병억 교수가 어떤 사람인데. 우리 아버지 못지않게 야심 찬 사람이지. 쉽게 파혼할 리가 없어.”

이 말에서 혜수는 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깨달았다.

마냥 사이좋은 부자 관계는 아니구나. 서로를 아끼고 위해주는 우리 가족이랑은 다르구나.


“그래도 싫어요. 제가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

도영이 혜수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음성이 귓가에 흐른다.


“무엇을 신경 쓰는지 알겠군.”

혜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다. 도영의 약혼이 깨질까 두렵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이 혜수더러 뒷말을 하는 것도 싫을 것이다.


‘내 욕심에 너를 이런 곳으로 데려왔구나.’

도영이 혜수의 눈가를 가만히 쓸었다. 간지러움에 혜수의 볼이 움찔 떨린다.


 


“미안해. 이런 상황을 만들어서.”

“괜찮아요. 몇 달 안 남았잖아요. 게다가 전 신경 좀 쓰여도 교수님이랑 이러고 있는 게 훨씬 기쁜걸요.”

유민과 도영의 약혼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소화도 안 되던 날들이 얼만큼인가. 자각하지도 못하던 감정으로 애달프던 날들에 비하면 도영의 마음을 확인한 요즘이 기껍다.


“그리고 이 팔. 팔 때문이라도 제가 교수님 옆에 있어야 하잖아요.”

“…….”

아아, 깊은숨을 내쉰 도영이 혜수를 더욱 당겨 안았다. 오른팔에 힘이 강하게 들어간다.


“교수님, 팔에 힘주시면 안 되잖아요.”

“이젠 하나도 아프지 않아. 완전히 멎었어.”

혜수와 있으면 통증이 씻은 듯 사라진다. 확신을 가진 도영은 혜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고 혜수도 도영을 마주 안아주었다.

***

한대 병원 로비의 카페.

혜수는 카페에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혜수가 좋아하는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모카 커피다. 오후에 한잔 마시는 모카 커피는 그날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혜수는 한 손으로는 빨대를 쪼록 빨며 다른 손으로는 뉴스를 살폈다.

오늘도 역시 도영과 유민의 약혼에 관한 기사가 빠지지 않고 올라와 있다. 사진 속 도영은 여전히 완벽하고 멋진 모습이다.


‘교수님이랑 대화한 지 한참 됐네.’

날짜를 세어보니 도영이 아프다고 숙소 앞까지 찾아온 날 이후 도영과 개인적인 만남은 가지지 못했다.

요즘 도영은 너무나도 바빴다. 수술도 외래도 한대 병원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시간이 날 때마다 유민과 함께 각 과 의국을 돌아다니며 노 교수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우리 약혼했다며, 이런 경사에 직접 대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이 큰 병원을 돌아다니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 거물들에게도 인사를 다녀야 했다. 그들과 만나는 장면이 찍힌 기사들이 심심찮게 올라왔다.

시장 당선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일종의 보여주기 인사였다. 덕분에 유민도 도영도 일하는 시간 외에는 의국에 붙어 있을 틈이 없어 보였다.

약혼 가지고 뭐 그리 유난이냐는 의견이 드물게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병원장 딸과 차기 서울 시장의 아들이 약혼을 했다는데 그럴 수도 있지, 오히려 화제의 커플을 만나게 되어서 영광이다, 란 반응이었다.


‘이런 사진 말고 교수님 실물을 보고 싶다. 과가 바뀌니 더 보기 힘들잖아.’

한숨을 폭폭 내쉬던 혜수는 그냥 인터넷 창을 꺼버렸다.


‘커피나 마시자. 마시고 힘내서 일하자.’

씩씩하게 빨대를 쭉쭉 빨고 있는데 앞의 의자가 들썩인다.


“한 교수님?”

“혼자 있네?”

“네, 잠깐 쉬러 왔어요.”

“나도. 앉아도 되지?”

“네, 그럼요.”

“뭐 마셔?”

“아이스 모카요.”

“휘핑은 잔뜩?”

“하하, 맞아요.”

저의 취향을 낱낱이 꿰고 있는 승원이라 혜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케이크도 사 올까? 초코 케이크?”

“네, 좋아요!”

승원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간식을 먹고 있는데 옆에 있던 의자가 덜컹 들리더니 또 누군가 앉는다.


“신 선생, 한 교수. 이야, 여기서 다 만나네.”

능청스럽게 말하는 사람은 도영이다. 외출을 하고 들어오던 참인지 사복 차림이다.

도영의 등장에 승원의 미간에 작게 금이 갔다. 혜수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이 인간은 갑자기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주 교수. 웬일이야?”

“자리도 비는데 같이 앉지.”

“싫다면.”

“그렇게 티 나게 거부할 것까진 없지 않나, 승원아.”

다정한 도영의 말투에 승원은 하, 코웃음을 쳤다.


“주도영. 약혼녀는 어디 가고 왜 너 혼자 여기 있어. 넌 네 약혼녀랑 있어야지.”

“……한 교수가 내 일을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 줄 미처 몰랐군. 이것 차암 고맙네?”

“내 친한 친구에게 생긴 약혼녀잖아. 그렇지, 신 선생?”

갑자기 방향을 튼 화살에 혜수는 떠듬떠듬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 네.”

그런데, 대각선에 있던 의자에 또 누가 앉는다. 생긋 웃으며 의자를 당기는 사람은 조유민이다.

오늘 무슨 날인가. 왜 여기에 온 병원 사람들이 다 모이는 거람.


“혜수야, 안녕.”

혜수에게 인사를 한 유민이 도영을 보며 예쁘게 웃는다.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쿠키 세트를 들고 있다.


“교수님, 저도 같이 앉을래요.”

그러더니 의자를 더욱 바짝 당겨 앉는다.


“그래도 되죠, 한 교수님?”

“그럼.”

승원에겐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유민이 없던 상황에 비해 지금이 반갑다. 도영이 약혼녀와 다정한 모습을 보일수록 혜수는 도영에게서 멀어질 테니까.

그렇게 넷의 기묘한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유민과 도영이 나란히 앉아 있으니 로비를 지나다니던 환자들이 수군대기 시작한다. 소문으로만 듣던 커플이 눈앞에 나타난 탓이다.


“저 둘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실물이 훨씬 낫다.”

“연예인 커플인 줄.”

찰칵, 사진을 찍는 소리도 들려왔다.


“교수님, 맛있게 드세요.”

유민이 도영의 컵 밑에 홀더를 받쳐준다.


“이야, 약혼녀가 도영이 챙겨주는 것 좀 봐.”

승원의 장난 어린 말에 유민은 수줍게 미소지었다.


“교수님, 놀리지 마세요.”

그 후에도 유민은 도영을 살뜰히 챙겼다. 쿠키를 놓아주고, 냅킨을 챙겨주고, 물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잔을 채워주고, 물티슈로 주위를 정리해 주고.

도영은 시종일관 싸늘한 표정과 자세로 묵묵부답이었지만 도영을 보는 유민의 눈에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유민을 보면 틀림없이 사랑에 빠진 약혼녀라 생각할 정도였고 실제로 반응도 그랬다.


“예쁜 커플이네.”

“정말 잘 어울린다.”

반면에 혜수의 손은 점점 느려졌다. 귀와 눈을 닫고 눈앞의 음식에만 집중하려 해도 쉽지가 않다.


“신 선생. 왜 이렇게 안 먹어.”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으니 승원이 이것저것 먹으라 챙겨주었지만 음식이 넘어가지를 않는다.

오늘따라 커피가 왜 이리 쓰고 느끼하기만 하담. 진짜 맛없어.

꾸역꾸역 반쯤 먹었을 때 승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심각한 얼굴로 전화를 받던 승원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신 선생, 미안. ICU(중환자실)에 가봐야겠어.”

“아,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승원도 없는데 도영과 유민 사이에 껴서 무슨 좋은 꼴을 보겠는가. 혜수도 가버리려 했다.

그런데, 유민이 덥석 혜수를 잡는다.


“잠시만, 신 선생. 나 물어볼 게 있어.”

“네?”

“잠시만 시간 내줘, 응?”

“어…….”

“잠시만, 정말 조금이면 돼.”

간절한 부탁에 혜수는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차라리 빨리 대답해 주고 가버리자.


“뭔데요?”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한 교수님과 무슨 사이야? 둘이 같이 있는 걸 자주 보네.”

“예에? 저희 아무 사이 아니에요. 봉사 활동하다가 좀 친해진 게 다예요.”

“그런 거야? 난 또.”

유민이 방긋 웃는다.


“한 교수님이랑 너랑 잘 어울려서. 혹시나 사귀는 사이가…….”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혜수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여기에 더해 사실 우리는 가족이다, 한 교수님은 사촌 오빠일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선생님 옆에 앉은 주도영 교수님이다, 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지금 이곳에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다. 주위 사람들이 이 테이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그렇구나. 그래도 남녀 사이는 모르는 것 아니겠어? 이렇게 만나다 보면 잘 될지 어떻게 알아.”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에이, 어떻게 확신해. 나도 어릴 때는 교수님이랑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 늘 멀리서 우러러보던 사람인데.”

유민은 변함없는 잔잔한 억양으로 말을 이었지만 단어 하나가 혜수의 귀를 잡아챘다.


“결혼…… 이요?”

“응, 결혼.”

그 말에 도영이 쥐고 있던 컵을 탁 놓으며 유민을 노려본다.


“그쯤 하지.”

하지만 유민은 아랑곳 않는다.


“약혼했으니 이제 결혼해야지. 그게 순서잖아.”

상냥하지만 커다란 목소리는 주위로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덕분에 사람들이 또 소곤댄다.


“들었어? 결혼한대.”

“그럼, 안 할 줄 알았냐. 약혼하면 결혼도 하겠지.”

머리가 멍하다.


‘결혼? 파혼이 아니라 결혼?’

“아버님이 올해 안에는 결혼식을 올리기를 원하셔서.”

“!”

올해 안에 결혼식이라니, 갈수록 가관이지 않는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한다.

이 또한 보여주기일 것이다, 진정하자 마음먹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생채기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마음이다. 거기에 소금을 뿌려댄 탓에 더욱 쓰라리다.

손톱이 하얗게 되도록 꾹꾹 눌러대던 혜수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전 먼저 가볼게요.”

“왜? 조금 더 있다가 가. 응?”

유민이 다정한 목소리로 청해온다.


“아니요. 급한 일이 생겨서.”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 거람. 무슨 좋은 이야기를 듣겠다고 꾸역꾸역 앉아 있었담, 바보같이.

달려가는 혜수를 도영이 부른다.


“신 선생, 잠깐만!”

도영의 외침에 이번엔 멀리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까지 여기로 모였다.


“저 사람, 그 사람이다. 주도영.”

“맞네. 옆에는 약혼녀네. 저들을 실물로 보게 될 줄이야.”

금방이라도 혜수를 뒤따라 나가려는 도영의 손을 유민이 잡아챈다.


“어디 가세요?”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앉으세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요.”

“하! 쇼는 집어치워. 그러지 않아도 우리 약혼한 것 모르는 사람들 없으니까.”

사납게 으르렁거린 도영은 제 손위에 붙어 있는 유민의 손을 뿌리쳤다. 혜수가 지나갔던 길을 그대로 쫓아갔고 테이블엔 유민 혼자 남게 되었다.


“후…….”

유민은 우아한 손짓으로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바싹 마른 입안이 축여지니 좀 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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