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오늘 약혼했어요
(4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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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오늘 약혼했어요
2022.07.06.
승원과 혜수는 구석에 있는 식탁에 가 앉았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혜수를 보며 승원은 걱정스레 말했다.
“많이 먹어, 혜수야.”
“응, 오빠도.”
혜수는 한숨을 조용히 내쉬며 숟가락을 들었다.
막 한술을 뜨려던 그때. 혜수의 바로 옆에 있던 의자가 들썩이더니 누군가 자리에 앉는다.
옆을 쳐다보니 유민이다. 당황해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유민이 상냥하게 묻는다.
“우리 여기서 같이 먹어도 되지?”
“……선생님.”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데, 유민의 뒤로 도영도 나타났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유민의 팔을 휙 잡아챈다.
“일어나. 딴 데 가서 먹어.”
하지만 유민은 도리어 의자를 더욱 바짝 식탁으로 당겼다.
“에이, 오빠. 같이 먹어요. 아버님은 기자들이랑 드셔야 하니까 같이 먹어도 되잖아요.”
“굳이. 따로 먹어.”
도영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에이, 오빠. 같은 병원 사람들인데 따로 먹는 것도 그림이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그래. 앉아, 도영아. 오랜만에 같이 먹자.”
승원도 웃으며 도영을 반겼다.
“거봐요. 한 교수님도 같이 드시재요. 우리 같이 먹어요, 네?”
“앉아, 도영아.”
결국 도영은 식판을 내려놓았고 4인용으로 만들어진 식탁은 빈자리 없이 채워졌다. 혜수와 유민이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는 승원과 도영이 앉게 되었다.
‘불편해.’
혜수는 묵묵히 숟가락만 움직였다.
딱히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도 없을 뿐더러 같이 있는 것이 너무 신경 쓰인다. 빨리 먹고 나가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하지만 유민은 다른가 보다.
“한 교수님, 혜수랑 친하세요? 어떻게 여기까지 같이 오셨어요?”
“음. 내가 여기 간다는 말을 신 선생이 우연히 들었나 봐. 같이 오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이번엔 데려와 본 거야. 일할 사람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러시구나. 대단하세요. 봉사활동도 다니시고.”
“뭘. 그런데 선생은 여기 어쩐 일이야?”
“그게…….”
유민이 상냥하게 웃는다. 얼굴에는 수줍음이 가득하다.
“사실 저희 오늘 약혼했어요.”
혜수의 젓가락에서 계란말이가 툭, 식판으로 떨어졌다.
“아! 기사는 봤는데 오늘인 줄은 몰랐네. 축하해, 조 선생. 진심으로 축하해, 도영아.”
축하의 말에도 도영은 별다른 말 없이 매서운 눈으로 승원을 쳐다보기만 했다. 대신 이번에도 유민이 대답한다.
“감사해요, 교수님. 오전에 약혼식하고 오는 길이에요. 약혼식을 기념할 만한 뜻깊은 일이 없을까 찾다가 이곳으로 온 거예요.”
“좋은 취지야.”
“제가 봉사활동을 하면 어떨까 말씀드렸는데, 다행히 좋다고 해주셔서요.”
“아.”
“아버님이.”
유민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아버님’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에는 넘치는 애정이 느껴졌다.
“그렇구나.”
“네, 아버님이 절 좋아해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벌써 아버님이랑 많이 가까워졌나 봐.”
“네. 가족끼리 자주 만나거든요. 특히 저희 아빠랑 아버님은 골프를 자주 치러 다니셔서요.”
“원래 아는 사이였던 거야?”
“네. 어릴 적부터 가족끼리 왕래했어요. 실은…….”
유민이 잠깐 뜸을 들인다.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오빠를 좋아했어요. 어릴 때부터 얼마나 멋졌다구요. 제 왕자님이셨어요.”
그 말과 함께 유민이 얼굴을 더욱 붉혔는데 그 모습은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를 앞에 둔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아버님이 제가 오빠에게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거라 해주셔서 너무 기뻐…….”
그때. 탁, 소리와 함께 도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민이 들고 있는 숟가락을 휙 잡아챈다.
“나와.”
“네?”
“밥 다 먹었으니 나오라고.”
하지만 도영의 식판은 조금도 줄지 않은 채였다. 유민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번엔 도영이 유민의 손목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유민의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오빠?”
“여기 밥 맛없어서 못 먹겠다. 나가자.”
도영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고 잠깐 생각하던 유민은 활짝 웃었다.
“그래요. 나가요, 우리. 대신 산책이라도 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영은 유민의 팔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둘은 식당에서 사라졌다.
혜수는 숟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식판을 보고 있었다.
기분이 너무 좋지 않다. 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렇게 있다가는 눈물이 흐를 것 같다.
“혜수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아.”
“아니야. 일은 무슨.”
혜수는 시큰한 눈을 비볐다.
“왜 가만히 있어. 얼른 밥 먹어. 그래야 좀 쉬지.”
“응. 알았어.”
“오후에는 환자들 더 많을 거야. 먹고 좀 쉬자. 여기 물도 마시고.”
승원이 그새 가져온 물컵을 내밀었다.
“고마워.”
혜수는 온 얼굴에 힘을 꽉 주고 최선을 다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떻게 밥을 다 먹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혜수는 다시 진료실로 꾸며진 방 안에 들어가 청진기를 들고 있었다.
환자들이 끝없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승원의 말대로 병원에 가기가 힘드니 아픈 것을 참았다가 한 번에 몰려오는 것이다.
길게 늘어진 줄을 보며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그때.
문이 쾅 열리며 보육원의 직원이 뛰쳐 들어왔다. 남수보다 더욱 나이가 들어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다.
“한 선생님! 큰일 났어요!”
“무슨 일입니까?”
“남수 씨가, 남수 씨가……. 계단에서 구, 굴러떨어져서 다, 다리가……!”
다리라는 소리에 승원이 벌떡 일어났다. 가뜩이나 다리를 수술했던 남수 아닌가.
“거기 어딥니까, 안내해 주세요.”
“오빠, 나도 같이 가.”
“그래.”
승원과 혜수는 잠깐 진료를 멈추고 직원을 따라 남수에게로 달려갔다.
“여깁니다!”
3층과 4층이 이어지는 중앙 계단의 한 가운데 남수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넘어지며 뒤틀린 발목을 붙잡은 채 끙끙대고 있다. 떨어지며 날카로운 것에 찔리기라도 했는지 주위에는 흐르는 피가 흥건하다.
“남수 씨, 정신 차려봐요!”
남수를 진찰한 승원은 당장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른 데는 괜찮은데. 지금 꺾인 곳이 하필 지난번 수술한 곳 바로 아래쪽이라 문제네.”
“수술해야 해?”
“응. 뼈도 문제고 출혈이 심해. 혜수야, 가서 스프린트랑 압박할 만한 것들 좀 가져올래?”
“알았어.”
잠시 뒤, 혜수가 가져온 재료들로 다리를 치료한 승원은 남수를 제 등에 업었다.
“내가 병원에 같이 보호자로 갔다 올게.”
승원은 시계를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3시간이면 될 거야. 그동안 혜수는 여기서 마저 진료 보고 있어. 알았지?”
“그럴게.”
혜수와 승원은 힘없이 축 늘어진 남수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로비에서 마침 보육원 건물로 들어오던 기철의 일행을 만났다. 기철의 옆에는 식당에서와 같이 도영과 유민, 그리고 기자들이 우르르 서 있었다.
승원의 등에 업혀 끙끙대는 남수를 본 기철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무슨 일입니까?”
“여기 관리인분인데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습니다. 병원에 가는 길입니다.”
“저런! 119를 불러드릴까요? 아니면 우리 아이들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까? 외과 의사입니다.”
기철이 도영과 유민을 가리킨다. 승원은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정형외과 전문의라.”
“아, 그렇습니까.”
“그럼 바빠서 이만.”
승원은 대충 대답해 준 뒤 다시 바삐 걸음을 옮겼고 혜수와 직원도 그 뒤를 따랐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기철도 곧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승원과 혜수를 쳐다보는 도영의 시선만이 길게 늘어졌다.
차에 남수를 태운 승원은 시동을 걸었다.
“혜수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알았지?”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
“금방 올게.”
직원과 남수를 태운 승원의 차는 곧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차가 완전히 사라지고 혜수는 다시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로비를 가득 채웠던 기철의 일행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혜수도 다시 진료실로 가 환자들을 보기 시작했다.
승원이 없으니 더욱 바빴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줄도 모르겠다. 마침내 마지막 환자까지 다 본 혜수는 팔을 쭉 폈다.
“하아, 다 했다. 오빠는 언제 오는 거지.”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해가 져 어둑하다. 여전히 거센 빗방울이 사위를 더욱 깜깜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직도 비가 오네.’
온통 어두운 가운데 저 멀리 자동차에서 나오는 라이트 불빛이 줄줄이 이어진다. 노인 요양원 앞에 세워져 있던 커다란 검은 세단들이 줄줄이 시설을 빠져나가는 게 보인다. 일정이 다 끝난 기철의 일행이 돌아가는 것이다.
‘저 차 중 하나에 주 교수님이랑 조 선생님이 같이 타고 있겠지.’
또 가슴이 답답하다. 혜수는 가슴을 팡팡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왜 이래, 정말.’
그런데, 차 한 대가 끽 소리를 내며 멈춘다.
곧 뒷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렸다. 세찬 비 속에 우산도 없이 내린 남자는 문을 쾅 닫았다. 차 안에 있는 사람과 다투기라도 한 듯 차 문을 닫는 손길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멀리서도 혜수는 알아볼 수 있었다. 커다란 키에 큰 체격, 빈틈없이 위로 빗어넘긴 검은 머리카락.
“……주 교수님?”
도영은 그 비를 다 맞았다. 입고 있던 옷은 금세 젖어갔다. 바짝 올라가 있던 머리카락 역시 아래로 흩어졌다.
멈췄던 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출발했다. 이 깜깜한 빗속에 우산도 없는 도영을 홀로 남겨둔 채.
‘왜 혼자 내리셨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진료실 문이 열리며 한 직원이 다가왔다.
“선생님, 고생 많으셨어요. 간식 좀 가져다드릴게요. 한 선생님 기다리시면서 드세요.”
“네, 부탁드릴게요.”
혜수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새 도영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웠었는데 자동차의 라이트가 사라지자 바깥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가셨지?’
눈을 크게 뜨고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교수님 비 맞으면 안 되는데.’
차가운 온도가 근육 질환에 좋지 않다는 것은 꼬꼬마 의사인 혜수도 안다. 특히 그런 경련성 질환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디 계신 거야?’
운동장과 주차장을 훑으며 도영을 찾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승원이었다. 혜수는 눈은 운동장에 계속 고정한 채 전화를 받았다.
“오빠. 어떻게 됐어? 수술 들어갔어?”
곤란한 듯한 승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혜수야, 어떡하지?
“왜? 무슨 일이야?”
-여기서 수술 못 하겠어.
“헉, 왜?”
-수술 순서가 많이 밀려. 수술실이 하나뿐이래. 아무래도 서울로 가야겠어.
“그럼 빨리 가야지! 블리딩(bleeding:출혈) 꽤 심하던데.”
남수의 다리에서 나던 피는 단순히 피부가 찢어져서 나는 피가 아니었다. 아마 안에 있는 꽤 커다란 혈관 중 하나가 손상을 입었으리라.
-지금 피는 달고 있어서 시간은 좀 벌었어. 그런데……. 서울에 내가 같이 가야 해.
“오빠가?”
-응. 남수 씨 과거 병력이 복잡한 데다가 다친 발목 바로 위 티비아(tibia:경골)에 수술을 한 적이 있잖아. 그쪽 병원에다가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직원은 못 알아듣겠대. 나도 불안해서 둘만은 못 남겨놓겠고.
승원을 따라간 직원은 남수보다 더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다. 남수를 부축하는 데에도 허둥지둥하여 몇 번이나 손길이 미끄러졌었다.
-그래서 내가 가야겠는데 어떡하지?
혜수는 흔쾌히 대답했다.
“괜찮아, 오빠! 남수 씨랑 같이 서울 가. 난 버스 타고 가면 돼.”
여기 오는 길에 버스정류장을 본 것이 기억난다. 날은 어두워도 아직 7시도 채 되기 전이니 버스가 끊기진 않았을 거다.
-아니야, 혜수야. 내가 택시 보낼게. 그거 타고 서울로 와. 응?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그래야 내가 마음이 편해. 그렇게 해. 알겠지? 내가 기사 아저씨한테 네 전화번호 줄게. 도착하면 전화 갈 거야. 그거 타고 와.
“음, 알았어, 그럴게.”
-조심해서 가고 집에 가면 연락 줘야 해.
“알았어. 걱정 마.”
줄줄이 이어지는 승원의 걱정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는 그때.
“어! 교수님이다!”
운동장 한쪽 끝, 커다란 나무 아래 도영이 서 있는 게 보인다. 점점 세지는 비를 피하러 나무 아래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런데 드디어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무언가 이상하다.
‘교수님 자세가 왜 저래?’
도영이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왼팔로 오른팔을 감싸고 있다.
“어? 설마!”
서늘한 공기, 장대비를 맞은 도영, 움켜쥔 오른팔.
자동으로 머릿속에 그가 아파하던 장면이 재현되었다. 제멋대로 수축하던 근육들과 정신을 놓을 정도로 심한 고통을 느끼던 도영.
“세상에! 안 돼!”
혜수는 진료실을 박차고 나갔다. 뛰던 도중 쟁반 위에 빵이며 음료수를 올려 들고 오던 직원을 마주쳤다.
“엇. 선생님, 어디 가세요?”
하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선생님?”
어리둥절한 표정의 직원을 지나 건물을 뛰쳐나갔다. 간신히 우산만을 챙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