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좋아해 (47/110)


47. 좋아해
2022.07.13.



 
혜수는 고개를 돌려 도영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도영은 쳐다보는 걸 멈추지 않는다.

덕분에 왼쪽 뺨이 따갑다. 따갑다 못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왜, 왜 그러세요.”

“손잡으려고. 그래도 되지?”

“!”

혜수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도영이 손을 뻗어왔다. 무릎에 올려져 있던 혜수의 손을 잡아 내린다. 아까보다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간 손이다.

동시에 택시에 올라타면서 끊어졌던 도영과의 연결고리가 다시 생겼다. 혜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손은 또 왜 잡으세요.”

“아파서. 잡아 줘.”

아프다기엔 도영의 음성이 너무 말짱하다. 평소처럼 단단하고 또렷하다. 표정도 그대로인데.


“……거짓말이죠?”

“으윽, 진짠데. 진짜 아파.”

“거짓말.”

거짓말이 분명하다.

아까 혜수가 넘어지는 것을 잡아줄 때 도영은 팔에 잔뜩 힘을 줬었다. 하지만 그 직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프다고?


“놔줘요, 네?”

하지만 손을 빼려고 해도 놔주지를 않는다. 오히려 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더니 미간을 좁히고 신음을 낸다.

……이제서야.


“으, 아파.”

“…….”

“진짜 아프다니까.”

그때, 택시 기사가 듣던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가 두 배는 커졌다. 뒷좌석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알아챘는지 눈치 빠른 택시 기사가 볼륨을 높인 것이다. 그러더니 백미러도 휙 위로 꺾어버린다.

난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둘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의지가 느껴졌다. 돈을 두둑이 받았으니 제대로 서비스를 하겠다는 것이다.

혜수는 도영을 흘겨보며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놔줘요. 기사님이 이상하게 보잖아요.”

“뭐를? 나를? 선생을? 설마 우리를?”

장난스러운 되물음에 혜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놔줘요.”

세 번째로 혜수가 손을 빼려고 시도했을 때, 도영은 아예 혜수의 손에 깍지를 껴버렸다.

아름다운 손가락이 혜수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겹쳐졌다. 마치 원래 하나인 양 사이사이의 결합에 빈틈이 없다.


“맞아, 거짓말. 전혀 아프지 않아. 그래도 잡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나?”

‘!’

쿵쿵쿵. 귀 끝까지 열이 확 오른다. 맞닿은 손이 불에 덴 듯 뜨겁다. 이제는 심장이 뛰다 못해 격렬하게 흔들린다.


‘혜수야, 진정해.’

다시 한번 유민과 기철을 떠올렸다. 도영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유민. 그런 유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던 기철. 양가의 화합이 나라의 경사인 것처럼 떠들어대던 언론들.

혜수는 반대쪽 손으로 도영의 손을 떼내려 애썼다. 하지만 커다란 손은 본드라도 붙인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얽어오니 어떻게 힘을 주어도 풀 수가 없다.

혜수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덩달아 도영도 목소리를 낮춘다.


“안 돼? 왜?”

“교, 교수님한텐 다른 사람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와는 쓸데없는 접촉은 안 하시는 게 맞잖아요.”

거부하는 뉘앙스가 담긴 말이 분명한데, 왜인지 도영의 눈은 반짝 빛났다. 입술은 매끄럽게 휘어져 올라갔다.


“걸리는 건 그것뿐인가?”

“네?”

“내 손을 거부할 이유. 그것뿐이냐고.”

‘어? 이게 그렇게 되나?’

졸지에 유민만 아니면 난 교수님의 손을 잡아도 상관없다, 라는 뜻을 전달한 셈이 되었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당황해 눈알만 좌우로 굴리는 혜수를 보며 도영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에 택시 기사가 움찔했지만, 도영은 개의치 않고 한참을 더 웃었다.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하하, 여전히 기분 좋은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도영이다.


“하지만 오늘 약혼하셨잖아요.”

시무룩한 표정의 혜수를 보며 도영은 또 쿡 웃었다.


“기분 좋은데.”

“왜요?”

“선생이 내 일을 신경 썼다니.”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경 쓰지 마.”

“어째서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약혼녀가 있는 남자와 마음을 나누다니, 이건 정말 부도덕한 일이다.

심지어 상대가 주기철의 집안사람에다가 그 약혼녀는 조병억의 집안사람이다. 이러다가 내 이름이 뉴스에 나올지도 모른다.


“그건…….”

말을 이으려던 도영이 택시 기사를 힐긋 쳐다보고는 목소리를 더욱 낮춘다.


“네 달만 기다려 줄 순 없을까.”

“네 달이요?”

네 달……? 왜 하필 네 달이지?

순간 그때쯤 시도지사 선거가 있는 게 떠올랐다.


“혹시 선거와 관련 있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도영은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맞아. 그때가 되면 모든 게 없던 일이 될 거야.”

“아.”

설마 이거 계약 결혼, 아니 계약 약혼 같은 건가.

역시, 국회의원과 한대 병원의 병원장 정도의 집안이면 그 자녀들의 결혼은 사랑만 있어서는 안 되나 보구나.


‘드라마 같네.’

하지만 허울뿐이라 해도 도영을 바라보는 유민의 눈빛은 강렬했다.


‘조 선생님의 그 눈빛도 계약이라 할 수 있을까? 진심처럼 보이던데.’

또 눈알만 굴리는 혜수를 보며 도영이 손에 더욱 힘을 줬다.


“교수님.”

“왜.”

“오른손에 힘을 주면 안 되잖아요.”

걱정스러운 마음에 손을 털어내 보려 했지만 도영은 힘을 풀지 않았다.

서울로 오는 그 긴 시간 동안 도영은 혜수의 손을 잠시도 놔주지 않았다.
 

늦은 밤, 택시는 혜수의 원룸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앞에 도착했다.

따라내리는 도영에게 혜수는 바로 타고 집으로 가라고 만류했지만 도영은 끝끝내 같이 내렸다. 혜수를 붙잡은 손의 힘은 여전히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 같이 내리세요.”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가지.”

“시간이 늦었어요. 가서 쉬세요.”

“병원에 가서 잘 거야.”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까진 없어요.”

“내가 하고 싶어.”

“괜찮다니까요.”

“글쎄. 이러는 시간에 집에 가는 게 빠르겠어.”

아무래도 도영은 혜수의 집 앞까지 가는 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나 보다.


“가자. 어디야?”

먼저 걸음을 옮기며 혜수의 손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준다. 결국 혜수는 도영을 따라 발을 옮겼다.


“팔 아프지 않아요?”

“전혀. 아무렇지 않아.”

그 말과 함께 도영의 손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간다.


‘오른손인데.’

혜수는 고민에 빠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남녀가 손을 잡는 행위겠지만 도영에게는 절대 가벼이 여길 수 없는 행동이다.


‘교수님이 평소 잘 쓰지 않는 오른손으로 나를 강하게 붙잡는다는 것. 다른 사람들이 쉽게 손을 잡는 것과는 분명히 다를 텐데.’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른다.


‘설마 교수님도 나를……?’

혜수는 숨을 훅 들이켰다.
 

건물에 다 와갈 무렵 혜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슬쩍 꺼내보니 화면에 적힌 이름은 ‘승원 오빠’.

아마 승원은 혜수가 잘 오고 있는지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받자니 고민이 된다.


‘받아? 말아?’

지금 도영의 앞에서 승원과 대화를 하게 된다면 사촌 지간 임을 밝히게 된다.


‘그래도 될까?’

그도 그럴 것이 혜수는 그동안 승원은 죽어도 모르는 사이라고 도영에게 딱 잡아떼왔다. 아까 유민과 넷이서 밥을 먹을 때도 승원을 단순한 교수님으로 대하기만 했다.


‘그냥 말할까?’

도영에게 말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도영과 승원은 친한 친구 사이니 더욱 거리낄 게 없다.


‘하지만 그러면 여태 거짓말 한 셈이 되는데.’

도영을 세 번째로 만났던 날, 병원의 카페에서 제 귀에 속삭였던 것이 기억난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하던 것을.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선득한 느낌은 지금도 선명하다.

물론 지금은 도영이 그때처럼 알 수 없는, 무서운 사람은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가까워진 만큼 그를 속였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더 크게 느껴진다.


‘너무 오랜 기간 속였어. 어쩌지.’

망설이는 사이 전화는 끊어져 버렸다.


“전화 안 받아?”

“아, 안 받아도 돼요.”

혜수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지금은 타이밍을 놓쳐버렸어. 조만간 꼭 말하자. 상황 설명을 차근히 하면 이해해 주실 거야. 이렇게 갑작스레 말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지.’

조금 뒤, 혜수는 원룸들이 모여있는 5층짜리 작은 빌라를 가리켰다.


“저 건물이에요.”

“몇 층?”

“3층이에요.”

“흐음.”

도영은 건물을 위아래로 한참 살폈다.


“너무 외진 데 있군.”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괜찮아요.”

둘은 곧 건물 앞에 도착했다. 혜수는 계단 위로 올라섰다.


“가볼게요.”

“들어가서 쉬어.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할 텐데.”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교수님도 얼른 가셔서 쉬세요. 그럼 전 올라가 볼게요.”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뒤돌아 서려 했을 때, 도영이 다시 혜수를 부른다.


“잠시만.”

“네?”

도영이 가까이 다가와 혜수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역시나 오른손이다. 행동은 크고 과감해 그 손짓에 담긴 의미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혜수는 콩닥이는 마음을 꾹 눌러 담고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교수님, 왜 그러세요?”

“이 말 해주고 싶어서.”

잠깐 뜸을 들인 도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조유민과 관련된 이야기는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있을까?”

이 말까지 듣고 나니 더욱 궁금하다.

지금 교수님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하시는 걸까? 내가 조 선생님을 신경 쓰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 정말 내가 교수님께 특별한 사람이란 뜻일까? 그래서 자꾸 손을 잡아주는 건가?

그런데 내가 왜? 내가 그렇게 매력이 있었던가?

아, 모르겠어. 교수님의 마음이 궁금해.

뒤죽박죽인 머릿속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커다란 의문이 되었다. 그리고 혜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로 결심했다.


“교수님.”

“응?”

되묻는 도영의 눈에는 다정함이 한껏 서려 있어 혜수는 조금 더 용기를 얻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래. 뭐지?”

혜수가 단단히 얽힌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이거요.”

혜수의 눈짓에 도영도 마주 잡은 손을 바라본다.


“응. 말해.”

“설마 교수님이 절 조, 조…….”

그런데, 호기롭게 말은 꺼냈으나 차마 ‘좋아한다’는 단어는 뱉지 못하겠다. 김칫국이라도 거하게 마신 거면 그 쪽팔림을 어쩌냔 말이다.


‘나 너무 성급했나?’

잘못 짚은 거면 교수님 얼굴을 앞으로 어떻게 보지. 최악의 상황이 되면 병원을 관둬야 할지도 몰라.

생각할수록 조급했다는 후회만 든다.


“그, 그러니까.”

“?”

도영은 계속해서 저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다.


‘어쩌지, 어떡해.’

잠시 뒤, 혜수는 침을 한번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교수님이 절 조, 조…….”

도영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 혜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조지고 싶으신 건가요?”

“뭐?”

“아니면 조, 조인트를 까고 싶으세요?”

잠깐 멍하니 서 있던 도영이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한참을 배를 잡고 웃던 도영은 혜수의 시뻘게진 볼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역시 넌 늘 내 예상 밖이야.”

“…….”

“그런데. 그 말 하려던 것 맞아?”

“……예에.”

점점 달아올라 이제는 홍당무가 된 혜수의 얼굴을 보며 도영은 말갛게 웃었다.


“내 생각엔 그 질문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도영은 망설임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맞아. 내가 너 좋아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