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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보고 싶었어 (49/110)


49. 보고 싶었어
2022.07.20.



 
그 반응을 보며 상훈은 더욱 기름지게 웃었다.


“우리 새신랑이 많이 부끄러운가 봅니다. 내 주 교수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는데요?”

“으하하하하.”

회의실은 소란스러워졌다. 이때다 싶은 사람들은 도영을 마음껏 웃음의 주제로 삼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아아아주 많은데. 여러분도 그렇지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유민과 친하다는 경애는 휘파람을 불며 책상을 팡팡치고 아주 난리가 났다.


“와우, 궁금해요!”

“과장님만 믿을게요!”

역시나 신나게 박수 치던 재성이 혜수를 쿡 찌른다. 다들 웃고 떠드는데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게 꼭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았다. 잘 먹던 샌드위치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지 오래다.


“야,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프냐?”

“……아니에요. 아프긴요, 튼튼합니다.”

“그래. 아주 튼튼해 보이기는 해. 우리 껌이 아픈 건 말이 안 되지.”

“…….”

 

어딜 가나 도영과 유민의 약혼 이야기뿐이었다. 병동에도, 응급실에도, 심지어 환자들이 있는 병실과 휴게실에도 도영과 유민의 이름이 심심찮게 들렸다.


“저 뉴스에 나오는 사람 여기 교수라던데?”

“엣헴. 우리 교수님이야. 잘생겼지? 실력도 좋다고. 나 배 수술한 것 좀 봐. 흉터가 이렇게 조금밖에 안 남았어.”

약혼식을 하는 호텔에도 기자들이 찾아갔는지 포털 메인에는 도영과 유민의 약혼식 사진이 걸렸다.

병원에서 주로 보던 어두운색의 슈트가 아닌 밝은색 슈트를 입은 도영과 레이스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유민은 팔짱을 끼고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대중의 반응은 약혼 예정 기사가 나왔던 때보다 훨씬 뜨거웠다. 기사의 댓글 창도 더욱 요란했다.

[둘이 비율 봐라. 얼굴이 주먹만 해. 연예인 커플인 줄.]

[저 얼굴에 둘 다 의사라고? 좋겠다. 금수저에 머리도 좋고 얼굴도…… 개 부러워. 크흑.]

[둘의 2세는 진짜 이쁠 듯.]

그리고 약혼식 이후 한 봉사활동 사진도 올라왔다. 기철과 도영, 유민이 나란히 앞치마를 입고 노인들에게 배식을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마음씨도 이쁘네. 둘이 진짜 잘 어울린다. 천생연분.]

[아름다운 커플이네요. 행복하게 잘 사세요~♥]

[역시 우리 주기철 후보님. 대통령까지 가즈아아아.]

[생각 깊은 울 후보님. 주프 응원합니다!]

며칠이 지나도 둘의 사진은 여전히 포털의 메인에 걸려 있었다. 병원 안의 소문 또한 잦아들 틈이 없었다. 여전히 직원들이 모이면 핫이슈는 도영과 유민의 약혼이었다.

더 지나서는 결혼은 언제 한다더라, 신혼여행은 어디로 간다더라, 실은 혼전 임신이다, 는 카더라 통신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제야 혜수는 봉사활동을 갔던 날 도영이 한 말을 이해했다.


‘앞으로도 조유민과 관련된 이야기는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달만 기다려 줄 순 없을까.’

 
도영에게 직접 그 말을 듣지 못했더라면 많이 상처받았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일부러 더 바삐 움직여도 아릿한 왼쪽 가슴은 어쩔 수가 없다. 혜수는 가슴을 꾹꾹 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환자들을 돌봤다.


‘이건 눈속임용이잖아.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문득문득 드는 원망은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해. 문자나 전화 한 통은 해줄 수 있잖아?’

택시 안에서의 일들이 모두 꿈처럼 아득하다.

그날 이후 지금껏 애정 어린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했다. 도영은 늘 유민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또 과가 바뀐 터라 더욱 마주치기 어려웠다.

그쯤 되자 혜수는 내가 착각을 했나, 정말 꿈이었나 싶어 마주 닿았던 손을 몇 번이고 다시 보기도 했다.

***

저녁엔 연구팀의 회의가 있었다.

연구는 이미 막바지에 이르러 케이스들을 모두 모은 상태였다. 이제는 결과를 정리해 논문을 쓰기만 하면 된다.


‘드디어 교수님을 보는구나.’

봉사활동에 다녀온 이후 도영을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것은 처음이다.

혜수는 복잡한 마음으로 의국으로 내려갔다. 회의실로 가니 이미 그곳엔 도영과 다른 팀원들이 앉아 있었다.


“저 왔습니다.”

“앉지.”

“네.”

혜수는 일부러 제일 끝자리에 가 앉았다.

도영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다. 그를 보는 순간 그동안 그에게 가졌던 미움과 원망, 그리고 그리움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날 것 같았다.

많은 자리를 놔두고 굳이 구석에 가 앉는 혜수를 보고 펠로우가 묻는다.


“야, 너 왜 거기 앉아?”

“그냥요.”

“그냥? 사춘기냐?”

“…….”

도영도 저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자 도영도 혜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째깍째깍째깍, 넓은 회의실에 정적이 흐르고, 팀원들이 이 분위기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생각한 도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작하지.”

곧게 선 도영은 스크린에 여러 표와 그래프를 띄웠다.


“애초에 예상했던 대로 저 체온과 극 저 체온 그룹 사이에서 차이가 명확하게 나왔으니 그것을 더욱 중점적으로 알려야겠지.”

이후로도 논문의 각 파트를 쓸 때 무엇을 더 강조해야 하는지, 어떤 것은 쓰면 안 되는지, 여러 결과값 중 어떤 것을 선택해 넣을지 등에 대해 긴 회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혜수는 회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평소와 똑같은 도영을 보니 더욱 혼란스러워서다.

잘생긴 이마도, 반듯한 코도, 붉은 입술도 그대로다. 우뚝 서서 회의를 주도하는 군더더기 없는 행동까지 여전히 훌륭하다. 아니, 더 멋있다.


‘교수님은 너무 멀쩡하잖아? 난 이렇게 심란한데.’

그렇게 도영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점차 채워져 갔다.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 사귀는 건 아니지 않나? 아니, 맞나?

나중에 교수님을 마주하게 되면 무슨 말을 할까? 왜 연락하지 않았냐고 할까? ……그건 너무 어린애 같으려나. 하지만 나도 안 하기는 했는데.

아니면 이런저런 기사들 때문에 속상했다고 솔직히 말할까. 아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 신경을 썼으니 또 어린애 같다고 할까?

아니면 설마……. 그날의 일은 실수다, 잊어라, 하는 건 아닐까? 그때의 그 감정들은 전부 내 착각일까?


‘하아, 모르겠어.’

“……선생.”

“신 선생.”

“신 선생!”

저를 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혜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네!”

“지금 회의 중에 딴생각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내가 뭐라고 했지?”

“……모르겠습니다.”

도영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혜수를 보는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진다.


“신 선생은 인트로를 맡는다. 기한은 닷새 주지. 엄수하도록.”

“네, 교수님.”

“그리고.”

도영이 들고 있던 파일을 탁, 책상에 내리쳤다.


“회의에 집중해.”

“네, 죄송합니다.”

시무룩하게 대답한 혜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회의가 끝났다. 저마다 자료들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도영이 혜수를 부른다.


“신 선생.”

“네.”

“선생은 잠깐 나 좀 보지.”

말을 끝낸 도영은 회의실을 휙 나가버렸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누가 봐도 화난 표정이다.

그 뒷모습을 보며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옆에 앉은 펠로우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한다.


“으이구, 회의 중에 딴생각을 하면 어떡해. 사탄 제대로 화난 거 같은데?”

그러자 그 옆의 임상 교수도 거든다.


“그래. 표정 너무 안 좋더라. 얼른 따라가 봐. 늦으면 늦었다고 또 혼날라.”

“……저 먼저 가볼게요.”

“미리 명복을 빌어주마.”

혜수는 회의실을 나왔다. 긴 복도를 지나 곧 도영의 방문 앞에 섰다. 성벽처럼 우뚝 선 갈색 문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하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똑똑, 문을 두드렸다.


“교수님, 저 신혜수입니다아…… 앗!”

열린 문틈으로 불쑥 커다란 손이 나오더니 혜수의 손목을 잡아당긴다.


“!”

그렇게 혜수는 방 안으로 속절없이 끌려들어 갔다.

쾅, 도영의 방문이 거세게 닫혔다.
 

도영을 보자마자 알아챘다.

무언가 잘못을 해 부른 건 아니라는 걸, 그동안 있었던 일도 없던 일로 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안도와 동시에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한다. 도영의 시선이 너무 올곧아 바라보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이다.

혜수는 달아오른 뺨을 슬쩍 옆으로 숨겼다. 그러자 도영이 턱을 잡아든다.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가 눈에 들어온다.


“보고 싶었어.”

아, 정말로 없었던 일로 하자는 건 아니구나.

속으로는 또 안도했지만 저도 모르게 입이 삐죽 나온다.


“매일 봤잖아요. 아침 브리핑할 때.”

“그걸론 부족해.”

“조금 전에도 봤잖아요.”

“날 안 봐줬잖아. 회의 내내 책상만 보더군.”

표며 차트를 보느라 모를 줄 알았는데 다 보고 있었을 줄이야.


“눈이 측두엽에도 달리셨나 봐요.”

새 부리처럼 입을 쭉 내밀고 툭툭댔다. 도영이 픽 웃더니 손가락으로 혜수의 입술을 꾹 눌렀다.


“요 맹랑한 입은 여전하군.”

갑작스레 입술에 느껴지는 간지러움에 혜수는 입술을 앙 말아 물었다.

도영과의 거리도, 도영의 손길도 혜수를 자극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절 왜 부르셨어요. 혼내시려구요?”

“아니. 보고 싶어서.”

“…….”

훅 들어오는 고백에 혜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또 그동안 속상했을 거야. 사과하지.”

“제가 속상할 게 뭐가 있다고요.”

“기사들. 사람들의 뒷이야기들.”

“…….”

새삼 또 안도했다. 자신이 상처받았었다는 것을 도영이 신경 써줬다는 것에 대해.


“직접 보고 말하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했어. 오해가 쌓일 수 있으니.”

“오해할 게 뭐가 있어요. 약혼한 두 분이 기사에 나오는 건 당연한 건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고개를 끄덕이던 혜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신혼여행은 세계 일주를 하신다던데요? 특히 북유럽 위주로 하신다던가. 그리고 축하드려요.”

“축하?”

“조유민 선생님이 쌍둥이를 임신했다던데. 몇 주에요?”

이제는 빈정이 세 스푼 정도 섞인 투정을 들으며 도영이 또 쿡, 웃었다.


“얼마든지 해. 그래서 속이 풀린다면.”

“…….”

“어서. 각오는 충분히 되어 있으니.”

한참 눈알을 굴리던 혜수가 볼을 부풀린다.


“판 깔리니 더 못하겠잖아요. 전 원래 무대 체질이 아니라구요.”

도영은 쿡쿡 웃고 말았다. 통통한 볼로 눈을 샐쭉하게 뜨는 혜수가 참을 수 없게 사랑스러워서.

도영이 검지로 볼을 툭 건드렸다. 부드러운 터치에 혜수가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도영은 더욱 바짝 혜수에게 다가갔다. 더운 숨결이 혜수를 간지럽힌다.

덕분에 동그란 눈이 더욱 커진다. 풍성하고 짙은 속눈썹이 위아래로 깜빡인다. 이 또한 빠짐없이 사랑스럽다.


“안고 싶어.”

“!”

“안아도 돼?”

“뭐, 뭐 그런 걸 다 물어요?”

“그럼 허락의 의미로 알고.”

강렬한 시선과는 다르게 도영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긴 손가락이 가지런한 혜수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갈색 머리가 흐트러지며 샴푸 향이 주위로 퍼진다.

뒷목으로 내려간 손은 단단하게 혜수의 머리를 받쳐 바짝 당겼고 도영은 문과 제 몸 사이에 혜수를 가둬버리듯 붙어왔다.

그렇게 한동안 혜수는 도영의 품 안에 있었다.

커다란 몸은 예상보다 훨씬 아늑했고, 따뜻했다. 쿵쿵, 거세게 뛰는 심장이 절로 느껴진다. 몽글하면서 저릿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도영은 멈추지 않고 혜수의 턱을 부드럽게 당겨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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