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내 마음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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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내 마음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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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내 마음의 방향
2022.07.02.
본격적으로 장마철이 되면서 일주일의 대부분은 비가 왔다. 모처럼 주말이라 외출을 하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또 비가 온다.
‘올여름은 정말 비가 많이 오네.’
투둑, 투둑. 집 밖을 나서는데 사방이 어둑하다. 장대비는 아니지만 부슬부슬한 게 분위기가 영 좋지는 않다. 혜수는 우산을 펴고 타박타박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 걸어 큰 차가 다닐 수 있는 골목으로 나가자 승원의 하얀 차가 보인다. 혜수를 발견한 승원이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웃는다.
“얼른 와.”
혜수는 우산의 물기를 털어내고 차에 올라탔다.
“언제 왔어? 많이 기다렸어?”
“아니. 조금 전에. 이제 가자.”
승원은 능숙하게 차를 몰아 골목을 빠져나갔다.
서울 외곽으로 달린 차는 어느덧 경기도의 한 시골 마을에 다다랐다.
“어디쯤 왔어? 다 와가?”
“거의. 조금만 더 가면 돼.”
차는 점점 산에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창문에 굵은 빗방울이 스친다. 습한 풀 내음이 차 안까지 스며든다.
“꽤 외진 데 있네.”
버스 정류장도 여기까지 오는데 단 하나만을 봤을 정도고 오가는 택시며 차들도 별로 없다.
“좀 그렇지? 전에 물어봤더니 땅값 때문에 점점 밖으로 밀려난다더라.”
“하긴. 아무래도 도심으로 갈수록 많이 비싸질 테니 큰 시설은 밀려날 수밖에 없겠네. 여긴 차 없으면 다니기 힘들겠다.”
“맞아.”
“오빠는 여기 자주 와?”
“음. 보통은 한 달에 한 번? 많이 바쁠 땐 두 달 정도 건너뛸 때도 있었어. 조금 더 자주 와야 하는데.”
“에이, 그것도 정말 대단한 건데.”
혜수의 칭찬에 승원은 멋쩍게 웃었다.
“그런가.”
차는 곧 여러 개의 건물이 한데 모여 있는 부지에 도착했다.
그들이 간 곳은 보육원과 노인 요양원, 노숙인 재활 시설이 한데 모여 있는 커다란 공동체 마을이었다.
“여기야? 생각보다 크네.”
승원과 혜수는 차에서 내려 제일 가까이 있는 보육원 건물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보육원의 관리인으로 보이는 머리가 희끗한 한 노인이 나왔다.
“한 선생님. 어서 오세요.”
환히 웃으며 인사한 노인은 혜수를 보고도 반가운 기색을 비췄다.
“아이구, 오늘은 다른 분도 오셨네요?”
“네. 여긴 외과의사예요. 아직 1년 차 레지던트지만 솜씨는 좋아요.”
혜수는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신혜수입니다.”
“어서 오세요. 전 김남수요.”
남수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혜수는 승원과 함께 1층에 마련된 임시 진료실로 갔다.
걸어가는 내내 남수는 승원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이곳 노숙인 재활센터 출신이라는 남수는 승원에게 꽤나 고마움을 가진 듯했다.
“한 선생님은 제 은인입니다.”
승원은 교수로 발령을 받은 이후 틈틈이 이 보육원을 찾아 봉사활동을 해왔다. 다리를 절뚝대며 센터 생활을 하는 남수에게 승원이 처음 병명을 진단하고 수술을 권해주었다. 돈이 없어 망설이는 남수에게 수술비도 보태줬다고. 수술을 하고 재활에 성공한 남수는 이곳에서 일자리까지 얻었다고 했다.
“덕분에 제가 많이 좋아졌죠. 희망도 얻었구요. 우리 한 선생님 덕분이죠.”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연이은 칭찬 세례에 승원이 머리를 긁으며 웃는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랑 어르신들도 많이 건강해졌어요. 병원은 여기서도 늘 차를 타고 몇 시간이나 나가야 해서 큰 병 아닌 이상 아픈 건 참고 그랬어요.”
“그렇겠네요.”
“네. 특히 애들은 뛰고 구르는 탓에 얼마나 잘 다치는지. 한 선생님이 잘 봐주셔서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을 보니 그동안 열심히 해왔나 보다.
“오올, 오빠 대단한데?”
혜수는 승원을 보며 샐쭉하게 웃었다. 그러자 남수가 묻는다.
“혹시 두 분 부부입니까?”
“에?”
당황해하는 혜수를 보며 남수가 더욱 짓궂게 웃는다.
“아니면 한 선생님 애인이신가?”
“예에?”
혜수는 손을 격하게 내저었다.
“아니에요. 전혀. 사촌 오빠예요. 전 엄마 딸, 이분은 엄마 언니의 아들. 아이, 오빠. 왜 가만히 듣고만 있어.”
연인이냐는 말에도 해명을 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승원을 쿡 찔렀다.
“아이고, 그러시구나. 미안해요. 하나도 안 닮아가지고 내가 실수를 했네.”
“하핫, 괜찮아요.”
곰곰이 승원의 얼굴을 뜯어보니 정말 저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안 닮았다 생각은 했는데…….’
큰 체격 하며 얇은 쌍꺼풀이 진 긴 눈, 오뚝한 코, 작은 얼굴을 가진 승원은 혜수와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다. 혜수의 엄마 지영과 승원의 엄마 지선은 서로 꽤 닮았는데도 불구하고.
남수도 그 생각을 했나 보다.
“서로 아빠를 많이 닮았나 보구먼.”
“그런가 봐요.”
“그래도 두 분 다 의사가 되셨으니 머리가 좋은 건 닮았나 보네.”
“아하하…….”
이곳에 처음 온 혜수의 긴장을 좀 풀어주려는 건지 남수의 객쩍은 소리가 계속되었다.
진료실은 북적북적했다. 승원이 왔다는 소식에 시설에 거주하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몰려들었다.
“아이고, 선생님. 얼마나 기다렸다고. 여기 좀 얼른 봐줘.”
“선생님! 배 아파요. 호 해주세요.”
오전 내내 바쁘게 진료를 본 혜수는 환자가 빈틈을 타 밖으로 나왔다.
밖은 아직 비가 거세게 오고 있었다. 평소 아이들이 뛰어놀 운동장 곳곳에는 물웅덩이가 깊게 만들어져 있다.
혜수는 건물 입구로 이어지는 계단에 걸터앉아 조금씩 숨을 끊어 내쉬었다. 우중충한 하늘을 보니 답답함이 다시 느껴진 탓이다.
“하아…….”
승원과 즐겁게 이야기할 때나 환자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낄 때는 잠시 잊을 수 있었는데, 혼자 있으니 또 울적해진다.
“흐으…….”
요즘 혜수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글프고 허전한 마음에 밥을 건너뛰기도 일쑤였다. 더군다나 이렇게 비까지 오는 날이면 더욱 기분이 좋지 않다.
‘내가 요즘 왜 이러지.’
심호흡도 해보고 재밌었던 일도 떠올려 보았지만 어떻게 해도 착잡한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만 하릴없이 보고 있는데 위에서 누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혜수야, 여기서 뭐 해?”
“오빠.”
승원이 옆에 와 서 있다. 혜수는 계단에서 일어나 흙이 묻은 엉덩이를 털어냈다.
“오빠 환자도 다 끝났어?”
“응. 오전은 이걸로 끝. 밥 먹자. 점심시간이야.”
“그래? 가자.”
“식당은 여기 말고 노인 요양원 건물로 가면 돼. 아이들은 일찍 먹어서 벌써 밥을 다 먹었어.”
“응. 나 우산 가져올게.”
“그냥 이거 같이 써.”
“그럴까.”
혜수는 승원의 우산을 같이 나눠 쓰고 식당으로 향했다.
“사람들 위생 상태가 괜찮네. 아이들도 밝고 깔끔해.”
“그렇지? 이런 시설은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지. 관리가 나름 잘 되는 곳이야.”
“오길 잘했다. 집에 있었으면 재미없었을 거야.”
“다행이네.”
승원에게는 재미없다고 표현했지만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비도 오는데 혼자 집에 있었다면 많이 슬펐으리라.
“그럼 앞으로 종종 같이 올래?”
“그래, 좋아.”
혜수의 대답에 승원이 머리를 또 쓰다듬어 주었다.
요양원까지는 꽤 걸어가야 했다. 승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는데 주위에서 자꾸 말을 붙인다. 마주치는 직원들과 시설 사람들 모두 승원에게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한 선생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근데 이 여자분은 누구? 여자친구?”
“…….”
승원과 한 우산을 쓰고 있으니 모두들 지나가며 한마디씩 한다. 여자친구냐, 애인이냐, 결혼 상대냐 등등.
그럴 때마다 승원은 그냥 웃기만 했고 대신 혜수만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사촌 오빠예요. 사촌.”
“그래요? 잘 어울리는데 아쉽네요. 그런데 왜 이렇게 생판 남처럼 생겼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이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불쑥 말한다.
“그러게. 하나도 안 닮았다.”
뒤이어 만난 사람들도 한마디씩 한다.
“한 선생님 애인이세요?”
“아니요. 사촌 동생입니다!”
“오, 한 선생님 와이프?”
“아니요! 사촌 동생입니다!”
“한 선생님 여자친구?”
“아니요!”
마침내 둘만 있게 되고, 혜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왜 한숨을 쉬어.”
혜수는 발을 세게 쿵 내디뎠다.
“왜 다들 커플이냐 그러냐고. 씨잉.”
그러자 승원이 발걸음을 멈춘다. 갈색 눈이 곧게 혜수를 향한다.
“나랑 커플이면 싫어?”
“어?”
“커플로 엮이는 게 싫냐고. 왜 그렇게 입을 삐죽거려.”
“그런 뜻이 아니라!”
오늘따라 속이 상해 그런다. 기분이 안 좋은 와중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더 그렇다.
‘오빠는 대천사지만 나는 고작 꽃돼지란 말이야.’
승원과 같이 다니면 전혀 닮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어왔다. 문제는 승원과 닮지 않았다는 것이 꼭 승원처럼 잘난 얼굴이 아님을 확인받는 것 같다는 것이다.
‘나도 오빠 얼굴 잘생긴 거 안다고. 칫.’
그렇다고 오빠는 잘났는데 나는 못났다는 것처럼 들려서 싫다, 라고 사실대로 말하려니…… 그건 또 자존심이 살짝 상한다.
혜수는 몰랐다. 승원이 꽃돼지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혜수가 보이는 반응이 미치도록 귀여워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툭툭 나오는 것이라는걸.
“아니면 뭐?”
“복잡해. 묻지 마.”
혜수는 대답하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승원은 집요했다.
“응? 왜?”
“몰라, 모른다고.”
부풀어 오른 볼을 승원이 톡, 건드린다.
“싫지는 않다는 거지?”
“뭐라고?”
“우리 잘 어울린대. 어떻게 생각해?”
장난스럽게 씩 웃는 승원이다.
“으에엑. 뭐라는 거야!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혜수가 방방 뛰며 손을 휘젓자 승원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곧 요양원 건물에 도착했다. 그런데 건물 앞에 까만 세단들이 주르륵 주차되어 있다. 번쩍번쩍 커다란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비싼 차들이다.
“이렇게 좋은 차들이 여기 있네?”
“누가 왔나 봐. 여기 차는 아니야.”
“어디 높은 사람이라도 왔나.”
둘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식당으로 내려갔다.
막 점심 배식이 시작되었는지 직원들과 시설 입소자들이 한 데 섞여 식당 바깥까지 줄을 길게 서 있다. 혜수와 승원도 맨 뒤에 줄을 섰다.
“여기 음식도 꽤 맛있어. 재료들도 신선하고.”
“맛있겠다.”
드디어 식당 안으로 들어갔는데 웬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군데군데 서 있다. 그들은 배식구를 향해 연신 셔터를 누르는 중이었다.
“저 사람들 뭐지? 기자인가?”
“그런가 본데. 무슨 일이지?”
“여기 기사 내려고 왔나?”
그리고 배식구에 다다랐을 때. 혜수는 밥솥 앞에서 있는 사람을 보고 흠칫 놀랐다.
노란 앞치마를 매고 주걱을 들고 있는 인상 좋은 중년의 남자의 얼굴이 익숙해서다.
‘어디서 봤는데. TV에서 봤던가? 누구더라. 누구더라…….’
순간 번뜩 이름이 떠오른다. 혜수는 작게 외쳤다.
“주기철 의원님!”
혜수의 외침을 들은 기철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주걱을 들었다.
“맞아요. 알아봐 주니 고맙네요. 많이 먹어요.”
기철이 밥 한 주걱을 퍼 혜수의 식판에 담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기철 또한 봉사활동을 온 모양이라 생각하고 앞으로 이동했는데.
“헉!”
이번에는 목소리 조절을 하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치고 말았다.
“조……유민 선생님?”
유민도 노란 앞치마를 하고 집게를 든 채 계란말이를 배식하고 있었다. 유민도 혜수를 보고 꽤 놀란 듯했다. 눈을 커다랗게 뜬다.
“신 선생?”
“선생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난 봉사활동. 선생은 여기 웬일이야?”
유민이 물어봤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다.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기에.
‘의원님이랑 조 선생님이 여기 같이 있다는 건, 설마…….’
“응? 왜 온 거야?”
유민이 재차 물어 와 혜수는 겨우 대답해 주었다.
“봉사 활동하러 왔어요.”
“혼자서 여기까지 왔어?”
“아니요. 정형외과 한승원 교수님이 여기 오신대서 따라왔어요.”
“한 교수님이랑?”
유민이 고개를 쭉 내밀고 혜수의 뒤에 서 있는 승원을 보았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한 뒤 다시 혜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반갑다. 우리도 그러려고 왔는데. 그렇죠, 오빠?”
다정한 말과 함께 다음 배식구를 쳐다보고 활짝 웃는다.
‘오빠라고?’
그리고 유민을 따라 쳐다본 그곳에는.
정말로 도영이 있었다.
예전 도영의 집에서 봤던 것처럼 앞치마를 한 채 집게를 들고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