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같이 쓰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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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같이 쓰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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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같이 쓰면 될 것을
2022.05.25.
나무 아래를 나오니 도영의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다. 혜수가 도영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교수님, 여기 우산이요. 이거 쓰세요.”
잠깐 우산을 바라보던 도영은 손잡이를 받아 쥐었다. 연분홍색 꽃무늬 우산이 도영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조금…… 아니, 많이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도영 앞만 아니었으면 혜수는 크게 깔깔 웃었으리라.
‘흡. 웃으면 안 돼. 참자, 참아.’
입을 앙 말아 문 혜수는 머리 위로 양손을 모아 차양을 만들었다.
“전 그냥 뛰어갈게요. 조금 있다가 다시 봬요.”
쏟어내리는 빗속으로 뛰어들려는데, 도영이 혜수의 팔을 턱 잡았다.
“왜 뛰어?”
“예? 우산이 없으니까요.”
“여기 있잖아. 우산.”
도영이 머리 위의 분홍 우산을 보며 눈짓을 했다.
“예?”
순간 교수님이 나 대신 뛰겠다는 건가? 란 생각이 번뜩 스쳤다. 혜수는 손을 세워 격하게 흔들었다.
“아니에요! 제가 뛸게요, 교수님!”
감히 1년 차가 우산을 쓰고 교수님을 비를 맞게 하다니.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저렇게 말을 할 수는 없으니 다르게 말해야겠다.
“어떻게 교수님이 비를 맞아요. 맞아도 한 살이라도 젊은 제가 맞는 게…… 아.”
아, 실수다.
혜수는 손을 들어 입을 잽싸게 막았다.
이게 아닌데.
도영이 가볍게 입을 비튼다.
“뭐 하자는 건지.”
졸지에 교수님 늙었어요, 가 되어버렸다.
“아, 아니, 그 뜻이 아니고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잖아요? 실제로는 제가 더 체력이 안 좋은데, 그러니까…….”
붉은 얼굴로 횡설수설하는 혜수의 팔을 잡고 있는 도영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혜수를 제게로 훅 끌어당기더니 우산을 기울인다.
혜수의 머리 위에 우산이 넘어오고 도영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주먹 하나만큼 가까워졌다.
들이치던 비가 잦아들면서 익숙한 향이 느껴진다. 도영의 방에 가면 맡을 수 있던 단정하고 묵직한 향.
‘!’
급작스레 좁혀진 거리에 놀란 혜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
그런 혜수를 내려다보던 도영이 다시 입을 연다.
“같이 쓰면 될 것을.”
도영이 아무렇지 않게 몸을 틀어 발을 뗀다. 여전히 굳어 있는 혜수를 보며 재촉도 한다.
“뭐해? 안 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혜수는 고개를 파드득 흔들었다.
“가, 갑니다.”
혜수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를 취했다.
몸은 최대한 밖으로 쭉 빼고 머리만 우산 속으로 디밀었다. 가능한 도영과 닿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자세가 오리처럼 매우 우스꽝스러워졌고 등 위로는 빗방울이 그대로 떨어졌지만 마음은 훨씬 편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꼴을 본 도영이 멈춰 서더니 또 코웃음을 친다.
“신 선생. 지금 뭐 해?”
“예?”
“아, 연구실에 가기 싫다는 뜻인가.”
“그게 아니라요…….”
“제대로 안 걸어?”
“네, 네. 갑니다, 갑니다요.”
그제야 혜수는 도영에게 바짝 붙었고 도영은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혜수 혼자서 써도 비가 들이칠 정도로 작은 우산이었다. 그걸 도영과 같이 쓰려니 무척 비좁았다.
가뜩이나 어깨도 넓고 체격이 큰 도영 아닌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도영의 어깨가, 팔이 혜수에게 닿는다.
도영과 맞닿은 곳이 스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다.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가려운 것 같기도 하고. 뭔지는 모르겠으나 무언가가 슬금슬금 마음을 긁는 느낌이다.
확실한 것은 이 상황이 매우 불편하다는 것.
고작 우산 하나 나눠쓰는 건데 왜 이리 의식되는지 모르겠다.
‘어색해.’
숨도 제대로 들이쉬지 못하고 간신히 붙어가고 있는데 도영이 또 멈춰 서더니 혜수에게 묻는다.
“왜? 무슨 문제라도?”
담백한 말투였다. 말투만큼이나 검은 눈동자에는 아무런 기색이 비치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는 혜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니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이 상황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저뿐인가 보다.
혜수는 저 위, 눈에 보일락 말락 하는 고지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저기에만 도착하면 끝이야. 지금 옆에 있는 건 마네킹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난 지금 마네킹을 끌고 가고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거세졌다. 우산이 있기는 하지만 간신히 위를 막는 게 최선이었기에 옆으로 들이치는 칼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까 환자한테 바람막이를 괜히 줬나. 춥다.’
산을 깎아 만든 병원 부지답게 연구동은 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혜수는 처음으로 병원이 산속에 있다는 것을 원망했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지어놨담! 아니, 그 문이 고장만 안 났어도!
왜 하필 오늘! 비는 또 왜 와가지고!
‘으, 추워, 너무 춥다.’
오돌오돌 떠는 와중.
단 한 군데에서는 온기가 느껴진다. 바로 도영과 맞닿은 왼쪽 어깨와 팔.
원래 체온이 높은 편인지 도영은 무척 따뜻했다. 간신히 몸의 한 쪽만을 붙이고 있는데도 위안이 된다.
아까는 도영과 떨어지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 바싹 붙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교수님한테서 따뜻함을 느낄 줄이야.’
혜수는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다 생각하며 군말 없이 도영에게 가까이 붙었다.
둘은 드디어 연구동에 도착했다.
도영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는데 도영의 왼쪽 어깨가 완전히 젖어 있다. 젖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물에 적셔놓은 것 같다. 손을 타고 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슈트가 저 정도로 젖었다면 저쪽 몸은 우산은 쓰지 못했다는 거다.
그에 반해 혜수는 살짝 젖었을 뿐이다.
“교, 교수님. 옷이…….”
하지만 정작 도영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너무 심하게 물이 떨어지니 잠깐 멈춰 서서 옷소매를 한번 쭉 쥐어짠 후에는 다시 걸어갈 뿐.
혜수는 또 무언가가 마음을 슬금슬금 건드리는 느낌이 나 애꿎은 가슴을 툭 두드렸다.
‘팔도 아픈 사람이……. 오른쪽 팔이 아니라 다행이다.’
207호 앞에 도착한 도영은 문을 열었다.
“들어와.”
“넵.”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공기가 훅 끼쳐온다. 굳었던 어깨가 풀리는 느낌이다.
‘연구실은 이렇게 생겼구나.’
교수 두 명당 한 곳씩 주어지는 연구실은 지금은 도영 혼자서 쓰고 있었다.
입구 가까이에는 책상과 옷장, 작은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고 더 안으로는 캐비닛과 이층 침대가 놓여 있었다. 더 안쪽으로는 작은 욕실도 딸려 있었다.
도영은 바구니에서 수건을 하나 꺼내 혜수에게 던져주었다.
“닦아.”
“넵.”
도영도 대충 물을 닦아 내고는 슈트 상의을 벗었다. 역시나 물에 젖은 흰 셔츠가 드러났다.
상체의 반쪽은 완전히 젖어 있었다. 얇은 셔츠가 달라붙어 있으니 몸의 굴곡이 여실히 보인다.
분명 옷은 입고 있는데 입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가운과 수술복 속에 싸여 있을 땐 늘씬하고 길쭉한 느낌이 강한 몸이었다. 아무래도 긴 팔다리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전혀 아니다. 늘씬하기는커녕 오히려 크고 탄탄한 몸이다.
해부학적 구조에 따라 확연히 나뉘는 근육의 선들은 도영이 꽤 오랜 시간 관리해 왔음을 알게 해줬다.
‘저건 삼각근, 저건 이두근.’
혜수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도드라지는 근육에 이름을 붙였다. 근육의 경계가 이리 명확하니 마치 해부학 땡시 시험을 보는 느낌이다.
‘저기는 삼두근, 대흉근, 전거근…….’
도영은 멈추지 않고 넥타이의 매듭을 두어 차례 흔들고는 잡아당겼다. 조여져 있던 셔츠 깃이 끌러지며 가슴팍과 이어지는 목선이 드러났다.
‘!’
그제야 혜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옆으로 휙 틀어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신혜수? 지금 뭐 하니? 뭘 훔쳐봐?’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머리카락을 열심히 닦아 내는 척을 했다. 이미 다 닦아 내 더 닦을 것도 없어도 또 닦았다.
교수님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걸 들킨다면 무슨 변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귀는 온통 도영에게 열려 있었다.
스윽스윽, 천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가 계속 울린다.
‘서, 설마, 여기서 옷을 갈아입으시는 건가?’
도영이 조금 전 슈트 상의를 벗던 장면이 자동으로 떠오르면서 심장이 달음박질을 친다. 한 번 붉어진 얼굴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쩌지?’
내가 잠깐 나갔다 올까, 그냥 모른 척할까 온갖 생각을 다 하는데 철컥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수건을 슬쩍 내려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도영은 욕실로 들어간 모양이다.
‘하아. 깜짝 놀랐네.’
앞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가뜩이나 이곳까지 오는 길도 쉽지 않았는데 도착한 이곳도 쉽지 않다. 아까부터 익숙하지 않은 자극이 한 번에 들이닥치니 정신이 없다.
잠시 뒤, 욕실의 문이 열리며 도영이 나왔다.
젖은 옷은 벗어내고 새 셔츠로 갈아입은 채다. 물이 떨어지던 머리카락은 수건으로 닦았는지 사방으로 구부러져 있다.
완전히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간간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날렵한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 모습은.
혜수에게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늘 각이 져 있고 완벽한 모습의 도영을 봐왔었다.
일에서도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빈틈없는 도영은 흐트러진 머리카락 한 올, 옷에 붙어 있는 실밥 한 가닥 내보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군데군데는 젖어 셔츠가 들러붙어 있고 머리는 정돈되어 있지 않다.
비를 맞은 몸에는 습한 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선득한 밤의 향기가 도영의 체 향과 섞여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왔다.
무생물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실제로는 살아 움직인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과 신기함이랄까.
“다 닦았어?”
“네, 네!”
마저 머리를 털어 낸 도영은 수건은 옆에 던져두고 책상에 다가가 앉으며 모니터를 켰다. 옆에 수북이 쌓인 서류 중 몇 개를 골라내 책상 위에 놓는다.
“여기. 이리 와서 이거 읽어 봐. 우선.”
“네?”
멍하니 도영을 보고 있던 혜수는 갑자기 저를 부르는 말에 파드득 놀랐다.
“이리 오라고.”
“네, 넵.”
혜수는 머릿속 잡생각은 지우고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다. 했는데.
무언가 정강이에 걸리는 덕에 그대로 중심을 잃고 말았다.
“으아아악!”
쿠당탕 소리가 잠시간 퍼지고, 정신을 차린 혜수는 고개를 들었다.
찡그렸던 미간을 펴고 눈을 떠보니 제 몸이 바닥에 엎어져 있다. 넋을 놓고 있었더니 소파 앞에 놓여 있던 테이블에 발이 걸려 넘어진 모양이다.
“신 선생!”
도영의 크게 놀란 듯한 말투가 들려왔다.
“아으…….”
몸을 일으키려는데 왼쪽 발목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괜찮아? 괜찮은 거야?”
“네, 네. 저 아무렇지 않아요, 교수님.”
아프긴 했지만 굳이 내색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도영의 표정이 너무 심각하다. 단숨에 혜수에게 다가온 도영의 안색은 흙빛이었다.
게다가 목소리도 떨고 있다. 넘어진 혜수보다 오히려 도영이 괜찮지 않아 보일 정도다.
도영은 당장이라도 혜수를 안아 들 것처럼 혜수의 무릎 밑에 팔을 넣으려 했다.
“날 잡아. 일으켜 줄 테니.”
“제가, 제가 할 수 있어요. 혼자 일어날게요, 교수님!”
간절한 혜수의 목소리에 잠깐 망설이던 도영은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 손 잡아.”
“네.”
도영은 혜수의 손을 잡고 소파로 갔다.
“여기 앉아 봐. 정말 괜찮아?”
이상하다.
혜수의 어깨를 잡은 손과 괜찮냐 묻는 목소리가 계속 떨리고 있다. 혜수는 점점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왜 이러시지? 별거 아닌데.’
“저 진짜 괜찮은데요. 그냥 살짝 삐끗한 거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우뚝 선 채 발을 보란 듯 휘휘 돌렸다. 괜찮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아픔을 참았다.
“뭐 하는 짓이야!”
그런데, 한 층 더 커지고 성이 난 목소리가 돌아왔다. 놀라서 찔끔해 있는데 이번엔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발 좀 앉아 줘. 어?”
“네, 네. 앉습니다. 앉아요.”
혜수는 엉거주춤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그 뒤에 펼쳐지는 장면은 더욱 예상 밖이다.
도영이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다친 왼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손으로 직접 신발을 벗기고 양말을 벗겨 내린다.
물에 푹 젖은 양말은 발에 찰싹 달라붙어 잘 벗겨지지도 않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