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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손잡아 줘 (46/110)


46. 손잡아 줘
2022.07.09.


혜수는 정신없이 뛰었다.


‘어디야, 어느 나무였지?’

운동장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던 혜수는 마침내 도영을 찾았다.


‘저기다!’

도영을 향해 전력을 다해 뛰었다. 우산을 쓰는 둥 마는 둥 해 비가 안으로 전부 들어왔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교수님!”

나무 아래로 뛰어드는 혜수를 본 도영이 눈을 치켜뜬다.


“신 선생?”

“교수님! 괜찮으세요?”

“여긴 어떻게 왔어?”

“혹시 또 아프신 거예요?”

“아,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혜수는 도영의 오른팔을 덥썩 잡았다. 푹 젖은 팔을 샅샅이 더듬었다. 또 제멋대로 수축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폈다.


“어떡해요. 여긴 병원도 아닌데!”

작은 손이 쉴새 없이 도영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제 손의 두 배는 돼 보이는 도영의 손바닥을 앞뒤로 뒤집어도 보고 팔꿈치 관절이며 근육까지 꼼꼼히 살핀다.


“…….”

도영은 눈만 깜빡이며 혜수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행이에요, 지금은 괜찮으신 거……!”

순간 정신을 차린 혜수는 화들짝 도영의 몸에서 손을 뗐다. 대뜸 나타나 말도 없이 주물럭댄 것을 깨달은 것이다.


“죄, 죄송해요. 아프신 줄 알고.”

“…….”

“괜찮으신 거예요?”

그런데, 도영이 미간을 살풋 찌푸리며 다시 오른팔을 잡는다. 약한 신음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읏……. 아파.”

“!”

혜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영의 팔을 다시 잡았다. 혹여나 추우면 증상이 더 심해질까 한 손으로는 도영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팔을 위아래로 쓸어줬다.


“이러면 좀 나으세요?”

혜수의 손이 닿자 도영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그렇네.”

혜수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다행이다. 내 체온이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니까.


“그러니까 그 비를 다 맞으시면 어떡해요!”

“봤어?”

“네. 왜 내리셨어요? 볼일이 남으신 거예요? 약은요? 약 갖고 계세요?”

“볼 일은 없어. 약은 있어. 아직 먹을 정도는 아니라 먹지 않았고.”

도영의 차분한 대답에 혜수는 또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악의 상태는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왜 혼자 내리신 거예요? 조유민 선생님은 어쩌시고요.”

“…….”

유민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눈에 띄게 도영의 인상이 험악해진다.


“고, 곤란하시면 대답 안 해주셔도 돼요.”

‘두 분 산책하다가 싸우기라도 하셨나?’

아까 도영이 내렸던 차는 차들 중에서도 제일 크고 번쩍였던 게 떠오른다. 아마도 주기철 후보의 차가 아닐까.


‘그럼 아버지랑 싸우신 건가?’

도영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그렇게 혜수는 도영의 손을 잡은 채 한동안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쏴아아아,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세차게 비가 내리는 소리만 들린다.

그런데, 도영의 손이 점점 의식된다. 계속 붙잡고 있자니 부끄러워진 탓이다.

물론 처음 도영의 손을 잡은 것은 아니다. 예전에 도영의 방에서도 이렇게 접촉한 적이 있으니.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지금은 도영이 제정신이지 않나.


“저, 교수님.”

“음?”

“이제 좀 괜찮으세요?”

“그럭저럭.”

“그, 그럼 손 놓을게요.”

혜수가 도영의 손을 잡았던 손에 힘을 풀고 슬며시 제 팔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으…….”

약한 신음과 함께 도영이 또 인상을 쓴다.


“헉, 아프세요?”

“잡아줘.”

혜수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도영이 손을 쓱 내민다.


“손잡아 줘. 잡아주면 확실히 덜 아파.”

아프다고 얼굴을 찌푸리는데 말은 너무 또박또박 정확하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혜수가 간호해 줬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손이 전혀 떨리고 있지 않다.


‘아까부터 근육이 수축하지는 않았는데. 진짜 아픈 게 맞나?’

혜수가 머뭇대자 도영이 먼저 혜수의 손을 잡아챘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작고 보드라운 손을 감싸 쥔다.


‘!’

놀라 눈을 키우는 혜수를 보며 도영이 씨익 웃었다. 혜수가 처음 보는 장난기가 담긴 웃음이다.


 


“언제 또 통증이 올지 모르니 계속 이러고 있으면 좋겠는데.”

“아, 그, 네…….”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에 잠자코 있기는 한데 속이 탄다.

맞닿은 손이 너무 뜨겁다. 온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열기가 혜수의 손등을, 팔을 타고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콩콩콩, 심장이 끊임없이 두근댄다. 도영과 키스했던 꿈이 절로 기억나면서 얼굴까지 화끈한다.

여기가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운동장이라 다행이다. 밝았더라면 틀림없이 새빨간 얼굴을 들켰으리라.


‘혜수야, 진정해. 꿈은 이제 잊어버려.’

그렇게 얼마나 손을 잡고 서 있었을까.

혜수의 휴대폰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가 뜨는 걸로 보아 택시 기사인가 보다. 혜수는 전화를 받았다. 한 손은 여전히 도영의 손을 잡은 채.


“여보세요?”

-택시 부른 분 맞죠?

“맞아요. 도착하셨어요?”

-도착은 했는데 여기로 좀 나와줘야겠어요. 여기 산에서 토사가 흘러내려서 차가 못 지나가.

“아.”

-어떻게든 가볼랬는데 도저히 안 되겠네. 외길이니까 찾기는 쉬워. 길 따라 살살 내려와 봐요. 1킬로 좀 안 돼요.

“그럴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전화를 끊은 혜수는 도영을 바라보았다.


“교수님, 집에는 어떻게 가실 거예요? 택시 부른 게 왔는데 혹시 같이 가실래요? 대신 좀 걸어 나가야 해요.”

“한 교수는?”

“한승원 교수님은 서울에 있는 병원에 환자랑 같이 가셨어요. 서울까지 환자를 이송해야 해서요. 그래서 지금은 저 혼자에요.”

아, 하던 도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같이 가.”

“네. 그럼 가기 전에 전화 좀 할게요. 보육원에 인사를 못 해서요.”

“그래.”

혜수는 보육원에 전화를 해 여차 저차해 택시를 불렀고 지금 간다고 말을 했다. 직원은 간식을 못 챙겨줬다며 아쉬워했고 혜수는 다음을 기약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 가요.”

혜수는 우산을 펴고 나무 아래를 나왔다. 도영이 우산 아래로 들어오자 우산이 꽉 찬다.

도영의 키에 맞추려니 팔을 한껏 치켜들어야 했다. 그러자 도영이 우산을 가져간다. 커다란 손은 손쉽게 우산을 받쳐 들었다.


“내가 들지.”

둘은 그렇게 나란히 빗속을 걸어갔다. 여전히 손은 맞잡은 채.

문득 예전 도영의 연구실에 갈 때 썼던 혜수의 작은 연분홍 꽃무늬 우산이 기억났다.


“그래도 지난번 우산보다는 훨씬 크네요.”

초경량으로 만들어진 꽃무늬 우산은 그 비바람에 결국 부서졌다. 다음 날 혜수는 쓸 수 없게 된 우산을 쓰레기통에 버렸고, 대신 도영이 새 우산을 사주었다. 지금 쓰고 있는 도영과 혜수가 쓰고 있는 이 검은 장우산 말이다.

무슨 기준으로 우산을 골랐는지 튼튼하기 짝이 없게 생겼다. 태풍이 와도 끄떡없을 것처럼 견고했다.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림조차 없다.


“신기해요.”

혜수가 작게 웃자 도영이 묻는다.


“뭐가?”

“새로운 우산도 교수님과 같이 쓰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이 우산 오늘이 첫 개시에요.”

도영도 피식 웃는다.


“그것참 영광이군.”

택시까지 걸어가는 길은 온통 어둠이었다. 세찬 비가 투둑, 투둑 우산을 때리는 소리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많이 어둡네요.”

“가로등이 없어서.”

먹구름이 잔뜩 낀 데다가 비가 폭포처럼 쏟아져 겨우 코앞을 분간할 정도로 시야가 좁았다. 게다가 토사가 흘러내렸다더니 발에는 돌이 자꾸 채인다.


“발 조심하세요.”

“선생이야말로.”

“넵.”

하지만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혜수가 커다란 돌 하나를 헛디뎠다.


“으아악.”

“신 선생!”

휘청하며 뒤로 넘어가려는 찰나 도영이 혜수를 붙잡아 주었다.


“조심해야지.”

“윽, 돌을 잘못 밟았어요.”

“천천히 일어나 봐.”

“감사합니다.”

도영의 부축 덕에 혜수는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런데, 혜수가 곧게 서고 나서도 도영이 팔을 물리지 않는다. 오히려 팔로 강하게 혜수의 등을 감싸 제 쪽으로 당긴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충분히 가까이 붙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훨씬 가까워졌다.

콩콩콩. 거의 안기다시피 하고 있으니 조금 진정되나 싶던 심장이 다시 널을 뛰기 시작한다.


“이러고 가지.”

반면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덤덤한 말투의 도영이다. 또 이상한 건 나뿐이구나 싶다.


“넘어지면 안 되니까 꽉 잡아.”

“아. 그…….”

“다치면 내가 귀찮아져.”

“네, 네.”

“내게 기대. 얼마든지.”

“…….”

그렇게 도영은 오른손으로는 혜수의 손을 잡고 왼팔로는 혜수의 어깨를 감쌌다. 도영의 팔은 평소 아픈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탄탄했고 든든했다.

콩콩콩. 쉴 새 없이 심장이 뛰는 와중 도영에게서 온기가 전해진다.

이 깜깜하고 추운 곳에서 저를 지켜주는 단단한 벽과 같은 안정감.

그것은 그윽한 평안이었으며 따뜻한 위로였고 바라던 애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혜수는 자각했다.

도영의 약혼 소식 이후 자신의 기분이 울적했던 이유를. 반대로 지금은 날아갈 것 같은 이유를.


‘내가 교수님을…….’

쿵쿵쿵. 심장이 세차게 떤다. 도영의 팔과 맞닿은 어깨와 등, 그리고 도영의 손을 잡고 있는 손. 어디 하나 잠잠한, 얌전한 곳이 없다.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간지럽다.

정말로, 정말로 이곳이 이렇게 어두워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교수님이 내 얼굴을 보신다면 틀림없이 내 마음을 눈치채실 거야.’

혜수는 몸을 최대한 움츠리고 숨을 얕게 쉬었다.
 

저 멀리 비상등을 깜빡이고 있는 택시가 보인다. 택시 바로 앞에는 길을 군데군데 가로막고 있는 흙더미도 있다.


“조심해.”

혜수를 잡은 도영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교수님도요.”

흙더미 사이를 빠져나간 둘은 택시에 올라탔다. 우산 위로 퍼붓던 비가 이젠 차창을 두드린다.

자리에 앉은 혜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하아. 끝이다.’

마침내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도 안도감이지만 도영에게서 조금이나마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컸다. 조금만 더 도영에게 붙어 있었다간 숨이 막혔으리라.

늘어져 있는 혜수에게 택시 기사가 친절히 자신의 손수건과 휴지를 건네주었다.


“아이고, 그 길을 나오느라 고생이 많았네요.”

“감사합니다.”

“어디로 갈까요?”

“서울에 한대 병원 아세요?”

“알지요.”

“거기로 가주세요.”

그런데 목적지를 듣고 나서도 출발하지 않고 기사가 미적거린다.


“난 한 명이라 들었는데 두 명이네?”

흘깃 저를 쳐다보는 기사를 보고 도영이 대답했다.


“그렇게 됐습니다.”

“둘 다 서울 가는 거야?”

“네.”

“보자아. 그럼 비용이이. 여기가 시골이라아, 아무래도 서울이랑은 좀 달라가지고오.”

택시 기사가 노래를 부르듯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들어온 것도 있고 말이야. 비도 억수같이 오고 내가 신경을 좀 많이 써야 해.”

기사가 창밖을 가리켰다. 택시 위로는 양동이로 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비가 오고 있다.


“따블은 줘야겠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영이 지갑을 꺼내 수표 한 장을 기사에게 건넸다. 언뜻 보니 0이 길게 이어진다.


“반드시 안전하게 가주셔야 할 겁니다. 아무 일 없이, 무사히.”

금액을 확인한 택시 기사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이게 웬 횡재란 말인가. 몇 주는 놀고먹어도 되겠다.


“내 운전 경력 20년 베테랑이오. 금방 모셔다드리리다.”

 

서울로 올라오는 택시 안. 창문에 맺히던 빗방울을 세던 혜수는 시트에 기대 눈을 감았다.

잠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잠은커녕 머릿속은 점점 얽히고 또렷해져 있던 잠도 달아날 지경이었다.


‘왜 하필 교수님을.’

도영의 집에서 유민을 만났던 날, 도영과 키스를 하다가 유민에게 제대로 얻어맞는 꿈을 꿨었다. 그런 이상한 꿈을 꾼 이유를 이제 알겠다.


‘하아. 혜수야, 이건 안 되는 거야. 교수님한테는 조 선생님이 계시잖아.’

아까 식당에서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유민이 떠오른다. 어릴 적부터 도영을 혼자 좋아했었고, 마침내 이어져서 정말 기쁘다며 곱게 웃던 유민.

그런 유민을 참 좋아해 준다는, 서울 시장에 이어 대통령까지 유력하다는 도영의 아버지 기철.

그리고 도영과 유민의 결혼으로 양 집안에 날개를 달았다는 평가가 쏟아지던 기사들.

여러모로 보나 유민과 도영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생각할수록 이건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이 마음은 접어야 해. 더 깊어지기 전에 그만해, 신혜수.’

도영을 만난 이후로 줄곧 콩콩 울리던 심장이 이젠 멍하다. 피워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져야 하는 마음이 아릿하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비에 의한 산사태 주의 멘트가 나오며 알람 소리가 울린다. 애에에에에엥. 그 소리가 마치 혜수에게 보내는 경고 소리처럼 들렸다.

물러서. 피해. 이건 아니야.

혜수는 눈을 감고 씁쓸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썼다.


‘안다고. 알아, 나도.’

문득 한쪽 얼굴이 뜨끔하다. 눈을 슬쩍 떠보니 도영이 저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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