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이 넓은 집에 단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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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이 넓은 집에 단둘이
2022.06.25.
“진짜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나 혼자서 절대 못 찾아갔어. 무섭단 말이야, 으으. 참, 교수님한테도 너랑 같이 간다 미리 말했어. 말 안 하고 가면 또 얼마나 성질을 낼지.”
“하하, 네.”
재성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혜수에게 도영이 무섭다, 같이 와줘서 고맙다를 반복했다.
‘교수님이 이렇게 무서워할 정도인가? ……아닌데.’
다른 레지던트들과 달리 혜수에게 도영은 그저 두렵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존경심이나 경외감 같은 긍정적인 느낌뿐만 아니라 특정한 단어로 지칭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유대감이나 친밀감과 비슷한 느낌이긴 했지만 이 또한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어감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조금 더 따스한, 고운 분홍빛이 스며들어 있다고나 할까.
혜수와 재성은 도영의 집 문 앞에 섰다.
벨을 누르자 도영이 나타났다. 병원에서 볼 수 있었던 슈트나 수술복 차림과는 다르게 슬랙스에 니트 티셔츠를 입고 있다.
평소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편안함이 느껴졌다. 얼굴색도 표정도 모두 멀쩡하다.
‘괜찮으신 건가?’
지금은 전혀 통증을 느끼지 않는 듯 보여 혜수는 한시름 놓았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여기에 싸인 받아 가려고 왔어요.”
재성은 문에 기대선 채 가방을 뒤적여 서류들을 내밀었다.
“이것도요. 빨리 회복하시라고 사 왔습니다.”
혜수도 마트에서 사 온 과일 봉지를 내밀었다. 도영은 서류와 과일을 받아들며 손짓했다.
“일단 둘 다 들어와. 서류를 좀 살펴야 하니.”
“정말요? 진짜 들어가도 돼요?”
재성은 애초에 도영의 집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의국에 있는 도영의 방에도 못 들어가는데 집이라고 가능할까. 여기에 이렇게 서 있다가 싸인을 다 하면 다시 받아 갈 계획이었다.
재성의 물음에 도영이 눈을 갸름하게 한다.
“그게 무슨 뜻이지?”
“아, 아닙니다! 얼른 들어가자, 혜수야.”
“네에, 네.”
재성이 혜수를 휙 잡아끌었고 그렇게 둘은 도영의 집 안에 발을 들이게 됐다.
도영의 집은 무척 넓었다. 빌라 정문부터 범상치 않다 생각했지만 내부는 더 고급스러웠다. 커다란 거실에는 값어치가 꽤 나가 보이는 가죽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는.
‘여기에도 운동 기구가 많네.’
도영의 집 곳곳에는 운동 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병원에 있는 도영의 방과 마찬가지로 재활용 기구들부터 근력 강화 기구들까지 종류별로 다 갖춰져 있다.
집이 더 큰 만큼 의국의 방 보다 훨씬 종류도 많았고 덩치도 컸다. 모든 기구들은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반짝반짝 관리가 되어 있었다.
“우와.”
재성이 입을 떡 벌리더니 혜수에게 속삭였다.
“대박이다. 무슨 집이 체육관 같아.”
그 뒤로도 재성의 입은 다물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와, 우와. 우와아아.”
혜수는 시끄럽게 떠드는 재성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조용히 좀 해요.”
곧 도영이 둘에게 다가와 수건을 하나씩 내밀었다.
“땀 닦아.”
“우와, 감사합니다!”
재성이 수건에 코를 묻고 킁킁거렸다. 그러고는 혜수에게 입을 벙긋한다.
“향도 죽인다!”
보드랍고 도톰한 하얀 수건에서는 도영의 곁에 가면 느낄 수 있던 향이 났다.
“마실 것 좀 줄까? 커피? 주스?”
도영이 냉장고 문을 열고 내부를 들여다본다.
“아니면 간단한 음식도 가능해. 음, 떡볶이 해줄까?”
“네? 떡볶이요?”
재성이 놀라 하며 되물었다.
“마침 재료가 다 있어서.”
도영의 손짓을 따라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니 정말로 안에는 떡이며 어묵, 각종 채소들이 손질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떡볶이 전문점이라 해도 되겠다. 삶은 계란에 치즈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떡은 종류도 다양했다. 치즈 떡, 고구마 떡, 별 모양 떡. 그 옆에는 우유에 주스도 종류 별로 하나씩 놓여 있었다.
이젠 재성에 이어 혜수의 입도 떡 벌어졌다.
뭐가 이렇게 본격적이란 말인가. 이게…… 정제된 탄수화물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던 사람의 냉장고가 맞나?
“허억.”
재성의 턱은 이제 빠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의국원들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도영은 음식을 철저하게 가려 먹었다.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면 입에 대지도 않았다.
유별나게 군다고 속으로 얼마나 욕을 했었는데 그의 입에서 떡볶이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하지만 도영은 한술 더 떠 앞치마까지 둘렀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해줄 테니.”
“아, 전 괜찮은…….”
거절하려는 혜수의 팔꿈치를 재성이 잡아당긴다.
“혜수야, 먹자. 이 집에서 조금만 더 있어 보고 싶다. 어?”
“좀…… 그런데요.”
“먹고 나랑 같이 가자. 응?”
“하지만 교수님 아프시잖아요. 쉬셔야 할 거예요.”
혜수의 걱정에 도영이 손을 내저어 보인다.
“지금은 다 나았어.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그러니 난 신경 쓰지 말고. 먹고 싶으면 먹어.”
“음…….”
어물쩡하는 사이 재성이 대신 외친다.
“네! 해주세요, 교수님.”
“앉아. 조금만 기다리면 돼.”
도영은 기다렸다는 듯 앞치마를 여몄다.
도영의 요리가 시작되었다.
먼저 냉장고를 열어 소스며 재료들을 꺼내 인덕션 옆에 가지런히 놓는다. 단정한 손에 재료들을 담아 냄비에 옮긴다. 기다란 손가락이 숟가락을 빙빙 돌린다.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이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수술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역시 아름다운 손이다.
“맙소사…….”
작게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옆을 쳐다보니 재성이 여전히 입을 헤 벌린 채 도영을 보고 있다.
꽤나 충격적인가 보다. 그 표정이 퍽이나 웃겨서 혜수는 킬킬 웃었다.
곧 떡볶이가 완성되었다. 주방에는 매콤달콤한 냄새가 가득 찼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떡볶이는 보기에도 무척 먹음직스러웠다.
“먹어 봐.”
“감사합니다.”
포크를 들고 막 하나를 입에 집어넣으려는데 벨 소리가 울린다.
“앗, 내 전화네.”
재성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네, 네. 네.”
무슨 내용인지 재성의 눈이 점점 커졌다.
“네. 알겠어요.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재성의 표정이 심각하다.
“무슨 일이에요?”
“병원인데. 우리 두두가 깨어났대.”
혜수와 도영이 멈칫했다.
깨어나? 아프다는 건가? 그런데 두두가 대체 누구야?
“두두가 누군데요?”
“우리 강아지 두두.”
“!”
“오늘 중성화 수술했거든.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아무튼 교수님. 저 지금 좀 가봐도 될까요? 두두 병원에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서류는 혜수가 가져갈 겁니다. 알겠지, 혜수야?”
“네에?”
혜수는 필사적으로 재성에게 눈짓했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교수님한테 혼나려고!’
강아지 수술 때문에 할 일을 미루다니! 도영에게 씨알도 안 먹힐 얘기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재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영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는 게 아닌가.
“저런, 큰일 났군. 빨리 가 봐.”
“네? 큰일이라구요?”
혜수의 물음에 도영이 고개를 또 끄덕였다. 그것도 꽤 심각한 표정으로.
“그럼, 큰일이지. 두두가 수술을 했다는데.”
“네, 뭐…… 어떻게 생각하면 큰일이 맞기는 한데…….”
‘교수님이 두두를 개인적으로 알기라도 하는 건가? 어떻게?’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교수님.”
그렇게 재성은 사라졌다. 아리송한 표정의 혜수를 남겨두고.
결과적으로 혜수는 도영과 남겨졌다.
그 넓은 집에.
단둘이.
커다랗고 조용한 공간에 둘만 있으니 도영의 숨소리 하나도 커다랗게 느껴진다.
‘으, 어색해.’
이 상황이 엄청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편하지는 또 않다.
‘안 되겠다.’
참다못한 혜수도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저, 교수님. 그냥 저도 갈게요. 지금 싸인해서 주시면 안 될까요.”
떡볶이를 접시에 덜던 도영이 휙 고개를 든다.
“벌써 가려고?”
“전 배가 별로 안 고파서요.”
“정말로?”
“네.”
“……이거 맛있는데.”
왜인지 목소리에 아쉬움이 스며들어 있다.
“그럼 서류 검토하는 동안만 앉아서 먹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네…….”
서류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두껍기는 했다. 도영은 그렇게 혜수의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포크로 떡을 하나 찍어 입에 넣었는데 절로 눈이 동그래진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혜수가 딱 좋아하는 단맛과 짠맛의 조화였다. 매콤함도 적당하다. 너무 맵지는 않으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딱 그 정도의 맛.
한대 병원 앞 노점상에서 파는 떡볶이가 지금껏 먹어본 떡볶이 중 최고였는데 이제 도영의 집 떡볶이로 바뀌게 생겼다.
‘진짜 맛있어!’
손이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서류 한 장이 넘어가는 속도보다 혜수의 입이 열리는 속도가 더 빨랐다. 스읍 스읍 소리가 주방에 연이어 퍼졌다.
혜수의 몫으로 덜어놓은 떡볶이는 금방 동이 났다. 그러자 줄곧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보던 도영이 냄비를 혜수의 앞에 밀어주었다. 마치 정수리에 눈이라도 달린 것 같다.
“이것도 마저 먹어. 난 좀 더 봐야 하니.”
실제로도 두꺼운 서류는 아직 반 이상이나 남아 있다.
“교수님은 안 드세요?”
“난 저녁 먹었어.”
“아, 넵! 잘 먹겠습니다!”
혜수는 부지런히 다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두 번째 그릇이지만 처음 먹는 것처럼 맛있다.
‘으흥흥, 맛있어.’
우연인지 혜수의 식사와 도영의 서류 검토가 동시에 끝났다. 이제 싸인만 몇 군데 하면 끝이다.
“잘 먹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맛있었어요. 정말로.”
빨개진 입술을 후후 불고 있는 혜수를 보며 도영이 픽, 웃는다.
“매웠나 보군.”
“조금요. 참을 만해요.”
“다음엔 덜 맵게…….”
“네?”
“아니, 아니야.”
도영이 말을 얼버무리며 냉장고를 향해 턱짓했다.
“저기, 열어 봐.”
“네?”
“냉동칸 열어보라고.”
“넵.”
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동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부를 본 혜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곳에는 고급 브랜드의 컵 아이스크림이 맛별로 쪼르륵 놓여 있었다. 편의점을 통째로 옮겨온 것처럼 없는 맛이 없다.
“우와, 교수님 아이스크림 좋아하세요?”
의외로 교수님은 달콤한 것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종류별로 갖춰 놓을 리가 있나.
도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먹고 싶으면 먹어. 마음껏.”
“그럼 하나만 먹을게요. 우와아, 맛있겠다!”
혜수는 고르고 골라 망고 맛 아이스크림을 꺼내고 아이스크림을 덜어낼 그릇과 숟가락을 찾았다.
주방을 빙 둘러보는데, 문득 옆에 놓인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온다. 안에는 잔뜩 타버린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그을음이 잔뜩이네?’
음식을 하다가 태운 것이란 건 알겠는데 하도 새까맣게 타버려 도저히 원형을 예측할 수가 없다.
‘파전? 아니…… 제육 볶음?’
원래의 모습을 가늠해 보려는데 도영이 슥 다가와 쓰레기통의 뚜껑을 닫아버린다.
“뭘 봐?”
“예? 아, 여기 이상한 게 있어서요.”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마저 해.”
도영이 어색하게 손을 내저었다.
“네, 네…….”
“크흠, 뭘 찾는 거야?”
“아이스크림 덜어 먹을 그릇 찾으려고요. 어디에 있어요?”
“바로 앞 찬장에.”
“넵.”
혜수는 머리 위에 달린 찬장 문을 열었다. 안에는 그릇들이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채 오와 열을 맞춰 놓여 있었다.
‘이거면 되겠다.’
그릇을 향해 쭉 손을 뻗었다. 그런데, 찬장이 너무 높다. 까치발을 힘껏 들어도 높은 찬장 속의 그릇은 손끝에 닿을락 말락 한다.
모자란 길이는 딱 손가락 한 마디만큼.
‘으윽. 안 닿아.’
아주 조금만 더 뻗으면 될 것 같은데, 그게 닿지를 않는다.
‘으으, 3센티만 더 컸으면 되는 건데.’
한참을 낑낑대고 있는데 제 왼쪽 어깨에 묵직한 무게가 올라온다.
‘어?’
위로 뻗어 낸 제 손끝에는 기다란 손가락이 톡, 스쳐 지나가며 전율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