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조금만 더 얼굴을 비튼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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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조금만 더 얼굴을 비튼다면
2022.07.23.
“난 네가 싫어하는 것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아.”
도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나직이 울린다. 어린아이를 어르듯 자상한 목소리였다.
“어째서요?”
“이미 조유민의 일로 충분히 속상할 테니.”
“…….”
깜빡깜빡, 도영을 쳐다보던 혜수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그럼 아까 회의 중에 딴생각한 것도 봐주세요.”
“음?”
“저 혼나기 싫어요. 그러니 봐주세요, 네?”
“흐음. 그건 안 되겠는데.”
도영이 장난스레 눈을 치켜떴다. 조금 전과는 정반대로 무게가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신 선생. 회의 중에 딴생각이라니. 지금 제정신이야?”
다른 레지던트들을 혼낼 때를 흉내 낸 엄한 말투에 혜수의 볼이 불룩 부풀었다. 뾰족해진 입에서는 뾰로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것 다 교수님 때문인 건데.”
“나 때문이라니?”
“교수님께 연락은 안 오지, 조유민 선생님이랑 약혼했다는 기사는 자꾸 나오지, 교수님은 아주 말짱해 보이지!”
“…….”
“그러니까 힘들어서 그랬던 거예요.”
‘힘들었다’는 단어 선택에 도영이 멈칫한다.
“대체 교수님은 무슨 생각이신 걸까, 고민했던 거라구요.”
“……조유민과의 일로 속상했던 것이 맞군.”
혜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속상하지 않았다고 한 건 거짓말이에요.”
도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치켜떴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진다.
“사과하지.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도영의 손이 혜수의 뺨을 슬쩍 스쳤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손끝에서 편치 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모습에 혜수는 슬쩍 웃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왜?”
“교수님이 절 이해해 주시니까요.”
그 말과 함께 혜수가 환하게 웃자 도영도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서 혜수는 깨달았다. 교수님은 이번 일로 나를 혼낼 생각이 없구나.
“그럼 안 혼내시는 거죠?”
“흠.”
잠깐 고민하던 척을 하던 이내 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유가 그랬다니 이번에는 정상참작 해주지. 내가 원인 제공을 했으니.”
“정말요?”
“그래. 하지만 다음부터는 안 돼.”
“알겠어요. 그럴게요.”
배시시 웃으며 반드시 집중하겠습니다, 외치는 혜수를 보며 도영도 덩달아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왜 이리 아름다운지. 미소 가득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찬란하게 빛나는 게 어떤 것인지 깨닫던 그때.
쾅쾅. 등 뒤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등에서 전해지는 진동에 놀란 혜수는 두 손으로 도영을 힘껏 밀어냈다.
“교수님! 누가 왔나 봐요.”
“하아…….”
대체 누구야, 하며 중얼거리는 도영의 미간이 와그작 구겨졌다.
“누구십니까.”
문을 향해 누구냐 묻는 목소리에도 짜증이 잔뜩 배어 있다.
“접니다, 교수님. 3년 차 황재성입니다.”
“황 선생?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SICU(외과 중환자실)에 계신 김현수 님 벤틸레이터(ventilator:인공호흡기) 때문에요.”
하아, 또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쉰 도영은 혜수를 소파로 데리고 가 앉혔다.
“여기 잠시만 앉아 있어. 봐주고 올 테니.”
“그럴게요. 천천히 하시고 오세요.”
잠시 뒤, 밖에서 재성과 이야기를 끝낸 도영이 다시 들어와 혜수의 옆에 앉았다.
“급한 일이에요? 가보셔야 해요?”
“아니. 치프가 혼자 위닝(weaning:제거)도 못해서야 쓰나.”
문 너머에서 도영의 잔소리가 줄줄이 들리더니 역시나 도영의 기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로 불렀나 보다.
도영은 손목시계를 흘긋 보고는 쯧쯧 혀를 찼다. 혜수를 보기에 일 분 일 초도 부족한데 저런 놈 때문에 시간을 소비하다니.
“할 일은 없나?”
“네, 없어요. 그건 왜요?”
“조금만 더 있다가 갔으면 좋겠는데.”
“그럴게요.”
단박에 나오는 긍정의 대답에 도영은 또 작게 웃고는 양손을 깍지 껴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기다랗고 매끈한 손이 대칭을 이루며 포개져 있다. 그 손을 바라보고 있는 혜수의 시선을 느낀 도영은 보란 듯 오른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했다.
“이곳에서 내가 아파하던 걸 봤을 때 많이 놀라지 않았나?”
주치의가 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 혜수는 도영의 오른팔 근육이 경련하는 것을 목격했고 직접 치료를 해 주었다. 또 그때 처음 도영의 손을 잡았었고 경련이 바로 멎는 장면을 목격했다. 놀랍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조금요.”
실은 많이 놀랐었다. 그 정도로 아파하는 사람을 본 적도 처음이고 그렇게 이상하게 근육이 뒤틀리듯 떨리는 것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도영의 방 안에 있는 운동기구의 존재를 미리 알지 못했더라면 혜수는 다른 의료진들을 죄다 방에 불러 모았으리라.
“내게 궁금한 게 있을 텐데.”
“여쭤봐도 돼요?”
“얼마든지.”
잠시 고민하던 혜수는 물었다.
“팔은 왜 그런 거예요?”
“사고.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가 크게 났어. 그때 팔을 다쳤는데 수술을 제때 하지 못했어.”
혜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술을 제때 못 하다니요?”
“나도 이해가 안 가.”
도영의 인상이 순간 험악해졌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의사가 단순 봉합만 해도 되는 다른 곳들을 먼저 치료하는 바람에 치료 시기를 놓쳤어.”
무슨 생각이었는지 담당 의사는 뼈가 부러지고 신경과 혈관마저 끊어진 오른팔은 놔두고 왼팔부터 수술을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나서야 수술대에 오른 오른팔은 더욱 손상이 진행된 상태였다.
수술 후에는 겉으로만 봐서는 멀쩡했기에 모든 게 잘 끝난 줄로만 알고 퇴원을 했다. 몇 년 뒤에 생길 경련으로 인해 계속 고통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작은 시골 병원이었어. 평소엔 가볍게 다친 환자들만 보다가 한밤중에 난 큰 사고라 준비가 부족했겠지. 경황도 없었을 테고”
“왜 처음부터 대형 병원으로 안 가셨어요?”
“날 구한 구조대가 거기까지 가기에 무리인 상태라 판단했나 보더군.”
“사고가 정말 크게 났었나 보네요.”
“덤프트럭과 정면으로 부딪혔어. 나중에 들어보니 브레이크가 고장 났었다더군. 우리가 탔던 차는 사고 후 바로 폐차장으로 갔지. 성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어.”
“그래서…… 배구를 그만두신 거예요?”
“알고 있었어? 내가 배구 선수 했던 것.”
“네. 기사에 나오던걸요.”
유민과의 약혼을 알리는 기사에는 친절히 도영의 국가대표 시절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지금보다 활기차고 장난기 어린 얼굴의 도영이 경기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이었다.
물론 기사에는 사고의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배구 국가대표를 했을 정도로 뛰어난 운동 실력을 가지고 있고 머리까지 좋아 현재는 의사인 주도영으로 소개되기만 했다.
“그렇군. 내 기사를 찾아보지는 않아서.”
사고 이후, 도영은 운동은 그만두고 공부에 매달렸다. 철판을 대놓은 오른팔은 이전처럼 움직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히 뛰어난 기억력과 특유의 끈기를 가지고 있어 쉽게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하지만 한국 최고의 의대에 입학했다는 성취감도 잠시, 도영의 오른팔에는 새로운 증상이 생겼다. 바로 경련. 절단되었다가 다시 이어진 신경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도영의 팔은 절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한 번 경련이 생기면 도영은 밥을 먹는 것도, 수업을 듣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어디든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몸을 숨겨야 했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매일같이 저를 이렇게 만든 운명을 원망했다. 잘못된 판단을 한 의사를 저주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의사를 찾아 똑같이 만들어주고 싶었어.”
생각만 해도 화가 치솟는지 도영이 이를 갈았다.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지.”
“…….”
혜수는 도영이 그 의사에게 가지는 분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도영에게 그 의사는 절대 이해할 수 없으며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 나쁜 의사는 그만 생각해요, 네?”
이러다 또 통증이 올까 걱정스러워 혜수는 도영의 손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통증은 얼마마다 와요?”
“정해진 것은 없어. 확실한 것은 자극을 주면 트리거가 된다는 것.”
“그럼 그날 아프셨던 건 저 때문인 것이 맞네요.”
“선생 때문이라니?”
“교수님 댁에 갔던 날 전날에요. 흉부외과 김계상 교수님이 절 때리려고 하는 걸 막아주셨잖아요. 오른손으로. ……죄송해요. 저 때문에.”
“선생 때문이 아니야. 화를 참지 못한 나 때문이지. 그리고 선생은 날 화나게 해도 괜찮아.”
“……어째서요?”
“너니까.”
“…….”
어째서 저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모르겠다. 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모르는 혜수에게 도영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혜수의 손을 굳게 잡고 속삭였다.
“그리고 이 손. 손을 잡으면 수축이 멎지.”
“그게 진짜 저 때문인 게 맞아요?”
“아무래도. 이벤트가 몇 번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으니까 다행이네요.”
“그래.”
도영은 혜수의 손을 고쳐잡았다. 손 마디마디를 얽은 뒤에는 손등에 입술을 갖다 대고 가볍게 키스했다. 찌르르 울리는 감각에 혜수는 잘게 몸을 떨었다.
손등에서 입술을 뗀 도영이 천천히 혜수에게로 다가왔다. 강렬한 눈동자가 혜수를 바라본다. 도영의 검은 눈동자는 순식간에 정염으로 탁해졌고 이제 둘 사이의 거리는 손가락 한 마디만큼. 도영의 뜨거운 호흡이 입술을 쉼 없이 간지럽힌다. 무언가를 직감한 혜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눈은 왜 감는지?”
갑자기 들려오는 장난기가 섞인 말에 혜수의 눈이 다시 뜨였다.
“에?”
코앞에 있던 도영이 어느새 얼굴을 물린 채 고개를 기울이고 있다.
“눈은 왜 자꾸 감아. 예전에도 그러더니.”
1년 차 초반, 이 병원에서 도영을 만났을 때 그의 앞에서 두 번이나 착각하여 눈을 질끈 감았던 것이 생각난다. 그 덕분에 진짜 이름도 들켰었지.
“습관인가?”
도영의 말투엔 웃음기가 잔뜩 배여 있었다. 혜수는 고개를 휙 뒤로 물렸다.
“그게, 그때는! 교수님이 무서워서 그랬던 거예요.”
“그럼 지금은? 오늘도 무서워서 감은 건가?”
“그게 아니라……!”
“아니면 뭐?”
반쯤 접힌 도영의 눈이 혜수를 바라본다. 한가운데 박힌 눈동자는 퍽 집요해 혜수가 대답해 주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대답하지 않을 건가?”
“…….”
오른쪽으로 고개를 피하면 오른쪽으로 쫓아오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왼쪽으로 쫓아온다. 어떻게 해도 도영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교수님, 진짜 너무한 거 아세요?”
장난을 치는 도영이 너무 짓궂어 혜수는 볼멘소리를 냈다. 그런 혜수를 보는 도영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발그레한 얼굴로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는 게 너무 사랑스러워서.
“아, 미치겠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도영은 불쑥 혜수에게 다가갔다. 뜨거운 호흡이 서로의 입술을 스친다. 흥분과 열망이 참을 수 없게 차오른다. 혜수든 도영이든 아주 조금만 더 얼굴을 비튼다면 입술은 맞닿을 것이다.
그런데, 또 누가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세게 두드린다. 쾅쾅쾅, 줄기차게도 두드린다. 쾅쾅쾅쾅쾅!
도영은 정말로 화가 났다. 이번엔 또 누가 우리를 방해한단 말인가.
도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린다.
“대체 누구……!”
소리를 치던 도영은 말을 삼켰다. 문 너머에 서서 처량한 표정으로 저를 기다리던 사람은 또 재성이었기에.
도영은 소리를 지를 만큼 화가 치솟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안까지 들렸다.
“또 무슨 일이지.”
분노가 타오르는 눈빛을 보며 재성이 더듬거린다.
“S, SICU 김현수 님이…….”
“그래! 김현수 님이 뭐!”
“저, 그, 교, 교수님. 잠깐만 SICU에 가주시면 안 될까요?”
“이유는.”
또 뿌득 소리가 났다. 저러다 치아가 손상되진 않을까 걱정된다.
“알려주신 대로 베, 벤틸레이터 위닝(ventilator weaning:인공호흡기 제거)을 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말씀하신 방법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아요.”
“뭐? 하!”
도영의 한탄에 재성이 움찔했다. 도영이 입으로 직접 뱉지는 않았지만 치프가 되어가지고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하냐,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다, 라는 말이 들렸던 것 같아서다.
한동안 재성을 쏘아보던 도영은 곧 올라가겠다 한 뒤 문을 쾅 닫았다. 환자가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가지 않을 수는 없다. 숨을 쉬고 있는 한 어떤 상황이라도 저를 찾는 환자가 있다면 가야 한다.
혜수에게 돌아온 도영은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지금 가봐야겠어.”
조금 전 재성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던 눈빛은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다. 지금 혜수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순하디 순한 한 마리 초식동물이다.
“네, 가보셔야죠.”
확연히 달라진 모습에 혜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는 도영의 꽉 쥔 주먹을 하나하나 펴주었다.
“힘주지 말구요. 다음에 또 봐요, 교수님.”
“하아. 그래. 곧 연락하지.”
혜수를 놔주는 도영의 손에 아쉬움이 길게 늘어졌다.
“저 먼저 갈게요, 교수님.”
혜수는 조심히 도영의 방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