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맞닿다
(43/110)
43. 맞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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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맞닿다
2022.06.29.
이 공간엔 도영과 혜수 단둘뿐이다.
사방이 조용하다. 똑딱이던 시계도 멈춰버렸는지 들리지 않는다. 덕분에 혜수의 감각은 더욱 확장되었다.
등 뒤에서는 포근한 따뜻함이, 머리맡에서는 도영의 단단한 턱이 느껴진다. 기분 좋은 이 느낌은 영원할 것처럼 강했고, 진했다.
콩콩콩. 심장이 두근대고 전신에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콩콩콩. 혜수는 숨을 가만히 죽였다. 여기서 몸을 조금만 더 틀면 도영과 맞닿아 버릴 것 같았다.
“이 그릇 꺼내줘?”
“네…….”
도영의 긴 손가락은 손쉽게 그릇에 닿았고 그릇은 아래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릇을 내리고도 도영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혜수에게 바짝 붙은 채 그대로 서 있다.
콩콩콩. 발끝에서 시작된 화끈거림은 이제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콩콩콩.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이 박동하고 있어 이러다가는 곧 터질 것 같다.
안 되겠다 싶어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
“교수님, 왜 가만히 있으…….”
혜수는 정말로 주저앉을 뻔했다. 도영이 저를 뚫어질 듯 보고 있었기 때문에.
“교, 교수님?”
“…….”
도영은 아무런 대답 없이 혜수를 바라보았다.
“왜…….”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다. 도영은 아무 말 없이 손만 들어 올렸다.
매끈한 도영의 손가락이 혜수의 얼굴에 톡, 닿았다.
혜수의 갈색 머리카락을, 동그란 눈을, 티 하나 없는 뽀얀 뺨을 스쳤다. 찬찬히 아래로 내려간 손가락은 붉은 입술에 닿았다.
톡, 기다란 손가락이 입술을 지분거린다.
참을 수 없는 저릿함에 혜수는 눈을 감았고 그 순간. 도영이 바짝 다가왔다.
‘!’
도영의 호흡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심장이 쿵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혜수가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도영이 더욱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곧,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도영의 입술은 예상보다 훨씬 부드럽고 말캉했으며 따뜻했다. 온기를 품은 입술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뜨거워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혜수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도영은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산소가 부족해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혜수는 힘껏 손을 뻗어 도영을 밀어냈다.
“하아, 하아. 이제 그, 그만요.”
도영은 떨어져 나갔지만 저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더욱 짙어진 채다. 강렬한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금 전의 격한 입맞춤으로도 해소된 것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하아, 하아.”
혜수의 숨을 고르는 소리가 연신 주방에 퍼지던 그때.
띠리릭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에 이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빠, 나 왔어요.”
‘어?’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다. 분리되어 하늘을 둥둥 날던 이성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설마.’
혜수는 급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입술에 번들거리는 타액을 닦아냈다. 여전히 우뚝 서 있는 도영을 힘껏 밀어냈다.
그러자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조……유민 선생님.”
하얀 원피스 차림의 유민은 늘 그랬듯 세련되고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요리를 할 생각이었는지 한 손에는 명품 가방을, 다른 손에는 가득 찬 식료품 봉투를 들고 있었다.
“신 선생?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도영과 혜수를 번갈아 쳐다보던 유민이 아, 하고 작은 비명 소리를 냈다. 둘 사이에 흐르던 습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무언가를 떠올린 것이다.
유민의 커다란 눈은 더욱 커졌고 분홍빛 입술은 살짝 벌어졌다. 그리고, 늘 매끈한 모습만 보이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유민은 망설임 없이 사나운 걸음으로 혜수에게 다가왔다. 양손에 들고 있던 가방과 봉투를 내팽개친 유민은 도영과 혜수 사이로 파고들었다.
과격한 손짓으로 혜수를 잡아채고는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다.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그, 그게 아니라 선생님.”
크게 당황한 혜수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제 예상이 맞음을 직감한 유민이 손을 치켜든다.
“감히 어디서 여우 짓이야!”
찰싹, 소리와 함께 눈앞이 순간 하얘졌다. 고개가 휙 돌아갔다.
“윽.”
뺨에서 시작된 날카로운 아픔은 곧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눈물이 절로 맺히고 손발까지 저릿하다. 혜수는 눈물을 글썽이며 달아오른 뺨을 감싸 쥐었다.
‘아파.’
예리한 통증도 통증이지만 수치심과 억울함이 더해져 더 아팠고, 더 답답했고, 서러웠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유민의 분이 풀리지 않았나 보다.
유민은 혜수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내동댕이쳤다. 가느다란 몸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억센 힘에 혜수는 속절없이 주방 바닥으로 무너졌다.
“감히 네 주제에 어디서!”
연이은 주먹질이 위에서 쏟아진다. 혜수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아파. 내가 왜 맞아야 해? 아프다고! 하지 마, 하지 마!’
“그만해요, 하지 마세……!”
발버둥 치던 혜수는 번쩍 눈을 떴다.
사방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깜깜하다.
혜수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훔쳐냈다. 허우적대던 손발에도, 이마에도 식은땀이 잔뜩이다.
‘이거 다 꿈이야?’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몇 번 흔드니 조금씩 정신이 맑아진다.
‘맞아. 여긴 내 방이야.’
온통 고요한 가운데 벽에 걸린 낡은 플라스틱 시계에서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행이다. 모두 꿈이었구나. 하아. 물 마시고 싶어.'
어찌나 땀을 흘렸던지 목이 탔다. 혜수는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작은 원룸은 불 하나로도 방 전체가 환해졌다.
‘그런데 왜 주 교수님이랑 키, 키스하는 꿈을…….’
어찌나 리얼했던지 지금도 부드럽고 촉촉한 도영의 입술이 느껴지는 듯하다. 저를 향해 달려들던 꿈속의 도영이 자꾸 떠오른다. 그때의 그 분위기와 감정들이 이어져 또 얼굴이 화끈해진다.
‘정신 나갔나 봐!’
빨리 냉수를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겠다. 혜수는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냈다.
물을 마시려는데 아무렇게나 벗어던져 놓은 옷들과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어제 도영의 집에서 쫓겨나듯 나온 뒤 피곤해서 그냥 잤더니 이 모양이다.
‘꿈자리가 뒤숭숭한 걸 보니……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그렇게 기억에 남았나?’
어젯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얻어먹고 도영의 집을 나설 때였다.
“모레 뵐게요, 교수님. 아프지 마시구요.”
“같이 가. 데려다줄 테니.”
도영이 겉옷을 입으며 따라 나온다.
“에? 아니에요. 전혀 그러실 필요 없어요. 쉬세요.”
혜수는 손사래를 치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문 앞에 서 있던 사람과 부딪힐 뻔했다.
‘어? 조유민 선생님?’
그리고 유민의 뒤에는 유민의 아버지인 병원장 조병억이 서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던 건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다.
‘어어?’
혜수의 눈이 동그래짐과 동시에 유민도 눈을 크게 뜬다.
“신 선생?”
“누구……?”
병억이 고개를 갸웃한다. 혜수는 퍼뜩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한대 병원 외과 레지던트 신혜수인데요.”
“음?”
저를 불퉁하게 쳐다보는 눈빛에 혜수는 다급히 다음 말을 덧붙였다.
“다름이 아니라 서류를 가지러 잠깐 들른 거예요. 그럼 저,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혜수는 그렇게 도영의 빌라를 뛰쳐나왔다. 놀란 정신에 무슨 인사말을 외쳤는지도 모르겠고 병억이 어떤 대답을 해줬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혜수는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내가 왜 그랬지?’
죄를 지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 게다가 그 상황에서 말은 왜 더듬은 건지. 심지어 도망을 치다시피 나온 이유는 또 뭐람.
‘그 키스는 또 뭐야. 하아.’
차가운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벌렁거리는 심장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언론들은 일제히 시장 후보자 주기철의 외동아들 주도영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도영의 이름은 기철이 유명해진 이후로 종종 대중에게 공개되어 왔다. 기철의 아들 주도영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국의 미래 의학을 밝힐 멋진 인재라는 평가와 함께.
이번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주기철 시장 후보자의 아들 주도영, 한대 병원장 조병억의 장녀 조유민과 돌아오는 주말 모처에서 약혼식!
그로 인해 기철의 시장 당선은 더욱 확실해졌고, 추후 대선 주자로도 발돋움을 하게 되었다는 평가도 빼먹지 않고 따라붙었다.
연예인도, 정치인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익숙하게 도영의 기사를 받아들였다. 도영과 유민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잠깐 오르기도 했다.
병원도 도영과 유민의 이야기로 시끌시끌했다.
“소문이 사실이었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는 거 봤어?”
“크으, 둘이 정말 잘 어울린다.”
병동에 가도 응급실에 가도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도영의 이야기를 했다. 특히 혜수를 비롯한 외과 의국원들에게는 그들의 러브스토리를 알려달라는 요청들이 쇄도했다.
“언제부터 사귀었던 거래요?”
“조유민 선생님이 레지던트 들어오고 나서? 그때부터 썸 탄 거 아닐까? 으흣. 당직 때 빈 의국에서……? 꺄악!”
“신 선생님, 저희한테 얘기 좀 해줘요. 어떻게 둘이 연인이 됐는지.”
혜수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전 잘 몰라요.”
“에이, 조유민 선생님이 비밀로 하래요? 너무하다. 이렇게 기사까지 나왔는데 뭘 더 숨겨.”
“진짜 몰라요.”
정말로 아는 게 없는데 어쩌라고.
혜수는 왼쪽 가슴을 퍽퍽 치며 응급실을 나왔다.
가슴이 또 답답하다. 새벽에 그렇게 꿈에서 깬 뒤부터 여태 그렇다.
‘속이 또 왜 이러지.’
얼마 전부터 시작된 뭔가 콱 틀어막은 듯한 느낌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약을 먹어도 그때뿐이다.
혜수는 줄기차게 가슴을 두드리며 병동으로 올라갔다.
‘단순 소화불량? 아니면 GERD(역류성 식도염)? 설마…… MI(심근경색)는 아니겠지.’
한대 병원의 원장실. 병억은 20분째 큰 목소리로 통화 중이었다.
“아이고, 의원님. 이번 일은 정말로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오늘 약혼 기사가 나갈 줄이야. 허어, 이렇게 기자들이 선수를 쳐버릴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기철에게는 선거 전 날짜별로 정해둔 계획이 있었다. 원래라면 도영과 유민의 약혼 기사는 약혼식 진행 후 사진과 함께 기철 측에서 배포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군가 먼저 약혼 기사를 내버린 것이다.
그것 때문에 기철에게서 전화가 와 병억은 쩔쩔매며 변명을 하는 중이었다.
“예, 예. 의원님 뜻은 저도 아주 잘 알죠. 그래서 저도 더 유감입니다. 네, 네.”
귀를 파고드는 따가운 목소리에 병억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웃음소리를 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허허, 원래 소문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눈 깜짝할 새 퍼져나가더라고요. 어쩌면 호텔 쪽에서 새어나갔을 수도 있고요.”
딱 잡아떼는 병억의 말에 기철도 더는 말해도 소용없겠다 생각했나 보다. 정말 그러냐, 그럼 그렇게 알겠다며 말을 정리했다.
“네, 의원님. 그럼 주말에 뵙지요. 네, 네. 들어가십시오.”
전화가 끊기고 병억은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에잇, 퉤. 재수 없는 영감. 그거 일주일 더 빨리 냈다고 뭐가 문제라고.”
병억은 혀를 차며 서랍을 뒤적여 전자담배를 꺼냈다. 한 모금 깊게 빨아당기는데 문득 어제 찾아간 도영의 집에서 만난 레지던트가 떠오른다.
‘에잉, 어디서 이상한 게 튀어나와 가지고는. 이름이 뭐더라. 신…… 혜수?’
그 계집애는 도영과 단둘이 시간을 보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둘이 해 먹은 떡볶이 냄비와 아이스크림 컵이 식탁 위에 널려 있었다.
주도영이 쫓아내지도 않고 후식까지 챙겨 먹인 것이다.
‘천하의 그 주도영이.’
저와 유민을 발견하고 당황해하던 혜수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발그레하게 상기됐던 얼굴은 또 뭐란 말인가.
‘방해되는 건 미리 치워버려야 뒤탈이 없지.’
담배를 또 한 모금 빨아들인 병억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이번에는 즐겨 찾는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기사 잠잠해지지 않게 계속 내주는 것 잊지 마시오. 여태 입금한 게 얼만데. 아, 물론 그게 다가 아닌 거 알지? 내 보건복지부 장관만 되면 더욱 확실히 밀어줄 테니.”
그런 뒤에는 딸 유민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주 교수 쪽은 좀 더 신경 써야 하지 않겠니.
오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저 아시잖아요. 제가 언제 실망시켜드린 적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