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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엔 같이 있는 꼴 못 봐 (51/110)


51.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엔 같이 있는 꼴 못 봐
2022.07.27.



 
수술실 18번 방. 혜수와 3년 차 재성은 다음 수술 환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수술은 췌장암이 대장까지 전이된 케이스로 혜수가 있는 대장항문외과와 재성의 이식혈관외과가 합동으로 수술을 할 예정이었다.


“혜수야, 곧 들어올 환자 ICU(중환자실) 어레인지 했어?”

“네, 했어요.”

“오케이. 난 한 대 피우고 오마. 환자 들어오면 전화해. 참, 넌 응급실 가야 된댔지?”

“네.”

“그럼 인덕션(induction:마취유도)만 하고 응급실 내려가.”

“네, 선생님.”

벽에 달린 시계를 흘끗 본 재성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사탄 오기 전에 빨리 갔다 와야겠다. 니코틴조차 없으면 이번 수술 못 버틴다고!”

도영과의 수술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재성이었다. 요란하게 몸을 돌리던 재성은 등 뒤에 있던 수술 준비대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갖다 박았다.


“으악!”

부욱 소리와 함께 요란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혜수는 털썩 주저앉아 버린 재성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으으, 으아, 아파.”

꽤나 아팠는지 재성은 덩치에 맞지 않게 울먹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곰이 울부짖는 모습 같았다.


“어디가 아파요?”

“등, 등, 여기.”

두툼한 손가락이 등 한가운데를 가리킨다.


“제가 봐 드릴게요. 잠시만 계셔보세요.”

재성의 등을 살펴보니 날카로운 스테인리스 모서리에 찍혀 옷은 찢어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푹 찍힌 상처가 길게 생겨버렸다. 주위로는 피가 슬금슬금 흘러나온다.

상처를 찬찬히 살핀 혜수는 눈을 살풋 찌푸렸다. 상처가 깊은 것으로 보아 꽤 아프긴 했겠다. 눈물을 글썽이는 게 과한 행동은 아닌 것이다.


“선생님, 이 정도면 수처(suture:봉합) 해야겠는데요? 피가 많이 나요.”

“피? 피! 피라고?”

자신에게서 피가 나온다는 얘기를 들은 재성은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경악을 했다.


“네. 그런데 뭘 그렇게 놀라요.”

“내 몸에서 피가 난다잖아!”

“피야 닦으면 되죠. 설마 피 무서워하세요?”

“…….”

“헉, 진짜예요? 어떻게 의사가 피를 무서워해요?”

혜수의 물음에 재성이 작은 눈을 한껏 치켜뜬다.


“얘 봐라? 남의 피 만지는 거랑 내가 피 흘리는 거랑 같냐! 나도 남의 피는 괜찮거든!”

“어휴, 엄살은. 좀 계셔보세요. 제가 금방 꿰매드릴 테니.”

그러자 재성이 기겁을 하며 몸을 혜수에게서 멀리 뺀다.


“안 돼!”

“네? 뭐가 안 돼요?”

“나 빨리 안 나아도 되니까 그냥 스테리스트립(steri strip:피부 봉합용 테이프)으로 해줘.”

“예? 왜요?”

“바늘로 내 피부를 뚫는다는 거잖아. 그걸 어떻게 견뎌!”

“리도카인으로 마취해 드릴게요. 테이프 붙인다 해도 등 굽히면 금세 벌어질 거예요.”

“아니야, 혜수야. 내가 등 최대한 안 움직일게. 마취도 바늘로 찌르는 거잖아. 제네랄(general anesthesia:전신마취) 걸 것 아니면 그냥 테이프 붙여줘, 어?”

이 정도 상처에 전신마취를 운운하는 재성을 보며 혜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수처 안 해요? 아니면 스테이플러로 찍는 건 어때요?”

스테이플러란 소리에 재성이 또 기겁을 한다.


“안 돼! 절대 안 돼! 빨리 지혈하고 소독이나 해 줘.”

본인이 저리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혜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대신 가만히 계셔야 해요.”

혜수는 수납장을 뒤져 거즈와 소독솜을 찾아냈다.


“여깄네요. 이제 소독합니다.”

혜수는 장갑을 끼고 소독액이 묻은 솜을 하나 꺼내 상처에 갖다 댔다. 그러자 재성이 몸을 비틀며 오두방정을 떤다.


“으악, 따가워, 따가워! 아프다고!”

혜수는 퉁퉁한 등을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선생님, 좀 가만히 계세요! 자꾸 움직이니까 빗나가잖아요. 이러다 하루 종일 걸리겠네.”

“아프다고, 으아아악.”

요란한 소리에 복도에 있던 사람들도 다가와 수술실 안을 구경한다.


“신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황 선생님이 등을 다쳤어요. 제가 소독해 주던 참이에요.”

재성에게 다가온 간호사가 깊게 파인 상처를 보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에구, 상처가 크네요. 아프겠다. 조심 좀 하시지.”

“맞아요. 저 아파요, 진짜 아프다고요.”

재성은 몸을 배배 꼬며 신음을 흘렸다.


“선생님, 제발 좀 조용히 해요. 누가 보면 뼈라도 부러진 줄 알겠어요. 이러다 온 병원 사람 다 불러 모으겠네.”

혜수의 타박에 재성이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야. 나 진짜 아프단 말이야.”

“어휴.”

“원래 통증의 역치는 사람마다 다른 거 몰라? 난 이 정도도 정말 아프게 느껴진다고.”

“하아, 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제발 가만히만 좀 있어 주세요, 네?”

재성의 소란에 사람들이 점점 더 모여드는 와중, 소독을 끝낸 혜수는 봉합 테이프를 가져와 하나씩 상처에 붙여주었다.


“야, 살살 좀 해. 손이 왜 이렇게 거치니.”

“살살하고 있거든요!”

선생님이 가만 계시면 더 살살할 수 있을 거예요, 라고 툴툴대며 다음 테이프를 재성의 등에 갖다 대려는 그때.

수술실의 문이 열리며 또 한 명이 들어온다. 모여서 재성과 혜수를 보고 있는 사람보다는 머리 하나, 아니 두 개는 더 큰 사람. 도영이었다.

도영이 나타나자 재성과 혜수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마치 저 멀리 둥둥 떠 있는 섬으로 향하는 바닷길이 열린 것처럼. 덕분에 도영의 눈에 한 남자의 등에 달라붙어 맨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혜수가 정면으로 들어왔다.


‘신혜수? 저기서 뭐해?’

게다가 혜수 앞에서 수그리고 있는 사람은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황재성이다. 혜수와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하던 그놈 말이다.

그놈이 혜수에게 외친다.


“야, 에지 잘 맞춰라. 내 흉터의 정도는 네 손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마.”

“예이이, 걱정 마십쇼.”

혜수는 온 집중을 다 해 피부의 결 하나하나를 맞추고 있었다.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도영이 띄엄띄엄 입을 연다.


“쟤네……. 지금 여기서 뭐합니까?”

옆에 있던 간호사가 대답을 해주었다.


“교수님, 재성 선생님이 등이 찢어졌대요. 신 선생님이 그래서 치료를 해주고 계시는 거예요.”

“……그렇군요. 그런데 왜 하필 신 선생이 치료를 하는 겁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와보니까 두 분 이러고 계셨어요.”

“그렇습니까.”

도영은 입을 꾹 다물고 팔짱을 끼고는 혜수가 하는 치료를 보기 시작했다. 간호사는 신 선생님이 치료를 잘 하고 있는지 교수님이 체크하고 싶은가 보다, 하고 넘기려 했다.

그런데, 도영에게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뿌득거리는 게 이를 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조금 더 지나서는 도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섞인 검은 오라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간호사는 슬금슬금 옆으로 거리를 벌렸다. 옆에 붙어 있다가 또 괜한 지적이라도 받으면 큰일이니까. 도영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알아챈 다른 이들도 조금씩 뒤로 물러났고 나중에는 전부 수술방 밖으로 도망을 쳐 수술방 안에는 도영 혼자 남게 되었다.

잠시 뒤.


“다 했어요.”

치료를 마친 혜수는 재성의 등에 밴드를 팡팡 붙여주었다.


“야, 좀 살살 붙여!”

“살살 한 거거든요? 끝까지 엄살은.”

“뭐라고라?”

“으아, 드디어 끝!”

숙였던 고개를 들며 기지개를 켜는데 수술방 안이 휑하다. 분명 여러 사람의 목소리와 발소리가 들렸었는데 지금은 재성과 혜수 단둘만 남아 있다.


“아까 사람들이 꽤 왔다 갔다 한 것 같았는데요?”

“수술 준비하러 온 간호사들이겠지.”

“아.”

다들 제 할 일을 찾아갔나 보다 생각한 혜수는 소독 용품을 정리하고는 재성에게 손을 턱 내밀었다.


“또 왜?”

“치료비요. 잊으신 건 아니죠?”

“어우, 치사해. 그까짓 것 좀 해줬다고 뜯어 먹어야겠냐?”

“네. 당연하죠! 스킨 에지 맞추느라 눈이 빠질 뻔했다구요.”

“나 참. 그래, 뭘로 줘? 말해 봐.”

잠깐 고민하던 혜수는 밝게 외쳤다.


“저 로비 카페에서 파는 모카커피 마실래요. 휘핑 추가로요.”

“요구 한번 디테일하네. 알았다.”

고맙기는 했는지 재성은 툴툴대면서도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이번 수술 마지막이니까 끝나고 가자. 됐지?”

“오예! 네!”

혜수가 기뻐하며 환호성을 지르던 그때, 수술방 문밖에 서 있던 커다란 그림자가 하나가 조용히 사라졌다.
 

한대 병원 로비의 카페. 혜수와 재성은 주문한 커피와 케이크를 받아 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커피.”

재성은 커피만 먹기에는 심심하지 않냐며 케이크도 같이 사주었다.


“크, 선생님. 역시 배운 사람이에요. 존경스럽습니다.”

두 손을 마주 잡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혜수를 보며 재성은 뿌듯하게 말했다.


“내가 먹는 거에서는 누구에게도 안 뒤지지.”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오냐. 많이 먹고 열심히 환자 보거라.”

혜수는 달콤한 모카커피를 쪼록 마시며 바로 전 수술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선생님, 전 수술을 안 들어가서 그런데요.”

“어. 뭔데?”

“PPPD(유문부 보존 췌두부 십이지장 절제술) 할 때 말이에요. 맨 처음 잡는 혈관이…….”

그런데. 케이크에 포크를 가져간 재성이 크림이 있는 부분은 다 덜어내더니 휴지에 버리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혜수는 하려던 말도 잊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스톱, 스톱!”

“왜?”

“선생님 크림 안 드세요?”

“어. 느끼해.”

“그럼 버리지 마시고 저 주세요!”

“크림을 달라고?”

“네! 전 크림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는다구요.”

혜수는 재성이 덜어낸 크림을 제 접시에 받았다. 제 케이크 위에 그 크림을 산처럼 얹는 혜수를 보며 재성이 입을 떡 벌린다.


“그렇게 먹으려고?”

“네. 크림 없이 케이크를 무슨 맛으로 먹어요?”

“달달한 빵 맛으로 먹는데? 그리고 난 얇게 발린 크림이 딱 좋아. 더 많으면 과한 느낌이야.”

“헉. 세상에……. 조금 전에 배운 사람이라고 했던 건 취소할게요.”

“허, 어이가 없네. 그래, 많이 배운 너 다 먹어라.”

재성은 나머지 크림도 싹싹 긁어 혜수에게 넘겨줬다. 순식간에 크림이 가득해진 접시를 보며 혜수는 방긋 웃었다.


“히힛, 감사합니다.”

‘음, 맛있겠다.’

눈을 반짝이며 재성이 덜어준 크림을 포크로 한가득 떠 입에 넣으려는 그때. 갑자기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순식간에 혜수의 포크를 잡아채 간다.


“?”

위를 올려다보니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사람은 도영이었다. 뼈도 자를 수 있을 것 같은 레이저를 눈에 장착한 도영 말이다.


“교수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오후에 회의 있다고 하셨지 않아요?”

오늘 오후에 외과 교수들이 반기별로 모이는 회의가 있다. 물론 도영도 거기에 참석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 도영이 퉁명스레 대답한다.


“어떻게 오긴. 카페에 커피 마시러 오지.”

“아.”

그렇지만 빈손이다. 그럼 이제 주문하려는 건가 했는데 도영은 옆에 있던 의자를 휙 끌어다 혜수 옆에 앉아버렸다.


“커피 안 시키세요?”

“아니. 생각을 바꿨어. 크림을 먹기로 했어.”

“크림이요?”

“어.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좋은 크림.”

그러면서 혜수에게 뺏은 포크의 크림을 한입에 털어 넣는다. 초코 크림이 순식간에 도영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그 장면을 본 재성의 표정이 요상해진다. 주도영 교수님이 저 다디단, 포화지방으로 가득한 크림을 먹다니! 내가 제대로 본 게 맞아?

도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머지 크림도 떠서 먹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포크를 보며 재성의 눈은 이제 커진 것을 넘어 경악에 차 있었다.

순식간에 크림이 사라졌다. 그 많던 크림을 다 먹은 도영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만족스럽게 입을 늘렸다. 도영이 먹어치운 크림은 딱 재성이 혜수에게 덜어준 만큼이었다.


“잘 먹었어.”

혜수도 놀라서 입을 벙긋거렸다.


“교수님, 괘, 괜찮으세요? 이거 초코 크림이라 꽤 달 텐데요.”

“맛있는데?”

“어, 그, 네.”

“나 선생 옆에 있는 티슈 좀.”

혜수가 건넨 티슈로 입가에 묻은 크림을 깔끔히 닦아낸 도영은 재성을 휙 쳐다봤다. 그 매서운 기세에 재성이 흠칫 몸을 떤다.


“황 선생.”

“예?”

“조금 전 수술 끝나고 ICU에 나간 환자. 보호자 설명했나?”

“네, 하고 내려왔습니다.”

“랩은?”

“조금 전에 나갔습니다. 아직 결과가 안 나왔습니다.”

“오전에 말했던 동의서들은?”

“기한 삼 일 주셔서 아직 안 했습니다.”

“참고문헌 정리는?”

“그것도 내일까지라 오늘 저녁에 하려고…….”

“교과서 베끼는 건?”

“그것도 아직…….”

“카데바 워크숍 보고서는?”

“그것도 아직…….”

재성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간다. 도영은 코웃음을 탕, 쳤다.


“지금 가서 당장 해.”

“예?”

“지금 당장 가서 결과 나왔는지 확인하고 동의서 받고 참고 논문 정리하고 교과서 베껴 쓰고 보고서 써와.”

“히익.”

재성에게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이 일들을 모두 하려면 지금 시작해도 사흘 밤을 꼬박 새워야 할 텐데!


“왜? 무슨 문제라도?”

이렇게 시키면 당분간은 딴짓은 못 할 것이고 혜수와 노닥거릴 틈도 없겠지, 란 생각이었다.


“지, 지금 당장요? 랩 결과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을 텐데…….”

말을 흐리며 도영의 눈치를 보던 재성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입도 먹지 못한 케이크와 커피는 지금 문제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제 목을 잘라 버릴 것 같은 도영의 표정이 더 문제였다.


“갑니다! 갑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달려가는 재성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도영은 재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혜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혜수를 보며 부드럽게 웃는다.


“크림 더 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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