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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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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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
2022.07.30.
연구팀의 회의가 있는 저녁이었다. 혜수는 일찍 병동 일을 정리하고 의국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교수님 방에 갈 수 있을까?’
지난번 연구팀 회의 날 도영의 방에서 달콤한 시간들을 보냈었다. 비록 재성의 훼방으로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많이 행복했다.
‘승원 오빠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는데.’
이제는 도영이 제게 갖는 마음에 대해 확신이 생겼다. 지금이라면 모든 걸 털어놓아도 도영은 그랬냐, 네가 거짓말한 것을 이해한다 할 것 같았다.
‘다 떠나서 그냥 보고 싶어.’
도영을 떠올리니 얼굴이 절로 붉어진다. 더운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의국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복도에서 경애와 유민, 또 다른 2년 차 레지던트 이렇게 셋이 모여 웃고 떠들고 있다. 저들은 평소에도 유민과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데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혜수는 발을 멈췄다.
“신 선생, 신 선생, 혜수야!”
“네?”
돌아보니 유민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 부르셨어요?”
“응, 잠시만.”
혜수에게 다가온 유민은 주머니에서 뭘 하나 꺼내 슥 내밀었다.
“이거. 네 거지?”
유민의 손바닥 위에 올라간 것은 검은 머리끈이었다. 혜수가 평소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다닐 때 쓰는, 흔해 빠진 검은 고무줄. 대용량으로 봉지째 사다 놓고 막 쓰는 제품이었다.
“어, 네.”
혜수는 머리끈을 받아들였다. 신혜수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지는 않았지만 제가 쓰는 것과 같은 제품이 맞았고 고무줄에 감겨 있는 한 올의 머리카락 색깔도 제 머리 색깔과 비슷했기에.
혜수의 손으로 넘어간 고무줄을 보며 유민이 작게 웃는다.
“주 교수님 방에 갔었구나?”
“네?”
혜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영의 방에 가기는 했다. 바로 지난번 연구팀 회의가 있던 날 밤 말이다.
그날을 생각하며 조금 전까지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그게 이 머리끈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이거 주 교수님 방 소파 사이에 끼워져 있더라.”
혜수의 눈이 더 커다래지고 유민은 계속해서 말했다.
“왜 거기, 그러니까 우리 교수님 방 소파에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네 것 같아서 돌려주려고 가져왔어.”
우리 교수님이라는 단어에 힘이 살짝 들어간다. 그러자 옆에 있던 경애가 불쑥 끼어들며 목청을 높인다.
“너 교수님 방에 들어간 거야? 약혼녀도 있는 사람인데 그런 행동은 안 하는 게 상식 아니야? 교수님이랑 할 말이 있으면 병동에서 하든가 아니면 밖에서 하든가. 뭐 하러 방까지 따라 들어가?”
다른 2년 차 레지던트도 거든다.
“그래, 그 방에 단둘이 있는 건 아닌 것 같네. 네가 그러면 유민이가 속상하지. 조심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대답을 잘못했어.’
머리끈을 움켜쥔 손에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확실하지도 않은데 이걸 내 것이라 말을 하면 안 됐는데.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돌이킬 수가 없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해봤자 거짓말을 한다며 몰아갈 것이다. 적절한 단어를 찾으려 고민하던 중, 갑자기 앞에 그림자가 생긴다. 유민이 혜수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그러지 마. 교수님 방에 레지던트가 가는 걸 뭐라고 하면 어떡해. 일은 해야지.”
혜수를 대변하는 유민을 보며 경애가 가슴을 팡팡 쳤다.
“어우, 넌 그렇게 착해빠져서 어떡할래?”
“난 정말 상관없어. 진짜야.”
“네가 그렇게 나오니까 날파리들이 꼬이는 거 아니야!”
‘날파리? 지금 나더러 날파리라는 거야?’
혜수가 발끈하며 나서려는 그때, 유민이 먼저 나서며 경애와 2년 차의 팔에 팔짱을 꼈다.
“에이, 그러지 마, 언니. 날파리라니. 너무하잖아?”
그러더니 혜수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미안해 혜수야. 내가 오해할 만한 말을 했네. 신경 쓰지 마, 알았지? 난 절대 그런 뜻 아니었어. 난 네 머리끈을 찾아주려고 한 거야.”
“…….”
“가자, 경애 언니. 카페 가자며. 빨리 갔다가 병동 가야 해.”
유민은 경애를 끌고 혜수를 지나갔다. 그들이 일으킨 바람이 혜수의 옷자락을 서늘하게 흔들었다.
회의실에는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도영과 다른 연구팀원들의 자리를 마련해 놓은 혜수는 제 의자에 앉았다.
유민에게서 받은 머리끈을 자세히 살펴보는데 무언가 찜찜하다.
‘이게 정말 내 것이 맞나?’
방금 있었던 일은 왠지 잘 짜인 각본 같다.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최근에는 머리끈을 새로 꺼내지 않고 지금 착용하고 있는 것을 계속 쓰고 있다.
그럼 이건 어디서 난 거지? 몇 달 전에 내가 흘린 건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입구가 소란스럽다. 혜수와 같은 연구팀원인 임상교수와 펠로우가 시끄럽게 대화하며 들어온다.
“교수님도 들으셨죠? 주 교수님 방에서 엄청 큰 소리 나더라고요. 누구랑 싸우나 봐요.”
“어, 나도 들었어. 얼핏 들리기로는 선거 이야기 같았는데.”
“아무래도 신경 쓰이겠지요. 아버지 서울 시장 선거가 몇 달 안 남았잖아요.”
“그렇지. 약혼을 이번에 한 것도 선거 때문이 아니겠어?”
“아무튼, 주 교수님 심기가 지금 많이 안 좋아 보이니 조심해야겠어요.”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 혜수에게도 툭 말한다.
“들었지? 오늘 주 교수님 매우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신다. 알아서 기어라.”
“아, 네.”
혜수는 그러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도영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눴길래 저런 건지, 살벌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펠로우와 임상교수가 긴장하며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회의는 금방 끝났다.
지금까지 해왔던 회의와는 달리 도영은 오늘은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하긴, 논문 작성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도영이 전체적인 내용을 체크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다만 도영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딱딱해지고 날카로워져 모두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입니다.”
회의 자료를 모으고 주변을 정리하는데 도영이 혜수를 부른다. 여전히 서늘한 목소리다.
“신 선생, 잠깐 나 좀 봐.”
그 말을 남기고 도영은 회의실을 휙 나가버렸다. 무엇 때문이냐 물어볼 틈도 없이 번개 같은 속도였다.
“너 또 뭘 잘못했냐?”
“시키는 거 제때 안 했어? 빨리 따라가. 어째 회의 때마다 혼나냐.”
임상교수와 펠로우가 안됐다는 표정으로 혜수를 쳐다본다.
“네에. 컴퓨터 정리만 하고 갈게요.”
혼자 남은 혜수는 회의실을 마저 정리했다. 손은 책상을 치우는데 머릿속은 온통 딴생각이다.
‘어쩔까.’
잠시 뒤, 회의실을 나간 혜수는 도영의 방문을 바라보며 한동안 서 있었다.
‘……하아.’
고민 끝에 도영의 방을 지나쳐 의국을 나와버렸다.
‘그래, 지금은 가지 말자.’
할 일도 다 했고 혼날 만한 일도 없다. 지금 도영이 저를 부르는 것은 지난번처럼 보고 싶다는 이유일 것이다.
‘약혼녀도 있는 사람인데 그런 행동은 안 하는 게 상식 아니야?’
경애의 앙칼진 목소리가 자꾸 떠오른다.
아무리 허울뿐인 약혼 관계라고 해도 지금 도영에게는 번듯한 약혼녀가 있다.
다른 레지던트들이 조심하라고 한 것처럼 선거가 끝날 때까지는 제 행동을 조심하는 게 맞다. 이러다 저 때문에 약혼이 선거 전에 깨지기라도 하면 어쩌냔 말이다.
게다가 도영과 붙어 있는 것을 누군가가 본다면 또 저에게 들려올 비난의 말들이 두렵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남들의 입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이 반가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좋지 않은 주제라면 더더욱.
숙소로 가는 구름다리를 건너며 혜수는 도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교수님, 저 그냥 숙소에 왔어요. 병원에서는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그러자 대번에 답장이 온다.
-뭘 조심해?
잠깐 고민하던 혜수는 답장을 적어 내렸다.
-조유민 선생님요. 아무래도 교수님께는 지금 약혼녀가 있으시니까요.
전송 버튼을 누른 혜수는 숙소로 들어가 침대에 털썩 누웠다. 눕자마자 휴대폰이 진동한다. 도영이 보낸 답장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직접 전화가 왔다.
“교수님?”
-나와. 앞이야.
“네?”
-숙소 앞이라고. 잠깐만 나와. 급해.
“아…….”
망설이던 혜수는 긍정의 대답을 했다. 도영이 여기까지 와서 급하다는 것은 중요한 무언가가 있단 뜻일 것이다.
“네. 나갈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혜수는 방을 나가 복도를 뛰어갔다. 자꾸 콩콩 튀어 오르는 가슴을 억눌렀다. 도영의 방에 가는 것을 거절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마주하는 게 설레는 건 어떻게 해도 막을 수가 없다.
혜수는 금세 문 앞에 다다랐다. 문을 열기 전에 주위에 다른 사람은 없는지 확인을 했다.
‘다행히야, 아무도 없어.’
밖으로 나가니 도영이 벽에 기대 서 있다.
“교수님, 어쩐 일이세요?”
혜수를 본 도영이 성큼 다가와 오른팔을 쑥 내민다.
“?”
무슨 의미인가 싶어 도영을 보며 눈을 깜빡이니 신음을 흘리며 손을 흔든다.
아, 잡아 달라고. 하지만 누가 보면…….
혜수가 주위를 둘러보며 망설이니 도영의 미간에 더욱 금이 간다. 신음도 더 커졌다.
“아파. 어서.”
빨개진 얼굴도 그렇고 이번에는 연기가 꽤 리얼하다. 혜수는 눈을 흘겼다.
“거짓말 자꾸 하실래요?”
“이번엔 진짜.”
“거짓……!”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도영의 팔 근육이 잘게 수축하고 있다. 혜수는 비명을 삼키며 도영의 오른손을 잡았다.
“어떡해! 죄송해요. 오해했어요. 약은 드셨어요?”
“조금 전에. 회의 끝나고.”
아, 교수님이 회의를 서둘러 끝낸 이유가 이거였구나. 회의 전에 한 전화 때문에 단순히 기분이 안 좋아 그렇구나, 생각했는데 아팠던 것일 줄이야.
“이렇게 아프신 줄 알았으면 방에 갈 걸 그랬어요.”
“양치기 소년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하겠어.”
“푸핫.”
혜수가 도영의 손을 잡고 조물조물 문지르고, 쓰다듬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도영의 표정이 편안해져 간다.
“지금은 좀 어떠세요?”
“좋아졌어. 훨씬.”
실제로 육안으로 보이던 근육의 떨림도 멈췄다.
“신기하네요. 제가 손을 잡아 드리면 경련이 멈춘다는 게.”
같은 현상이 반복되자 이젠 가정이 아닌 사실처럼 느껴진다.
‘정말 내 덕분인가 봐.’
“나도 신기해. 저번엔 설마 했었는데.”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도 이래요?”
“그럴 리가. 이런 적은 처음이야.”
실제로 혜수가 손을 잡아주고 경련이 멎은 다음 날 아침. 또 경련이 시작되려 할 때 재성을 만났다. 도영은 혹시나 하여 재성의 손을 잡아보았다.
하지만 그때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내 손을 다른 이가 만진다는 것에 대한 불쾌함만 생길 뿐. 그길로 도영은 화장실로 가 소독제로 손을 빡빡 씻었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러지?”
“내 생각에는…….”
그때, 연구동과 이어지는 복도에서 발소리가 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온다!’
혜수는 도영의 손을 잡은 채로 냅다 몸을 돌렸다. 지금은 경련 때문에 손을 뺄 수가 없으니 몸을 숨겨야겠다.
“빨리 이리로요, 교수님!”
어리둥절한 표정의 도영을 이끌고 청소 용품을 보관하는 창고에 들어가 문을 콱 닫았다. 어두운 창고는 둘의 몸을 숨기기에는 무척 비좁았지만 바짝 붙어 있으니 있을 만은 했다.
마침 연구동에서 나오던 사람들이 우르르 창고 앞을 스쳐 지나가 혜수는 더욱 바짝 움츠리고 속삭였다.
“교수님, 불편해도 이렇게 잠시만 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대화 소리가 안까지 다 들려왔다.
“에이씨, 더러운 세상.”
“너도 주도영 짜증 나지?”
주제는 어이없게도 도영이었다. 요즘 병원 사람들의 단골 이슈이기는 하다.
도영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혜수는 흠칫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욕이 난무하는 그들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을 수밖에 없는 도영의 얼굴은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혜수가 잡고 있는 팔 또한 경직되기 시작한다.
“주도영 이제 날개를 달았네.”
“열 받게. 병원장 딸이 마누라라니.”
“병원장 딸이 다가 아니잖아. 들리는 말로는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된다던데.”
“그렇게 돼 봐. 눈에 뵈는 게 있겠어? 지금도 안하무인인 놈이 더 재수 없어지겠지.”
“부럽다. 아빠는 차기 서울 시장. 장인은 차기 보건복지부 장관. 논문은 썼다 하면 SCI. 나도 성격 드러워도 되니까 그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 에이, X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