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두 번째 밤
(36/110)
36. 두 번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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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두 번째 밤
2022.06.04.
“저, 저기요?”
“어.”
“제가 저기서 자요?”
“바닥에서 자게? 그러던가, 그럼.”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혜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이 방에서 교수님이랑 같이 침대를 쓰자는 건가? 서, 설마 같은 층을 쓰자는 건 아닐 테고. 2층 침대니까 각자 하나씩?
새하얘진 얼굴로 눈만 도르륵 대는 혜수를 보며 도영이 고개를 더 비뚜름하게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선생이 이곳에서 자. 난 병원으로 갈 거야.”
“아!”
순식간에 얼굴이 또 화끈한다. 도영과 같은 곳에서 잠드는 상상을 한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혜수는 격하게 팔을 휘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교수님. 제가 갈게요. 그러면 제가 너무 미안하잖아요.”
“무슨. 발목을 완전히 부러뜨려서 주치의를 관두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여기서 자. 난 교수 휴게실로 갈 테니.”
단호하게 말한 도영은 캐비닛으로 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가운을 꺼냈다. 푹 젖어 들러붙는 가운에 도영은 억지로 팔을 끼워 넣었다.
“아니에요! 교수님!”
아까 도영이 치료 재료를 가지러 병원을 왕복한 것도 충분히 미안한 상황이다. 그 와중에 방까지 빼앗다니. 그건 너무 염치가 없지 않은가.
“제가 갈게요. 저 갈 수 있어요. 진짜예요.”
혜수는 절뚝절뚝 문으로 걸어가 문 앞에 널브러져 있는 제 우산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 우산이 왜 이러지?”
아까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우산이 부러져 있었다. 우산 살이 3개나 부러져 있고 반쯤 떨어져 나간 천은 허공에서 펄럭인다.
멍하니 우산을 보고 있는데 도영이 다가왔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아, 말하는 걸 깜빡했군. 아까 병동에서 오다가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부러졌어. 짐이 많아서 우산을 잡을 수가 없었거든. 미안하게 됐어. 우산은 새로 하나 사주지.”
말을 마친 도영은 방을 나서려고 했다. 빈손은 가운에 찔러 넣은 채. 혜수가 도영을 붙잡았다.
“교수님, 우산은요?”
“이건 못쓰니 그냥 가야지. 알다시피 다른 우산은 없어. 빌릴 데도 없고.”
또 아무렇지 않게 말한 도영은 정말로 맨몸으로 방을 나가려 했다.
“잠깐만요!”
“왜?”
“그, 저…….”
방도 뺏었는데 우산도 없이 저 빗속으로 도영을 내몰 수는 없다. 더욱이 도영은 환자가 아닌가. 몸을 차게 하는 것은 근육 질환에 좋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같이 있기에는…….’
“뭐?”
“그…….”
‘아, 어쩌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손톱으로 손바닥만 꾹꾹 누르고 있는데 도영이 문 손잡이를 턱, 잡았다.
“할 말 끝났으면 난 가지.”
“잠깐만요, 교수님!”
문을 열려는 도영을 혜수가 다시 붙잡았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도영을 보며 떠듬떠듬 말했다.
“여기서 주무세요. 같이 방 써요.”
“…….”
잠시 혜수를 내려다보던 도영은 말했다.
“그럴까, 그럼.”
혜수가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아주 산뜻하고 말끔한 말투였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졸지에 혜수는 도영이 평소 쓰는 1층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리를 다친 혜수가 2층으로 기어 올라갈 수가 없으니 도영이 제가 쓰던 1층을 내준 것이다.
자리를 봐 준 도영은 암막 커튼까지 쳐 주고는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갔다. 아픈 사람은 빨리 자라는 말과 함께.
‘그래, 잠이나 자자.’
이 방에서 도영과 함께 깨어 있어 봤자 밤새 오목을 둘 수도 없고, 어색하기만 할 테니 차라리 자는 게 낫겠다.
마침 침대 안은 커튼 덕에 새어 들어오는 불빛도 없었고 습도도, 기온도 딱 적당해 자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혜수는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10분, 20분, 30분이 지나고.
혜수는 눈을 번쩍 떴다. 잠이 오질 않는다. 오히려 정신이 점점 말똥말똥해진다.
휴대폰이나 만질까 해도 아까 넘어지면서 받은 충격에 어딘가 문제가 생겼나 보다. 주머니에서 꺼냈을 때부터 전원이 꺼져 있더니 다시 켜지지가 않는다.
혜수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꾹 감았다.
‘오늘 왜 이러냐.’
가만 생각해보니 낮부터 이상했다. 뜬금없는 연애 점괘부터 이상했고 연구동으로 가는 문은 갑작스레 고장 났다. 하필 오늘.
그리고 예보에도 없던 비와 연락처를 묻던 남자 환자의 등장. 덕분에 도영과 같이 나눠 쓴 우산.
‘그리고 나서는…….’
어이없게 다친 다리, 도영과 같은 방을 쓰게 된 지금까지. 모든 게 예상 밖의 일투성이고 평소와는 다른 하루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제일 의외인 것은 도영이다.
‘이렇게 선뜻 침대를 내주실 줄은 몰랐어.’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도영의 방에서 쫓겨난 적이 한두 번인가. 혜수로서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도영이 제 다리를 붙잡고 치료를 해주던 장면이 떠오른다.
단단한 팔, 커다란 손. 섬세했던, 여전히 아름다운 손가락의 움직임.
‘부드러웠어.’
한동안 도영을 생각하던 혜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왜 자꾸 주 교수님 생각을 하는 거야.’
도영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려고 하는데 쉽지 않았다.
혜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도영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도영이 쓰던 베개, 도영이 쓰던 이불, 도영이 쓰던 매트. 넘쳐나는 그의 체취와 흔적들.
지금 도영은 책상 앞에 있음에도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 같다. 몸에서 자꾸 열이 난다.
‘나 왜 이러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는데 커튼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신 선생.”
혜수는 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도영이 살짝 허리를 굽힌 채 침대를 보고 있다.
“안 자?”
“아직 잠이 안 와서요.”
“다리가 아픈 건 아니고?”
“네! 괜찮습니다.”
“그래.”
커튼을 닫으려는데 도영이 다시 커튼을 붙잡았다.
“나오는 건 어때.”
“예에?”
“뭘 그렇게 놀라는지.”
“아, 그…….”
나와서 뭘 어쩌라는 거지. 정말 같이 오목이라도 하자는 건 아닐 테고, 사이좋게 대화하자는 더더욱 아닐 테고. 뭘까?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도영이 말했다.
“배가 고프군. 복숭아 있어. 같이 먹지.”
“앗, 네!”
침대에 누워 바닥만 긁고 있느니 배라도 채우는 게 낫겠다. 배가 부르면 잠도 더 잘 오지 않을까?
혜수는 절뚝대며 밖으로 나갔다. 테이블 위에는 언제 씻었는지 탐스러운 복숭아 두 개와 칼이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복숭아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도영을 대신해 혜수가 먼저 칼을 잡았다.
“제가 깎을게요, 교수님.”
하루 신세 지기까지 하는데 방주인에게 복숭아를 깎으라고 할 수는 없지. 혜수는 힘차게 깎아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뒤. 혜수는 처참해진 복숭아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 이건……. 복숭아가 너무 잘 익어서요……. 잡기에 너무 물렁해서…….”
혜수의 변명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원래 복숭아였던 것은 어디 가서 과일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변해버렸기에.
슬쩍 도영을 곁눈질하니 도영도 물끄러미 복숭아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표정도 혜수의 표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건 뭐지? 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아하하……. 남은 건 잘 깎아 보겠습니다!”
호기롭게 소리친 혜수가 하나 남은 복숭아를 힘차게 들어 올렸다. 도영이 급히 손짓을 한다.
“그 칼. 이리 내.”
“하지만…….”
“빨리 내놔. 배고파.”
“제가 할 수 있는데…….”
“어서.”
도영이 손을 계속 까딱이고 결국 혜수는 복숭아와 칼을 넘겨주었다.
도영은 메스를 잡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동작으로 받아 들었다. 그리고 혜수는 도영이 복숭아를 깎는, 아니 조각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와…….’
누가 칼 잡는 사람 아니랄까 봐 껍질 깎는 솜씨가 예술이다. 껍질에 붙은 과육이 없을 정도로 얇게, 정확히 껍질만 발라낸다.
완성품은 또 어떠한가. 복숭아에 새겨진 칼질의 이음새도 거의 없는 것이 완벽한 구형에 가깝다. 그런 뒤 여섯 등분으로 갈랐는데 그 크기 또한 자로 잰 것마냥 일정했다.
“와아.”
혜수는 진심에서 우러난 박수를 쳤다.
“대단해요, 교수님. 외과 의사는 과일 깎는 것도 다른가 봐요.”
“글쎄. 그러는 선생도 외과 의사일 텐데.”
“허얼!”
혜수는 아랫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저는 아직 전문의가 아니라서 그런가 보죠.”
저도 몇 년만 더 칼을 더 잡으면 달라질 거라구요, 라며 툴툴대는 혜수를 보며 도영은 낮게 쿡, 웃었다.
복숭아를 다 먹고 소화도 시킬 겸 혜수는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책장 옆에 웬 기계가 있어 다가가 보니 초음파 기계다.
“소노(ultrasonography: 초음파 검사 기계)가 있네요.”
“소노를 봐야 하는 논문이 가끔 있어서. 하나 사뒀지.”
혜수는 눈을 반짝이며 기계 앞으로 다가갔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초음파 기계를 다루는 연습을 짬 날 때마다 하던 참이다.
“좀 봐도 돼요?”
“얼마든지.”
다리가 불편한 혜수를 대신해 도영이 전원을 꽂고 기계를 켜 주었다. 책상 서랍에서 젤리까지 꺼내 준다.
“어디를 보게?”
“제 팔로 연습 해보려구요.”
혜수는 왼팔에 젤리를 붓고 초음파 팁을 이리저리 갖다 댔다. 검은 화면에 흰색과 검은색 음영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맞추기가 어렵네.’
팁을 이리저리 고쳐 쥐며 피부 속 혈관과 근육들을 찾으려는데 쉽지가 않다. 힘을 조금만 세게 주면 미끄러워서 벗어나 버리고 약하게 주면 원하는 부위가 잘 보이지를 않는다.
‘에잇.’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데 마음과는 달리 화면은 목표를 벗어나기 일쑤다.
한참을 끙끙대고 있던 때. 갑자기 뒤에서 묵직한 온기가 느껴졌다. 등에 단단한 무언가가 벽처럼 닿았다.
‘어?’
곧이어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제 오른손을 겹쳐 쥔다. 동시에 더운 숨이 귓가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놀라 바짝 굳어 있는데 익숙한 저음이 부드럽게 들려왔다.
“화면 봐.”
도영이 혜수의 손을 잡고 초음파 팁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을 세게 누르면 터지는 물풍선이라 생각해. 프로브(probe: 초음파 팁)를 쥔 손에는 힘을 이 정도로만 주고 부드럽게 아래위로 쓸듯이.”
도영이 겹쳐 쥔 오른손을 조금씩 움직였다. 이제야 초음파 화면에는 혜수의 왼팔 피부 아래 구조들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보이나?”
“네, 네…….”
혜수는 겨우 대답했다.
이후로도 도영은 혜수의 손을 같이 움직였다.
“여기는 위치상 메디안 너브(median nerve:정중신경)겠군.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혈관은…….”
귓가에는 여러 가지 조언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혜수는 도무지 화면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도영이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귀중한 팁들을 알려주고 있는데 주워 담지는 못할망정 물 새듯 흘러나가 버린다.
이유는 단 하나. 자꾸 묘한 기분이 들어서다.
아까 전 도영이 제 발을 치료해 줄 때처럼 뭔가 근질근질하다. 콕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가 마음을 뭉근하게 건드린다.
‘진정해, 신혜수.’
마음을 좀 가다듬고자 숨을 일부러 크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도영의 향이 진하게 들이닥치니 오히려 역효과였다.
콩콩콩콩, 심박동이 더욱 거세진다.
‘이러다 교수님이 눈치채시겠어.’
도영과는 지나치게 바짝 붙어 있었다. 급격히 올라간 심박수를 들키게 되면 얼마나 창피할까.
안 되겠다 싶은 혜수는 도영을 밀어냈다.
“다 알겠어요. 그만 알려주셔도 돼요.”
혜수는 도영의 품을 빠져나와 절뚝대며 침대로 걸어갔다.
“신 선…….”
“저, 저는 이제 잘게요. 너무 피곤해서요.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영이 아리송한 얼굴로 따라왔지만 못 본 척했다.
혜수는 침대로 기어들어가 커튼을 휙 쳤다. 억지로 눈을 감고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커튼 너머에서 연거푸 혜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눈을 꽉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