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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내 여자친구니까 (48/110)


48. 내 여자친구니까
2022.07.16.



 
어두운 밤과 세찬 빗소리 속, 노란 조명 아래에서 도영이 제게 고백을 했다.

혜수의 심장이 아래로 떨어짐과 동시에 시간이 멈췄다. 좋아한다는 도영의 나직한 목소리는 울림이 되어 혜수를 휘감았다.

멍하고 어지러운 와중에 도영의 고백만이 자꾸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아, 어, 그게요.”

혜수가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도영이 또 웃는다. 어둠도 가를 듯한 싱그러운 웃음이다. 도영이 이런 웃음도 지을 줄 아는 사람임을 혜수는 오늘 처음 알았다.

그 웃음을 넋 놓고 보던 혜수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빨개졌을 게 분명한 얼굴을 그대로 내보이는 게 쑥스러웠다.

그런데, 숙인다고는 했지만 건물 입구를 밝히는 조명이 너무 환하다. 주홍빛으로 물든 혜수의 뺨이 그대로 다 드러난다. 평소 병동을 당당하게 다니던 모습과 딴판이다.

그 모습이 왜 이리 귀여운지.


“아, 신혜수.”

도영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네가 이러면 내가 손을 놔주기가 싫잖아.”

헉, 혜수는 숨을 또 들이켰다.

이게 주도영 교수님에게서 나오는 말이 맞단 말인가?

쿵쾅쿵쾅, 이제 혜수의 심장은 울리다 못해 터질 듯 요동치고 있었다. 이러다 곧 터질지도 모른다.


“그, 그만 잡아요.”

혜수는 도영의 손을 털어내려 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도영의 손끝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고 그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나도 교수님이 좋다고 말해버릴까 고민하던 그때.

또 벨소리가 울렸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흘긋 보니 이번에도 발신인은 ‘승원 오빠’. 아무래도 아까 혜수가 전화를 받지 않았으니 승원은 걱정이 되어 다시 전화를 했을 것이다.

Rrrrr, Rrrrr.

벨소리는 계속 시끄럽게 울려대는데 혜수는 가만히 있으니 도영이 의아해 한다.


“안 받아도 돼?”

“아, 네. 집에 가서 받으려구요.”

혜수의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이러다 승원 오빠와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고 거짓말한 게 들키면 큰일이야. 사정을 제대로 말하고 용서를 구하기 전엔 안 돼. 자칫하다가는 모든 게 망쳐질 거야.


“아까부터 친구에게서 오는 전화인데 아마 고민 상담일 거예요.”

혜수는 도영의 손을 힘주어 털어냈다.


“교수님, 이제 저 들어가야 해요. 피곤해요.”

“아.”

혜수가 울상을 지으면서 피곤하다고 하자 도영은 마지못해 손을 놔주었다. 표정에는 아쉬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 오늘 봉사 활동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너무 내 생각만 했군. 들어가 봐. 가서 쉬어.”

그 와중에도 벨 소리는 줄기차게 울리고 있다.


“저 그럼 갈게요. 교수님도 조심히 가세요.”

혜수는 꽁지가 빠져라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혜수가 완전히 사라지고, 도영은 몸을 틀었다.

커다란 몸 아래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운다. 도영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건물 바로 앞, 맞은편으로 이어지는 골목이 있다. 가로등 하나 없이 칠흑처럼 깜깜한 그 길을 잠깐 응시하던 도영은 서늘하게 말했다.


“슬슬 나오는 게 어때.”

잠시 뒤, 골목 사이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것은 천천히 도영에게 가까워졌고 마침내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밝은 가로등 아래 선 그는 승원이었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뭐해?”

승원은 한 걸음씩 다가왔다. 도영을 노려보는 그의 시선은 살기등등했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짓이지.”

승원의 분노 가득 찬 물음에 도영은 가볍게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죄라도 지었나 봐. 몰래 숨어 있는 걸 보니.”

정곡을 찔린 승원의 눈썹이 꿈틀한다.

처음부터 숨어 있을 생각은 없었다. 실은 혜수가 전화를 받지 않아 혜수의 원룸 건물까지 걸어오던 길이었다.

마침 건물 입구에 혜수가 서 있어 혜수를 부르려던 찰나. 승원은 혜수는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혜수의 앞에는 등을 보이고 있는 커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익숙한 뒷모습의 남자가.


‘설마 주도영?’

승원은 다시 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제게서 전화가 온 것을 보고도 혜수는 받지 않았고 승원은 충격을 받았다.


‘혜수가 왜…… 내 전화를 받지 않아?’

그 순간, 등을 보이던 남자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틀었고 승원은 저도 모르게 골목으로 숨었다. 사선으로 보이는 그 날렵한 얼굴은 도영이 맞았기에.

승원은 부들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닥쳐. 네가 감히 어딜 나타나.”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

“어. 여기는 오면 안 돼.”

“왜?”

잠시 망설이던 승원은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말했다.


“혜수는, 혜수는 내 여자친구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영이 코웃음을 치며 승원에게 다가갔다.


 
도영의 코 끝이 승원의 코를 스친다. 소름 돋도록 서늘한 목소리가 주위를 가득 에웠다.


“그럼 난 오늘 네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낸 것이 되나.”

“!”

“우리, 그러니까 네 여. 자. 친. 구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같이 오게 됐는지부터 이야기해줄까?”

빠득, 승원이 어금니를 강하게 물었다. 반듯했던 턱이 부들부들 떨린다. 도영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아까 보육원에서 말이야. 집으로 돌아가던 차에서 내렸지. 네가 버리고 간 신혜수를 데려오려고.”

 

몇 시간 전 공동체 마을 앞.

아버지 기철과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 차를 타고 가던 도영은 운전기사를 불렀다.


“차 좀 세워주십시오.”

끼익 소리와 함께 차가 서고 뒤로 줄줄이 따라오던 차들도 모두 멈췄다. 예상치 못했던 도영의 행동에 기철이 미간을 찌푸린다.


“주도영, 무슨 일이냐?”

“저는 따로 가겠습니다.”

“이유는?”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쯧. 기자들이 사방에서 지켜보고 있다. 잔말 말고 타고 가.”

“아니요. 지금 내리겠습니다.”

즉시 들려오는 대답에 기철은 보육원에서 마주쳤던 여자를 떠올렸다.

다친 관리인을 부축하던,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앳된 얼굴의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도영의 얼굴.

당시 도영의 얼굴은 지금껏 전혀 볼 수 없었던, 미련과 질투가 뒤섞인 날 것 그대로의 표정이었다.

기철은 코웃음을 쳤다.


“왜, 남겨둔 여자라도 있는 게냐?”

“……그런 것 아닙니다.”

하지만 노련한 정치가 앞에서 도영은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일 뿐. 기철에게는 도영의 속이 훤히 보였다.


“주도영. 약속을 했으면 끝까지 지켜.”

“약속 어길 일 없으니 걱정 마시지요, 의원님.”

“뭐라?”

“이만 내리겠습니다, 의원님.”

“이 자식이!”

기철의 음성이 점점 격앙되었다.

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은지 꽤 된 것을 스스로도 안다. 그것이 저를 아비 취급하지 않겠다는 의지임도 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사실보다 도영이 다른 여자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더욱 거슬린다.

대체 그 여자가 누구길래 주도영이 생전 하지도 않던 짓을 하지? 그래, 점심을 같이 앉아 먹은 걸로 보아 같은 병원 사람이긴 하겠고. 레지던트? 아니면 간호사인가?


“모자란 놈. 지금은 행동 하나도 조심해야 할 때임을 모르는 게냐?”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굳이 따라온 것 아닙니까.”

“누구든 내 앞을 방해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아. 네 행동으로 일이 틀어지게 된다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얼마든지 그러십시오.”

도영은 쓰린 속을 달래며 차 문을 벌컥 열었다.

지금 나는 장기판의 말일뿐이다. 정치에 뛰어든 이후 아버지는 늘 그런 취급을 했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막상 말로 들으니 더욱 씁쓸하다.


“주도영! 그래도 내리겠다는 거냐!”

“할 말 다 끝나셨으면 먼저 내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의원님.”

“저, 저놈이 끝까지!”

도영은 그렇게 세찬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비를 맞는 것이 팔에 치명적일 수 있음을 알지만 홀로 남은 혜수가 너무나 걱정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승원에게 말할 이유는 없다. 여전히 저를 죽일 듯 노려보는 승원을 보며 도영은 더욱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주 고마워. 네 덕분에 편하게 왔거든. 혜수가 같이 택시를 타자고 하지 않겠어? 아주 귀엽게도 내게 먼저 권하더군.”

“거짓말하지 마!”

“난 누구처럼 거짓말 안 해.”

“!”

“이제 택시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순서인가?”

“이 새X가!”

더 이상 들을 수 없던 승원은 도영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하지만 도영은 승원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당해주는 건 한 번뿐인데.”

도영은 멈추지 않고 승원을 벽에 밀어붙였다.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승원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윽.”

강한 충격에 승원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고. 네가 혜수 연인인 건 맞나 모르겠군. 혜수는 널 그렇게 생각 안 하던데.”

“!”

갈색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린다. 승원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볼썽사납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쯧.”

도영은 뒤로 물러나며 손을 탈탈 털었다.


“지저분하기 그지없군.”

“…….”

처참한 표정의 승원을 뒤로 하고 도영은 골목을 벗어났다. 저를 죽일 듯 노려보는 승원의 시선이 끝까지 달라붙었다.
 

다음 날, 혜수는 아침 브리핑을 하러 의국의 회의실에 들어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를 하는 혜수의 얼굴이 퀭하다. 밤새 어제 있었던 도영과의 일을 생각하느라 잠을 푹 자지 못했더니 이렇다.

재성이 낄낄 웃는다.


“얼굴은 좋지 못한데? 오프라고 또 신나게 술 마셨냐?”

“아니거든요.”

대충 대꾸해 주고 자리에 앉았다. 발표 자료들을 보고 있는데 요란한 발소리가 나더니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린다.

프랜차이즈 샌드위치 가게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와 테이블마다 커피며 샌드위치, 과일 박스를 세팅한다.


“이게 다 뭐래요?”

“글쎄? 누가 보낸 거지? 우리 과장님은 이런 거 쏠 사람이 절대 아닌데.”

과장 상훈은 의국비 좀 아껴 써라, 돈 없다 이것들아, 소리를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의국장과 비서에게 식비를 좀 줄이라 잔소리를 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도 있었다.


“누가 보냈든 주기만 하면 우리야 땡큐 아니겠어?”

재성은 신나게 과일 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갖은 과일들이 곱게 손질되어 있었다. 재성은 곱게 잘라진 멜론을 한 입에 넣었다.


“크으, 진짜 달다. 혜수야 먹어 봐.”

혜수도 수박을 한 조각 입에 넣었다. 달달한 과즙이 목으로 넘어가자 몽롱하던 정신이 좀 깨는 것 같다.


“맛있네요.”

“이 과일들 되게 비싸 보인다. 대충 구색 맞추기 용이 아닌데?”

과일 중에서도 비싼 것들만 골라 놨는지 당도며 신선도가 끝내줬다. 옆에 같이 온 샌드위치도 속이 두툼하다.


“진짜 맛있어요.”

혜수는 밤새 굶주렸던 위장을 든든하게 채웠다.

곧 모든 의국원이 자리에 앉았다. 브리핑이 시작되기 직전, 과장 상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흐흠, 여러분. 우리 의국에 경사가 있어요. 다들 들어서 알겠지만.”

상훈이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도영과 유민을 차례대로 쳐다보았다.


“주도영 교수와 2년 차 조유민 선생이 어제 약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장님이 모든 과 의국에 이렇게 먹을 것을 쏘셨습니다. 맛있게들 먹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다.


“드디어!”

“축하해요. 행복하세요!”

“잘 어울린다!”

유민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자 환호는 더욱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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