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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감히 누굴 건드려? (38/110)


38. 감히 누굴 건드려?
2022.06.11.




“언니. 저 좀 보죠.”

“어? 혜, 혜수야. 거기 있었어?”

“하!”

“왜, 왜 그래? 왜 날 노려봐…….”

“뭘 모른 척해요. 다 들었잖아요.”

“무, 무슨 말인지 나는 잘 모르겠어…….”

혜수는 콧방귀를 빵 꼈다.


“모르겠다니, 아까 그 할머니 병실로 찾아갈까요? 보호자 분이랑 삼자대면이라도 해요?”

“어?”

“그땐 제가 뭘 할지 궁금하지 않아요?”

혜수는 입꼬리를 비틀어 끌어올렸다.


“언니 생각은 어때요?”

“아, 그, 그…….”

할 말을 잊고 어버버 거리는 경애의 얼굴은 이제 터질 것 같았다.


‘아 씨, 하필 여기서 딱 걸려가지고. 어쩌지?’

신혜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이 독한 것은 아무리 일이 많아도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모든 걸 다 해낸다.


‘게다가 성격도 더러워.’

지금껏 혜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런저런 시비를 걸었을 때도 혜수는 그냥 당해 주지 않았다.

나이 많은 게 벼슬이라 생각했던 것이 혜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억지 주장을 참아주고 봐주는 다른 1년 차들과는 달랐다.


‘아, 짜증 나네…….’

잠시 뒤, 고민을 끝낸 경애가 혜수의 어깨를 잡고 이끌었다.


“혜수야,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이리로 좀 가자, 응?”

아무도 없는 계단실로 혜수를 데리고 간 경애는 풀 죽은 목소리로 한마디씩 뱉기 시작했다.


“미안해. 혜수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

“진짜 언니가 그런 게 맞다는 거네요?”

“응, 맞아. 정말…… 미안해.”

“내가 지금까지 환자를 몇 명을 봤는데. 몇 번이나 밤을 새웠는데!”

“…….”

“그게 다 언니 때문인데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어요?”

“미안했어. 너무 미안했지. 진심이야.”

“그런데 왜 보고만 있었어요?”

“무, 무서워서 그랬어. 주 교수님도 너무 무섭고. 처음엔 내가 사고를 쳤다는 사실이 믿기지도 않았고……. 그래서 가만히 있다 보니 일이 너무 커져서. 나중엔 더 수습할 수가 없게 돼버렸어.”

“하!”

“미안해, 미안해. 혜수야. 진심으로 미안해.”

잔뜩 붉어진 채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경애의 얼굴은 누가 봐도 반성을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나, 난…… 여기 남아서 교수하고 싶거든.”

그래서 간도 쓸개도 다 빼놓고 유민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다. 병원장의 금지옥엽 따님에게 잘 보이려고.

성적도, 평판도 그저 그런 경애가 교수가 되려면 유민에게 무조건 잘 보이는 것. 그것이 경애가 생각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사고 친 것들이 쌓이면 임용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더 숨겨야겠다는 마음도 먹었어.”

“…….”

“미안해, 혜수야.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요?”

“그럼, 당연하지. 엄청 미안해. 진심이야.”

경애의 눈에서는 이제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럼 바로잡아줘요.”

“어? 무, 무엇을?”

“환자에게 껌 씹어도 된다고 한 사람이 언니라고 말해주세요.”

“!”

“지금까지 내가 고생했던 거 똑같이 하라고는 말 안 할게요. 대신 바로잡아줘요.”

껌 사건 이후 일이 늘어나 육체적으로 힘든 것도 문제이기는 했지만 혜수가 괴로워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로 꼽을 수 있었다.

하나는 의국원들이 혜수를 모자란 레지던트라 말한 것.


‘내가 얼마나 바보 취급을 받았는데!’

어떻게 기본 중의 기본인 수술 전 금식에 대한 걸 모르냐, 입국 시험에서 1등 했던 것은 커닝한 것이 아니냐며 교수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고 그럴 때마다 혜수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한동안 혜수를 ‘야, 껌!’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느낀 죄책감은 또 어떻고! 할머니가 죽을 뻔했단 말이야!’

주치의가 되자마자 사고를 쳤다. 자신의 말 한마디 때문에 환자가 죽을 뻔할 정도로 큰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혜수가 느꼈던 두려움과 절망감은 지금껏 병원 생활을 하면서 겪은 수많은 감정 중에 가장 혹독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제 마음이 힘들었던 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것까지 어떻게 하라고는 안 할 테니까. 의국원들한테만 바로 얘기해 줘요. 껌 그거 저 때문이 아니라 언니 때문이라고.”

“하, 하지만 혜수야…… 그, 그건 좀…….”

“그건 힘들어요?”

“혜수야, 제발. 나는 교수가 되고 싶어. 그러려면 절대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되잖아. 그건 너도 잘 알잖아.”

“…….”

“한 번만, 딱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이제 과도 바뀔 거고 다들 그 사건은 이제 잊었을 거야. 응?”

“…….”

경애는 혜수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제발, 제발. 너만 눈감아주면 아무도 모르게 지나갈 수 있어. 응?”

“…….”

“그, 그냥 해달라고는 안 할게. 내가, 내가 다음 달 당직 3개 더 가져갈게.”

그래도 말이 없자 경애가 황급히 덧붙였다.


“5개, 5개 더 할게! 응? 우리 병동에 괜히 소란 일으키지 말자, 제발.”

“…….”

경애의 말이 맞기는 하다. 모두가 잊은 이미 끝난 사건이다.

경애의 잘못과 거짓말이 알려진다면 도영은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병동은 또다시 살얼음판이 되겠지.


‘흐음, 그럼 나에게도 불똥이 튈 가능성이…….’

당직 5개도 큰 조건이었다. 5일이나 밤을 대신 새 주겠다는 건 꽤나 솔깃했다. 죽고 못 사는 커플들도 절대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는 지옥 같은 외과 당직 아닌가.

일하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경애가 당직 5개를 말한 것이면 경애의 입장에서는 나름 큰 제안을 한 것이다.


‘어쩔까.’

한동안 고민하던 혜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모르는 척해 줄게요.”

“정말?”

경애가 뛸 듯이 기뻐했다.


“고마워! 그럼 내가 네 당직을 설게!”

“네, 대신 당직은 15개 서 주세요.”

“어?”

경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제가 당직이 아닌데도 주치의를 하느라 밤을 새웠던 날들을 세면 대충 15일 정도 되네요. 그만큼 가져가 주세요. 그럼 공정한 것 같은데. 어때요?”

“아…… 15개는 좀…….”

“싫으세요? 그럼 없던 것으로 하지요.”

“아니! 잠시만. 10개는 안 될까?”

좋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대로다.

혜수는 머리에 손을 짚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흐음, 언니. 당직이 그렇게 싫으면 당직 대신 나중에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무, 무슨 부탁?”

“정말 간단해요. 그냥 제가 말 한 번만 해달라고 하면 그대로 읊어주시면 돼요.”

“무슨 말?”

“그건 아직 모르겠고, 나중에 부탁할 일 생기면 말할게요. 딱 한 문장만 해주시면 돼요.”

“그, 그건 좀.”

경애가 머뭇거리자 혜수가 휴대폰을 꺼냈다.


“싫으면 당직 15개 가져가 주세요. 아니면 주 교수님께 전화합니다.”

“잠깐만!”

경애는 일단 혜수의 손을 붙잡았다. 혜수가 멈칫한 틈을 타 열심히 생각했다.

내가 따라 하는 말 한 번으로 신혜수가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을까?


‘설마, 금전적인 문제? 돈을 요구하는 건가?’

아니, 아니다.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것은 그 뒤로 또 행동이 따라야 하니 안 될 것이다. 하지 않으면 되니까.


‘그럼 일을 떠넘기려고? ……아니야.’

이건 더더욱 아니다. 그 또한 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여러 경우의 수를 따져봤지만 고작 말 한 문장만 하는 것으로 제가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당직 15개와 비교하면 아주 좋은 조건이야.’

한동안 눈알을 굴리던 경애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 네가 시키는 대로 말할게. 단 한 문장. 한 문장이면 되는 거지?”

“네, 맞아요. 그러면 없던 일로 해줄게요.”

“알았어. 고마워, 혜수야! 내 부탁 들어줘서.”

경애는 혜수의 손을 덥썩 잡고 흔들었다.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데다가 당직도 서지 않아도 된다니 횡재가 아닌가.


“언니, 그럼 저 병동에 일 있어서. 먼저 가봐도 되죠?”

“그래, 그래. 얼른 가 봐.”

“갈게요.”

혜수가 고개를 꾸벅하고 계단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혜수가 완전히 사라진 후, 계단실에는 온갖 상스러운 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저 X발X. 어디서 나를 갖고 저울질이야. 재수 없는 X. 나를 뭘로 보고.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지? 아, 진짜 X 같네.”

분을 이기지 못한 경애는 한참을 욕을 해댔다.


“아오, 짜증 나. 저거 어떻게 처리하지?”

발소리를 쿵쿵 내며 서성대던 경애는 기분이 좀 풀렸는지 계단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경애가 사라진 뒤, 아래층 계단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린다. 한 계단 한 계단, 계단을 디디며 올라오는 사람은 도영.

경애가 사라진 문을 쳐다보는 도영의 시선은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브리핑 시간.

의국으로 간 혜수는 늘 그랬듯 환자 리스트를 뽑아 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 주섬주섬 리스트를 뒤적이며 발표할 내용을 정리하던 혜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게 뭐지?’

환자들의 주치의가 바뀌었다. 무려 모든 수술 전 환자가 경애에게 배정되어 있는 게 아닌가.


‘경애 언니 환자 수가…… 57명?’

경애의 환자가 순식간에 두 배가 넘게 늘어났다. 반면에 혜수의 환자는 21명. 이전 혜수가 모든 수술 전 환자의 당직을 할 때 경애가 봤던 환자의 수와 비슷하다.

경애도 경악을 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더니 혜수에게 다가가 눈을 치켜뜬다.


“신혜수. 주치의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너 뒤에서 다 일러바친 것은 아니지?”

“아니에요. 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왜 이렇게 된 건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너 그 말. 진짜지?”

“제가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왜 해요.”

“…….”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경애는 때마침 회의실로 걸어오던 도영을 발견하고는 쫓아갔다. 얼마나 급했던지 평소의 두려움은 잊고 덥썩 말을 건다.


“교, 교수님. 주치의가 이상한데요. 배정이 자, 잘못된 것 같아요.”

“어떤 것이 잘못됐다는 거지?”

“저…… 제가 왜 모든 수술 전 환자들의 주치의를…….”

“아, 그거.”

잠깐 운을 뗀 도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웬일로 친절하게 미소도 짓는다.


“신혜수 선생에게 한 달 시켜봤더니 수술 전 준비 방법을 확실히 익히더군. 교육 효과가 뛰어나다는 걸 깨달았지. 그래서 이번엔 이 선생에게 시키는 것이고. 즉, 교. 육. 목. 적.”

“아…….”

“왜? 문제 있나?”

느릿한 도영의 물음에 경애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채 고개만 가로저을 뿐.


“참, 이 선생은 오늘부터 내 수술에 어시스트 들어오도록 해.”

“네?”

경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의 레지던트 교육 시스템에서 1년 차가 수술의 어시스트를 들어가는 것은 정말로 일손이 부족할 때였다.

특히 도영의 수술팀은 늘 펠로우나 3년 차로 구성되어 왔다. 수술 자체가 까다롭기도 했고 도영 스스로가 마음에 차는 사람들로 구성했다. 조금이라도 손발이 맞지 않게 되면 그날은 수술실에 피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놀랄 이유가 있나? 설마 외과 레지던트가 수술방에 들어가기 싫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 그게 아니라…….”

그냥 싫은 정도가 아니었다. 도영과의 수술은 기를 쓰고서라도 피하고 싶었다. 3년 차들도 매일같이 혼쭐이 나는 수술에 아무것도 모르는 1년 차가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아…….’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수술실에 들어가 있는 내도록 혼날 테고, 수술이 끝나고 나면 수술실에 들어가 있던 동안 끝내지 못한 병동 일로 또 혼날 것이다.

이래도 혼나고 저래도 혼나고, 뭘 하든 지옥으로 이뤄진 사면초가다.


“그럼 뭐가 문제지?”

도영이 다시 물었고 경애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애써 가로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교수님. 열심히 하, 하겠습……니다.”

절망에 가득 찬 경애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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