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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가장 뛰어난 내 레지던트 (40/110)


40. 가장 뛰어난 내 레지던트
2022.06.18.



 
그래도 도영이 혈관만 만지고 있자 계상의 언성이 더욱 높아진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터질 것 같았다.


“주 교수! 지금 내 말 무시해?”

“…….”

한참 뒤. 혈관을 다 살펴본 도영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시선에 계상이 움찔한다.


“제가 어시스트를 누굴 쓰든 관여하실 바는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뭐, 뭐?”

“지금 외과 수술실이 총 8개가 열려 있습니다. 이곳에 외과 레지던트 한 명을 빼 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뭐라고!”

“게다가 신혜수 선생은 1년 차들 중 가장 뛰어난 레지던트입니다. 어쩌면 3년 차와도 견줄 수 있을 만큼.”

‘!’

갑작스레 튀어나온 혜수의 평가에 혜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날 그렇게 생각해 주셨던 거야?’

콩콩콩, 양 과의 교수가 다투는 위기일발의 상황임에도 혜수의 심장이 눈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아니면 교수님께서 직접 이곳에 서시겠습니까?”

도영이 혜수가 서 있는 자리를 향해 힐끔 고갯짓했다. 지금 혜수가 서 있는 자리는 보통 가장 말단인, 아래 연차 레지던트나 인턴의 자리이다.


“뭐, 뭐야? 이, 이 건방진!”

도영의 말뜻을 알아챈 계상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은 이제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성난 고함 뒤에 도영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소리 낮추시지요. 여기 수술실입니다. 수술 안 하십니까?”

“이, 이……!”

한동안 씩씩대던 계상은 들고 있던 흡입기와 거즈를 필드 위로 던졌다.


“그래. 한다, 해. 내가 한다!”

계상은 쿵쿵대며 걸어와 혜수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섰다. 그러더니 도영이 쥐고 있던 포셉과 전기소작기를 뺏어 들고는 도영까지 밀어낸다.

졸지에 환자의 곁에는 계상과 흉부외과 4년 차만이 있게 됐다. 당황한 4년 차가 계상을 보고 멍하니 있으니 버럭 소리까지 지른다.


“뭘 봐! 수술 안 해? 석션 들어!”

“네, 네.”

계상은 4년 차와 함께 직접 수술을 하기 시작했고 도영과 혜수는 뒤로 물러섰다. 즉, 도영이 오기 전과 똑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쫓겨났어! 이를 어째?’

혜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쩌지? 어쩌면 좋아.’

그런데, 슬쩍 도영을 올려다보니 도영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팔짱을 끼고 우뚝 서서는 카메라가 보여주는 수술 과정을 보고만 있다.


‘무슨 생각이신 거야?’

그렇게 몇십 분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흘러가 버렸다. 견디다 못한 혜수는 도영에게 작게 물었다.


“교수님. 저희 계속 이렇게 서 있어요?”

도영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지금 뭐 하는 것이지?”

“예?”

“지금 수술 과정. 어떤 단계인 것 같냐고.”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혜수는 나름 이해한 대로 대답했다.


“CPB(체외순환기)를 이용해 심장을 멈추고 박리된 대동맥은 일부 잘라낸 상태입니다. 그 사이를 인공 혈관으로 이어야 하니 이제 봉합을 할 것입니다.”

정확한 대답에 도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금 수술 시작한 지 몇 시간이나 됐지?”

혜수는 벽에 붙은 타이머의 붉은 글씨를 보고 그대로 읽었다.


“지금 인시전(incision:절개) 넣은 지 5시간 42분…… 아!”

무언가 깨달은 혜수가 작게 소리를 질렀다. 도영은 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모니터 잘 보고 있어. 조만간 다시 들어가게 될 테니.”

도영과 혜수는 다시 모니터를 보며 계상의 수술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계상의 성난 타박 소리가 또 시작된다.


“아우. 야! 이거 잡아야지!”

“네, 넷!”

“야! 너 자꾸 이럴래?”

“죄송합니다…….”

“똑바로 당겨!”

“넷.”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계상의 언성은 높아져 갔다. 그에 맞추어 4년 차의 어깨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야, 이 새끼야!”

그리고 계상이 엄청난 고함을 친 순간. 계상의 손가락이 주륵 미끄러졌고 수술 장면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작게 소리를 질렀다.


“앗!”

화면에는 세로로 길게 찢어져 버린 대동맥이 비춰졌다. 계상이 인공 혈관과 원래의 혈관을 한데 잇다가 원래의 혈관을 더 찢어버린 것이다.


“메, 메쩬(metzenbaum scissors:수술용 가위의 일종)!”

계상은 황급히 가위를 들고 찢어진 혈관을 도려냈다.


“수처 다시 주세요!”

새로 실을 받아든 계상은 조금 더 안쪽의 온전한 혈관을 꿰맸다.

하지만. 실을 꿴 뒤 바늘을 탁, 뜯어낸 순간. 또다시 혈관은 찢어지고 말았다.


“X발! 이거 왜 이래!”

고령에다가 전신상태가 좋지 않았던 환자였다. 혈관은 탄력이라고는 없이 흐늘흐늘하게 늘어져 조금만 힘을 잘못 주어도 쉽게 찢어졌다.


“메쩬!”

계상은 간호사가 내미는 가위를 낚아챘다. 또다시 찢어진 혈관을 잘라내고 새 실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혈관에 바늘을 꿰자마자 혈관이 찢어져 버렸다.


“이, 이…….”

허공에 맥없이 흔들리는 바늘을 보며 계상은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 환자의 머리맡에 서서 필드를 보고 있던 마취과 교수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교수님. CPB(체외순환기) 돌린 지 5시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슬슬 시간 관리를 하셔야…….”

“저도 압니다!”

버럭 소리를 지른 계상은 다시 가위를 고쳐 들고 찢어진 혈관을 잘라냈다.

그러기를 몇 번 더. 계상의 외침에는 점점 절망이 섞여갔다.


“쯧.”

도영이 드디어 발걸음을 뗐다.


“더 봐주다가는 남아나는 혈관이 없겠는데.”

도영은 계상의 뒤로 걸어가 고개를 내밀었다.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이제 제가 하겠습니다.”

“누, 누구야!”

뒤를 확인한 계상은 도영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주, 주 교수…….”

“계속하시겠습니까?”

“으, 으…….”

계상은 다시 필드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혈관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만져댄 결과 예상보다 훨씬 짧아져 버린 혈관이.


“…….”

와득, 어금니를 꽉 문 채 앓는 소리를 몇 번 낸 계상은 손에 쥔 기구들을 내려놓았다. 분노를 참는 듯한 희미한 말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온다.


“부……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도영은 계상의 자리에 가 선 뒤 기구들을 잡았다.


“신 선생. 들어와.”

“넵.”

혜수도 이전처럼 도영의 옆에 가 섰고 밀려 나온 계상은 도영의 맞은편에 가서 섰다. 4년 차가 서 있던, 퍼스트 어시스턴트의 자리이다.

수술 기구를 양손에 잡고 도영을 도와주는 것처럼 섰지만 속내는 시커멨다.


‘네놈이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 실수라도 한번 해봐라. 내가 어떻게까지 할 수 있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그런 계상을 보며 도영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한다.


“같이 수술하시겠습니까?”

“그, 그렇네.”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이 수술이 더 지연된다면 그건 전적으로 교수님 탓일 겁니다.”

“뭐?”

“전 손이 안 맞는 사람은 쓰지 않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도영이 직접 꾸리는 수술팀 이야기를 병원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같이 하시겠습니까?”

“거, 건방진……!”

한동안 도영을 노려보던 계상은 결국 뒤로 물러났다. 여기 있다가는 더 큰 치욕을 당할 것 같았다.

부직포로 된 멸균 가운을 사납게 찢어낸 계상은 쿵쿵대며 수술실을 빠져나갔다. 도영이 혈관을 다 잇고 나면 다시 자신을 부르라는 말을 남기고.
 

계상이 빠진 수술실에서는 다시 수술이 시작되었다.


“석션.”

“보비.”

혜수는 조용히 도영을 보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스럽다.


‘교수님 괜찮으실까? 혈관이 많이 약해 보이는데.’

계상이 실력이 아주 형편없는 의사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한대 병원의 의사라면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의사들 중 하나니까. 그런 계상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물론 교수님 덕분에 통쾌하기는 했어.’

조금 전 당당한 도영의 말을 들으며 짜릿함을 느낀 건 사실이다. 저를 얕잡아보던 계상의 코를 납작 눌렀으니.

하지만 막상 칼이 이쪽으로 넘어오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주 교수님을 믿기는 하는데…… 이게 될까?’

드디어 혈관을 꿰매야 하는 순간이 왔다.


“교수님, 수쳐 드릴까요?”

“아니, 잠시만요.”

도영은 니들 홀더를 바로 받아 쥐는 대신 손으로 혈관을 만졌다. 마치 혈관 내벽의 결을 하나하나 느끼는 것처럼.

도영의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상아색 멸균 장갑은 혈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붉게 물들어 갔다. 잠시 뒤, 도영이 혈관에서 손을 뗐다.


“글루 주십시오.”

“글루요?”

생체용 풀이 쓰일 타이밍이 아니었던지라 스크럽 간호사가 되물었다.


“박리된 혈관 벽 붙일 때 쓰고 남은 글루 없습니까?”

“아, 있어요. 오픈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안 굳었을 거예요.”

“그거 주십시오.”

“네, 네.”

간호사는 저 멀리 치워뒀던 풀을 찾아 건네주었고 도영은 풀을 손끝에 조금 짜 검지와 엄지로 문질렀다. 몇 번 풀의 점성을 확인한 뒤에는 알맞다 생각되었는지 풀을 혈관에 가져간다.


‘글루는 왜?’

혜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실로 두 혈관을 이어야 할 타이밍에 풀은 왜 찾는 것인지. 설마 풀로 혈관을 붙이려는 건 아닐 테고.


‘뭘 하시려는 거지?’

모두의 의문이 담긴 시선 속에서 도영은 풀을 검지에 짜 환자의 원래 혈관 외벽으로 옮겼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손으로 넓게 펴 바른다. 마치 풀로 혈관 벽을 코팅하려는 것처럼.

잠시 뒤, 풀이 어느 정도 굳어 쫀득해졌다. 그제서야 도영은 니들 홀더를 들었다.


“이제 수쳐하겠습니다.”

아, 혜수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교수님의 뜻을 알겠다.

도영은 지금 환자의 혈관은 너무 약해 실의 장력을 견디지 못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풀을 발라 강도를 더해주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도영은 거침없이 바늘을 혈관에 꿰었고 바늘은 아무런 저항 없이 혈관을 관통했다. 실을 꿴 뒤에 도영이 니들 홀더를 가벼운 손짓으로 잡아당겼다. 실과 바늘이 탁, 분리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드디어 혈관이 찢어지지 않았다.


“신 선생. 이거 잡아.”

“넵.”

혜수는 도영이 건네는 실을 조심스럽게 모아 잡았다.

혜수에게로 실이 옮겨가고, 도영은 지체 없이 나머지 혈관을 쭉쭉 실로 꿰어 나갔다.


‘우와.’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연신 감탄이 터져 나온다.

지금 혈관은 허공 어딘가에 고정이 된 것처럼 보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막대기에 걸쳐진 것 같았다. 혈관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손상을 주지 않을 정도로 가해지는 손가락의 힘. 그 알맞은 힘 덕인 것이다.


‘멋지다.’

도영의 모든 움직임은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했으며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실로 꿰어진 혈관은 모두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와…….’

입이 떡 벌어진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손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인공 혈관과 원래 혈관은 일렬로 이어졌다. 매끈한 새 혈관이 만들어진 것이진 것이다.

애초 예정보다 인공 혈관의 길이가 조금 더 길어지기는 했지만 다행히 연결된 다른 동맥들에는 전혀 손상이 없다.

마지막 타이를 끝낸 도영은 실들을 혜수에게서 넘겨받았다.


“컷.”

4년 차가 가위로 실을 잘라주자 톡, 톡, 톡. 실이 잘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마지막 실까지 자른 도영은 한 번 더 꼼꼼히 봉합 부위를 확인했다.


“끝났습니다.”

도영은 뒤로 물러나 가운과 멸균 장갑을 벗었다.

옷을 벗는 것도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다. 혜수는 단 한순간도 도영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벤트(vent:수술을 위해 막은 혈관 위아래로 피를 통하게 해둔 임시 인공 혈관) 제거는 김계상 교수님께 연락하십시오.”

도영의 수술에 홀려 있던 의료진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저마다 감탄사를 뱉어낸다.


“와.”

“대박이다.”

“명장면 탄생인데?”

“녹화해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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