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껌 사건의 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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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껌 사건의 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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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껌 사건의 진범
2022.06.08.
새벽이 되고 연구동으로 이어지는 문이 수리되었다.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밤을 새우다시피 한 혜수는 구름다리를 이용해 병원으로 돌아갔다.
회진 준비를 다 하고 나도 시간이 조금 남아 정형외과 병동에 갔다. 이 시간이면 승원은 늘 병동에 있으니 승원에게 발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목발을 짚고 나타난 혜수를 보고 깜짝 놀란 승원은 단박에 달려갔다.
“신 선생, 무슨 일이야?”
승원은 혜수를 부축해 비어 있는 처치실로 데려갔다.
“다리는 어쩌다 이런 거야? 넘어졌어?”
혜수의 발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승원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혜수는 일부러 밝게 대답했다. 실제로 별문제 없기도 했다.
“아니야.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오빠. 넘어져서 삐끗한 거야.”
“넘어져? 어쩌다가!”
“발이 걸려서. 그런데 지금은 아프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아. 불편한 것만 빼면.”
“진짜지? 더 다친 데는 없고?”
“진짜야, 괜찮아!”
“하아. 깜짝 놀랐잖아.”
승원의 어깨에서 그제야 힘이 빠져나간다.
그런데, 가만 보니 오히려 승원의 상태가 좋지 않다. 두 눈은 충혈되어 있고 볼이 홀쭉하다. 머리를 감고 아무렇게나 놔뒀는지 머리카락이 들쑥날쑥하다.
평소 깨끗하게 몸을 관리하는 승원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오빠,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혜수의 걱정을 느꼈는지 승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으로는 흐트러진 머리를 빗어 넘겼다. 이제야 가르마가 원래처럼 돌아왔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얼굴이 반쪽인데? 어제 술 많이 마신 거야?”
“어? 어, 어. 조금.”
“그래서 그런가 보네. 으이구, 술 좀 적당히 마시래도.”
“아침부터 잔소리할 거야?”
“나 참. 잔소리해줄 때가 좋은 줄 알라고. 나 남친이라도 생기면 관심은 이제 끝이야.”
“…….”
씁쓸하게 웃던 승원이 몸을 일으키며 혜수를 콩 때렸다.
“요게, 자꾸 솔로라고 놀려!”
“크큭.”
“스프린트는 잘해놨네. 더 손댈 건 없겠어. 엑스레이만 한 번 찍어보자.”
“알았어.”
“걷기 힘들지? 영상의학과에 같이 갈까?”
승원이 너른 등을 보이며 손짓을 까딱한다. 마치 업어주려는 것처럼.
어렸을 때부터 승원은 종종 혜수를 업어준 적이 있다.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놀던 혜수가 다리가 아프다고 징징거리면 어김없이 승원이 등을 내주었었다. 대학생 때도 혜수가 술을 마시고 정신을 못 차리면 승원이 혜수를 찾아가 업고 데려왔었다.
“허억, 아니야. 나 혼자 갈 수 있어.”
“정말?”
“그럼! 아무렇지 않아.”
이 사람이 무슨 농담을 진짜처럼 해. 혜수는 더욱 다리를 우스꽝스럽게 흔들었다.
“걱정 그만해도 돼! 걱정 노노! 이렇게 튼튼한데 뭔 걱정이야.”
걱정이라고. 혜수의 말을 되씹던 승원이 희미하게 말을 이었다.
“걱정…… 했었어. 전화가 꺼져 있어서.”
“응?”
“어제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걱정했어.”
“오빠 전화했었어? 나 폰이 고장 나서. 그래서 몰랐어. 다리 치료하느라 정신없기도 했고.”
“그럼……. 치료하고 숙소에서 잔 거야?”
“어?”
만약 누군가 어제의 행적을 묻는다면 이런저런 일들로 어쩔 수 없이 도영의 연구실에서 잤다고 말하려 했었다. 물어보는 사람이 승원이라도.
예상치 못한 사고였고 떳떳하지 못할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막상 그렇게 대답을 하려고 보니 꺼려진다. 승원의 눈빛 때문이었다.
혜수를 바라보는 승원은 무엇 때문인지 몹시 간절해 보였다. 정해진 대답을 원하는 듯한 절실한, 애타는 갈색 눈동자.
결국 혜수는 고개를 떨구며 끄덕였다.
“으, 응…….”
그제야 승원의 미간이 반듯하게 펴졌다. 하아, 안도가 섞인 숨이 길게 뻗어 나온다. 무거운 시름을 덜어낸 듯한 숨이었다.
“오빠, 많이 놀랐어? 걱정 많이 했나 보……!”
혜수는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갑자기 저를 와락 끌어안아 버린 승원 때문에.
“다행이다, 다행이야.”
“오, 오빠?”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는 승원에게서 박동하는 울림이 전해왔다.
쿵, 쿵, 쿵. 조금씩 빨라지는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혜수의 등을 쓰다듬는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오빠? 왜?”
승원은 대답 없이 뭉개진 발음으로 다행이란 말만 중얼거렸다.
“왜 그래, 오빠?”
“…….”
그 뒤로도 승원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혜수를 끌어안았다.
시간이 지나고 승원의 거친 숨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혜수는 몸을 꼼지락댔다.
“오빠 나 숨 막혀. 좀 놔줘.”
답답하다는 말에 승원이 파득 놀라며 손을 물린다.
“미안해.”
붉어진 승원의 얼굴을 보며 혜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빠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니야. 아무 일 없어.”
흘깃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본 승원이 손을 바깥으로 내저었다.
“혜수 회진 늦겠다. 이제 가 봐야지.”
“오빠 진짜 괜찮은 거지?”
“괜찮대도. 얼른 가 봐. 계단으로 못 가잖아. 엘리베이터 기다려야 하는데 늦으면 어떡해.”
“알았어.”
혜수는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했다.
“엑스레이 뜨면 내가 전화해 줄게.”
“그럼 외과 당직 폰으로 전화해. 나 지금 전화 안 돼서 그 폰 들고 있거든.”
“알았어.”
혜수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 처치실을 나왔다.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승원의 시선이 길게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날 오전, 엑스레이를 확인한 승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엑스레이 봤는데, 예상대로 프랙쳐(fracture:골절)는 없고, 그냥 스프레인(sprain:염좌) 이네.
“으아, 다행이다.”
-많이 불편하면 근이완제랑 진통제 챙겨 먹는 게 좋아. 처방해줄까?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필요하면 내가 처방해서 먹을게.”
-그래. 스프린트는 곧 풀어도 되겠어. 풀 때도 나한테 와. 내가 봐줄게.
“알았어. 완전 든든해.”
-그런데 누가 감아준 거야? 우리 과 앤가?
“아, 그거.”
도영이 감아줬다고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혜수는 다시 꿀꺽 삼켰다. 아침에 어디서 잤냐고 묻던 승원의 눈빛이 기억나서였다.
이미 숙소에서 잤다고 말을 해버려 이제 와서 도영이 감아줬다 하기엔 이후로도 더 많은 거짓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야. 우리 과 선배가 해줬어.”
혜수는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라고 스스로 납득시켰다.
‘주 교수님이 우리 과 선배가 맞기는 하니까.’
-그래? 잘 감았더라. 꼼꼼하게.
“그, 그 선배가 손재주가 좋긴 해. 오빠, 나 콜 와서. 끊을게.”
-알았어. 나중에 보자.
전화를 끊는 승원의 목소리가 아침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목발을 짚고 절뚝이며 병동과 중환자실, 응급실을 오갔다.
평소에는 계단으로 두 층만 내려가면 중환자실이 바로 나왔는데 다리를 못 쓰니 계단을 오르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매번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서 가장 병실이 많은 병원답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많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일의 처리도 덩달아 늦어졌다. 분명 일을 하기는 하는데, 병동을 나오자마자 새로운 일이 생겼다며 또 전화가 온다.
병동과 중환자실을 왔다 갔다 한지 정확히 열 번째 되던 때, 혜수는 병동의 의자에 드러누웠다.
이동에 훨씬 많은 시간을 쓰니 진도 빠지고, 생전 처음으로 목발을 쓰려니 팔도 쓸려서 아프다. 몸이 힘드니 발목도 덩달아 쿡쿡 더 쑤신다.
“나 힘들어서 도저히 못 하겠어요. 왜 병동이랑 중환자실에서는 번갈아 가면서 날 부르는 거냐고요!”
그런 혜수를 보며 68병동의 수간호사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최대한 몰아서 콜 하려고 하는데 잘 안되네요, 선생님. 깁스는 얼마나 해야 한대요?”
“이 주일이오.”
“저런.”
“하아아아.”
열심히 병동을 오가던 중 누가 저를 부른다. 뒤를 돌아보니, 반가운 얼굴이 손을 흔들고 있다.
“할머니!”
할머니는 그때 그 환자였다. 혜수가 껌을 씹어도 된다고 했다가 껌이 기도를 막아 난리 났던 사건의 환자.
그 사건 이후 혜수는 주치의가 경애로 바뀌었음에도 자주 찾아가 환자를 돌봐주고 말동무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혜수를 보기조차 싫어하던 환자는 혜수의 끈질긴 사과에 진심을 느끼고 마음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퇴원을 할 때쯤 혜수와 할머니는 둘도 없는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이후 할머니가 항암을 하러 입원할 때마다 혜수는 할머니를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보살펴 주었다.
“할머니, 또 입원하셨어요?”
“어. 항암하러 왔지. 근데 선생님 발은 왜 이래? 다쳤어?”
할머니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혜수는 일부러 활짝 웃었다.
“넘어져서 살짝 삐끗했어요. 별거 아니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혜수는 할머니 옆에 서 있는 딸에게도 말을 걸었다.
“보호자분 오랜만에 뵙네요.”
“네, 안녕하세요. 제가 일이 바빠서 그동안은 저희 올케 언니가 와 있었어요.”
“그러셨구나. 그래도 할머니께서 항암을 잘 견뎌내셔서 다행이에요.”
“선생님이 봐주신 덕분이에요. 엄마한테 들었어요. 주치의도 아니신데 종종 찾아오셔서 봐주셨다고.”
“아니에요. 할머니와 가족분들께 제가 정말 죄송하지요. 전에 수술하실 때 껌을 씹어도 된다고…… 했어서.”
혜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뭐에 씌었었나 봐요. 왜 그런 말을 해가지고.”
그러자 보호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흔든다.
“예? 아니에요.”
“네? 뭐가요?”
“껌 씹어도 된다고 한 사람은 선생님이 아니에요.”
“네?”
할머니도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초반에 혜수가 사과하러 올 때마다 얼마나 모질게 대했던가.
“뭐여, 이 선생이 아니여?”
“응, 엄마. 이 선생님 말고 다른 선생님 한 분 더 계시잖아. 두 번째로 주치의 하셨던. 아! 저분인데.”
보호자가 뻗은 손을 따라갔을 때, 그 손끝에는 경애가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양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다.
저를 가리키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건지 경애가 흠칫 놀란다.
“저 선생님이 씹어도 된다고 말한 거예요. 제가 그때 선생님한테 물어보고 혹시나 해서 저 선생님한테도 또 물어봤거든요.”
“…….”
“저 선생님이 너무 확실하게 된다고 그러셔서 되는 줄 알았어요. 그냥 우리 혜수 선생님 말 들을걸.”
엘리베이터의 숫자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경애의 얼굴이 점점 시뻘게졌다.
“정말 제가…… 아니라구요?”
“네. 아니에요.”
혜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 일 없이 끝나서 망정이지, 우리 엄마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내가 저 선생님 가만 안 뒀을 거예요.”
보호자가 경애를 노려보았고 경애는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아이고 선생님, 내가 생사람을 잡았네.”
할머니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혜수는 그런 할머니의 손을 살갑게 붙잡았다.
“괜찮아요. 그러지 마세요. 저도 몰랐는걸요.”
“아이고, 미안해라……. 아니 그런데 선생은 하지도 않은 걸 왜 했다고 뒤집어쓴 겨?”
“하하,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아이고, 어떡하면 좋아. 참으로 미안하네. 내가 다음에 올 때 맛있는 거 가져올게. 다리 낫는 데 도움 되는 걸로. 어디 보자, 사골이 괜찮으려나? 도가니탕?”
혜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전 정말로 괜찮으니 치료에만 신경 쓰세요. 항암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드실 텐데.”
시계를 흘긋 보던 보호자가 할머니를 다시 끌어당겨 부축했다.
“엄마, 이제 가야 해. 선생님, 저희 이만 갈게요. 입원 면담하러 가야 해서요. 다음에 또 봬요.”
“네, 안녕히 가세요.”
보호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할머니를 데리고 갔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혜수는 그대로 경애에게 갔다. 목발이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가 쿵쿵 울리고 경애가 어깨를 휙 움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