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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들어갈 테니 기다려 (32/110)


32. 들어갈 테니 기다려
2022.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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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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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다음에 올 때까지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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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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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작은 손가락이 쑥 코앞으로 다가왔고 혜수는 멍하니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재현과 혜수의 대화를 옆에서 보고 있던 인턴과 간호사 사이에서 푸훕, 웃음이 터졌다. 슬쩍 쳐다보니 웃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는다.

혜수는 그들을 한번 흘겨보고는 재현이를 향해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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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약속. 대신 재현이 밥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해요. 그래야 기다려 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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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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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 재현이. 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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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녕.”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재현은 기다리고 있는 엄마와 아빠에게로 뛰어갔다.

재현의 가족이 완전히 사라지고, 인턴과 간호사는 배를 잡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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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하, 선생님. 오늘 만남이 이거였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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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하하. 그 사이트 용하긴 하네.”

서로를 두드리며 깔깔 웃는 인턴과 간호사를 보며 혜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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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요. 차아아아암 용하네요.”

 

저녁에는 의국으로 내려가 지금까지 모은 케이스들을 정리했다.

논문은 도영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케이스를 모으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수술 건수도 워낙 많았고 혜수도 발에 땀 나게 뛰어다녔으니까.

요즘 이걸 하느라 집에 못 들어간 지 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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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지금 몇 시나 됐지?’

정신없이 정리를 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다.

오늘 밤에 도영과 지금껏 모은 케이스들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 피드백을 받기로 했다. 도영을 만난다면 또 질문 폭탄을 던질 것 같았기 때문에 대비를 해야 했다.

문득 낮에 인턴이 읽어주던 연애 운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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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연애는 무슨. 논문 읽기에도 하루가 모자라는데. 남자친구는 원래 신화 속 인물인 거잖아?’

한창 논문을 보던 중 휴대폰이 울린다. 도영에게서 온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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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교수님. 1년 차 신혜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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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선생. 10시까지 들어갈 테니 그때 보도록 하지.

도영은 지금 밖에 있는 건지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승원이 오늘 정형외과와 일반외과의 합동 회식이 있었다고 한 게 기억난다.

외과 과장 박상훈부터 정형외과 과장 김종석까지, 주당들이 모인 회식이었기 때문에 오늘도 자정이 넘어서야 끝날 거라고 승원이 툴툴댔었다.

그럼 교수님도 10시까지 오시기는 힘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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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바쁘시면 내일 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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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들어갈 테니 기다려.

도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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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그럼 교수님 방으로 가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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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로 와. 자료 뽑아 놓은 게 연구실에 있어. 연구실 207호 앞에서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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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혜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2층으로 내려가 구름다리를 건너는데 바깥에는 또 비가 오고 있었다. 구름다리 주위로 솟아 있는 울창한 나무들에 타닥타닥 빗소리가 맺혔다.

장대비까지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땅을 적실 만한 비였다. 덕분에 여름임에도 꽤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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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웬 비람. 저녁 먹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올해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것 같다. 혜수는 몸을 움츠리며 다리를 건너갔다.

꽤 긴 구름다리를 지나면 정면에 여자 숙소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거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연구동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연구동의 문 앞에 커다란 종이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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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뭐지?’

가까이 가서 보니 문이 고장 났으니 연구동의 정문을 사용하라는 내용이다. 혜수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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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이 밤에 밖으로 나가야 해?’

정문으로 가려면 병원의 바깥으로 나가 꽤 돌아가야 한다. 길도 오르막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니 모든 사람은 구름다리로 이어지는 길을 이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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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비까지 오는데, 하필.’

혜수는 숙소에서 우산과 겉옷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얼마 전 새로 산 삼단 우산은 가지고 다니기 좋게 가벼운 만큼 혜수만 딱 가려질 정도로 아담했다.

작은 만큼 바람이 부니 빗방울이 조금씩 안으로 들이친다. 가운 위에 걸친 바람막이가 아니었으면 많이 추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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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가자.’

혜수는 몸을 움츠리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본관 앞에 있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이 길을 건너 조금만 더 걸어가면 연구동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비 내리는 늦은 밤이라 지나다니는 행인이 없다. 차조차 없어 사방은 고요했다.

길 건너편, 가로등 불빛만이 내리쬐는 가운데, 키가 커다란 한 사람이 나타났다.

멀리서 봐도 시선을 잡아채는 흡입력이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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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이다.’

도영이었다.

한 손으로는 슈트와 비슷한 색감의 검은 장우산을 들고 있고 반대쪽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다. 커다란 손은 역시나 주머니에 반쯤 걸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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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도 혜수를 발견한 듯 고개를 까딱한다. 혜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도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아예 혜수에게로 몸을 튼다. 마치 혜수를 기다려주는 것처럼.

비도 세찬 데다가 날씨도 쌀쌀하니 먼저 가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다.

오래지 않아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혜수는 횡단 보도를 건너 도영의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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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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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수.”

도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름을 직접 부른 것은 처음이라 혜수는 조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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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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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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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고장 나서요. 수리 중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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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도영은 다시 걷기 시작했고 혜수도 그 뒤를 따랐다.

둘은 곧 연구동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 앞에 도착했다.

길은 듣던 대로 가팔랐다. 보도블록을 따라 양쪽으로는 큰 나무들이 촘촘히 서 있었고 높은 계단과 오르막길이 반복되는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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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높네.’

얼마 전에 3년 차 재성이 운동 삼아 밖으로 가봤다가 연골이 다 나가는 줄 알았다며 투덜거리는 걸 들었다.

당시에는 엄살을 피우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리 과장은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올라가지 않았는데도 죽을 맛이다.

이유는 하나. 도영의 다리가 너무 길다.

도영이 한 번 발을 옮길 때 혜수는 두세 번을 옮겨야 하니 쉴 틈이 없다. 나름 체력이 좋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숨이 차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 다리가 찢어진다던가. 딱 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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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고, 힘들어.’

얼마나 갔을까. 도영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본다. 땅만 보고 걷던 혜수는 도영과 부딪힐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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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교수님, 헉. 왜, 왜 멈추세요, 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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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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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안 이랬는데. 허억. 운동할, 헉.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흐억. 요즘 너무 바빠서 헬스장에, 허억…….”

더듬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혜수를 보며 도영은 혀를 한 번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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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신경 쓰지 마세요, 교수님, 허억.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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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또 혀를 찬 도영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발걸음이 전보다 훨씬 느려졌다. 마치 혜수를 배려해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럴 리가 없는 도영이기에 조금 의아했지만 좋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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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걸어가고 있는데 저 앞 커다란 나무 밑에 뭔가 보인다. 언뜻 보기엔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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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에 저기 사람이 있다고?’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니 정말로 사람이었다. 그것도 환자복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다. 손목에 문제가 있어 입원했는지 한쪽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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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저기 환자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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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둘은 곧 환자의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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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여기 있어. 내가 가볼 테니.”

도영이 환자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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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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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병원 직원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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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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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살았다!”

울상이었던 환자의 얼굴이 확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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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환자는 얼마 전 손목 수술을 했다 한다. 산책을 나왔다가 비를 만나 나무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고.

그런데 그치기는커녕 점점 거세지지, 휴대폰도 없지 어떻게 병원에 돌아가나 고민하던 중이란다.

말을 하는데 몸을 바들바들 떤다. 비를 맞은 데다 바람이 강하니 추운가 보다.

수술을 했으니 더욱 몸이 약해져 있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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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보내야겠는데. 어떡하지?’

혜수는 우산이 없는 환자를 이 비를 뚫고 어떻게 병원으로 보내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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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편의점에 가서 우산을 사 올까? 아님 병원에 직접 데려다줘야 하나?’

정 안된다면 환자에게 제 우산을 주고 저는 비를 맞고 갈까 생각도 했다.

그런데, 도영이 먼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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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산을 드린다면 혼자 갈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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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정말요? 그래주시면 저야 너무 감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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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거 쓰십시오.”

도영은 선뜻 제 우산을 건넸고 환자는 기뻐하며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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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산을 쥔 환자는 나무 아래를 나와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몸은 여전히 잔뜩 움츠린 채 덜덜 떨며.

그 모습을 보던 혜수가 다시 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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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환자분. 잠깐만요!”

혜수는 환자에게 달려가 입고 있던 바람막이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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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추우신 것 같은데. 이거 입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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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괜찮은데요. 이렇게까지 하시면 제가 너무 미안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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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괜찮아요. 저는 저 위에까지만 가면 되어서요. 병원보다 훨씬 가깝거든요. 옷은 나중에 68병동에 맡겨주시면 돼요.”

처음에는 몇 번 거절하던 남자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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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그런데 남자가 웃으며 다시 말을 붙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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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런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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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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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멀리서 지켜보던 도영의 표정은 점점 구겨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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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남자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옷을 받았으면 곱게 사라질 것이지 왜 혜수를 붙잡고 있는 건지.

게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실실 웃고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뒤로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혜수와 남자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져 갔다. 실제로는 잠깐이었지만 도영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었다.

안 되겠다 싶은 도영이 둘에게 다가가려 발을 뗄 때. 남자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혜수는 도영에게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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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요,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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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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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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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환자. 꽤 길게 말하던데. 무슨 말을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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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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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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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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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도영을 슬쩍 올려다보니 대답을 듣기 전엔 움직이지 않을 눈치다. 혜수는 솔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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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연락처 좀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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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연락처?”

하, 비 맞는 걸 구해줬더니 연락처까지 내놓으라니.

이게 물에 빠진 걸 구해줬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란 건가!

도영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물었다. 비장함이 느껴지는 말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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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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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대답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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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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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니요! 안 줬어요.”

단박에 나오는 대답에 도영이 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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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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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잘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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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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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다지 연애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시간도 없고…….”

그리고 혜수는 지금이 기회임을 느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논문을 쓰고 있음을 어필할 기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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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논문을 열심히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상황에 연애는 무슨!”

대답을 하는데 낮에 인턴이 봐줬던 연애 운이 떠올랐다. 오늘은 만남과 고민의 연속이라던 점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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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이걸 말하는 거였나? 어쨌든 내 선택은 당연히 거절이지.’

낮에도 생각했던 문제지만 제 앞가림을 하기에도 코가 석 자다. 연애할 시간이 대체 어딨단 말인가.

가은이 남자친구와 놀러 간다고 하면 자유롭게 논다는 것이 잠깐 부러울 뿐 그 이상의 감정은 느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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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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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혜수의 명쾌한 대답을 들은 도영이 가만히 서 있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갸름한 눈초리를 한 채.

잠시 뒤 도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상쾌한 느낌이 드는 어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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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갈까,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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