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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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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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2022.05.18.
“……그래, 먹어라. 많이 먹어라.”
열심히 떡을 씹는 도영을 보며 승원도 묵묵히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분위기 왜 이래?’
이 둘은 절친한 사이로 알고 있는데. 싸우기라도 했나?
혜수가 눈치만 보고 있자 도영이 케이크를 끌어다가 혜수의 앞에 놓아주었다.
“먹어.”
“네?”
“맛있어.”
“네, 네…….”
도영이 주는 거니 먹는 시늉은 해야겠다.
케이크를 조금 잘라 입에 넣었는데 별다른 장식이 없는 흰 크림이 발린 케이크는 의외로 맛있었다. 지나치게 달지 않은 생크림과 폭신한 시트의 조화가 딱 알맞았다.
‘어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지?’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게 이런 건가.
지금껏 먹어 온 케이크는 이 케이크에 비하면 어린애 연습 수준이다. 조금 전의 이상했던 분위기는 잠깐 잊을 정도로 맛있었다.
혜수의 손이 저도 모르게 점점 빨라지고 그걸 본 도영이 불쑥 말했다.
“잘 먹네.”
“아하하. 네, 맛있네요. 교수님도 드세요.”
“누가 먹는 걸 보니 안 먹어도 배부른데.”
“네?”
이거 혹시 너무 잘 먹는다고 비꼬는 건가, 눈치 없이 너무 나만 먹었나 생각 중인데 이번엔 승원이 물어온다. 왜인지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다.
“신 선생. 떡볶이는 왜 안 먹어?”
“배불러서요.”
“충분히 먹은 거야?”
“네. 아까 많이 먹었어요.”
“그래?”
“네, 감사해요, 교수님.”
살짝 웃으며 대답하는데 갑자기 테이블에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도영이 젓가락을 집어 던진 것이다.
“그게 아니지. 신 선생.”
“네?”
“떡볶이보다는 케이크랑 초콜릿이 맛있다는 거지. 배가 부른데도 저것들은 먹는 걸 보면. 안 그래?”
“예? 아, 음, 네. 디저트들도 맛있네요. 특히 케이크가 지금껏 먹어본 케이크 중에 제일 맛있어요.”
혜수는 느낀 대로 솔직히 대답했고 이 대답에 두 남자의 표정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도영은 피식피식 웃는 반면 승원은 표정을 더 굳혔다.
‘승원 오빠 왜 저래?’
조금 전부터 승원의 말투도 그렇고, 표정도 좋지 않다.
‘오빠가 저러는 거면 화가 났다는 뜻인데.’
“케, 케이크 정말 맛있어요. 교수님들도 드셔보세요.”
분위기를 환기시켜 보려고 혜수는 케이크를 잘라 둘의 앞에 각각 놓아줬다.
하지만 역효과였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게 확실해 보이는 승원과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는 도영.
둘의 표정은 점점 더 극명하게 갈렸다. 조금 더 지나서는 승원마저 젓가락을 내려놓고 도영을 날카롭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두 남자가 만드는 냉기에 준비실의 공기는 점점 싸늘해져 갔다.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에 스파크가 튀었다.
“이러다 한 대 치겠는데.”
도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섰다.
“난 가지. 목적은 달성했거든.”
그러더니 승원의 목 언저리를 잡고 누른다.
“맛있게 먹어. 한 교수.”
노래를 부르듯 운율을 넣어 말을 하니 승원은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그에 아랑곳 않고 도영은 눈까지 찡긋해 보였다.
“…….”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도영을 노려보는 승원의 턱이 불룩거린다. 도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승원은 매서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마침내 문이 철컥 닫히고.
“하아…….”
굳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승원에게 혜수가 물었다.
“오빠,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주 교수님이랑 싸웠어?”
“……아니, 일은 무슨.”
“그럼 둘이 왜 그래?”
“장난치는 거야.”
“진짜 장난이야?”
“그럼. 우리가 싸울 일이 뭐가 있어. 주도영이 괜히 시비 거니까 나도 맞장구쳐준 거야.”
“그런 거야?”
승원은 살짝 웃으며 음식을 밀어주었다.
“얼른 더 먹어.”
“나 진짜 많이 먹었어. 배불러. 근데 이 케이크 어디 거야? 진짜 맛있어. 담에 또 사줘.”
배부르다고 말은 하면서 케이크 한 조각을 또 잘라 입에 넣는 혜수를 보며 승원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이번에는 혜수가 승원 앞으로 초콜릿 상자를 밀어주었다.
“오빠는 왜 안 먹어? 초콜릿 좋아하잖아.”
“지금은 별로. 너 많이 먹어.”
“아싸, 다 내 거.”
환하게 웃는 혜수를 보며 승원은 또 씁쓸하게 웃었다.
“으아, 이제 더는 못 먹겠다. 배 터지겠네.”
“다 먹었어? 치울까?”
“응.”
혜수도 일어서서 테이블을 치우려는데 승원이 앉아 있으라 손짓한다.
“왜? 나도 도와줄게.”
“내가 할게. 앉아 있어. 오늘 수술 환자 많아서 힘들었다며.”
“흐흐, 좋네. 오빠가 알아서 다 해준다니.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
“요게.”
혜수를 콩, 한 대 쥐어박은 승원은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길쭉한 팔다리가 움직이는 걸 보고 있자니 문득 의문이 든다.
오빠는 왜 여태 혼자일까. 직업도 얼굴도 키도 성격도 어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데.
“오빠.”
“응?”
“오빠는 왜 아직 여자친구가 없을까? 희한해.”
“뭐?”
“이렇게 다정한데 말이야. 나한테도 이러는데 애인한텐 얼마나 잘하겠어.”
“…….”
“얼굴도 이만하면 쓸만하고. 허우대도 멀쩡하잖아.”
“쓸만하다고? 혜수야, 쓸만한 정도가 아니란다.”
“으엑. 뭐래.”
구역질을 하는 척은 했지만,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한대 병원의 양대 산맥 대천사 한승원과 사탄 주도영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올해 이상형 월드컵의 우승은 주도영이지만 작년에는 한승원이라고 했다.
실력에서나 외모에서나 둘은 견줄 만했다.
그렇지만 곧이곧대로 말해줄 수는 없지.
혜수는 팔짱을 낀 채 일부러 크게 콧방귀를 빵 꼈다.
“인정 못 해. 그리고 그럼 뭐해. 여자친구가 없는데.”
“…….”
“오빠 모쏠인거 사람들은 알까 몰라.”
“모쏠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맞잖아. 내가 알기론 없는데. 아냐?”
“…….”
승원에게 대시하는 여자들은 많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꽃 미모로 이름을 날린 승원에게는 늘 마음을 고백하는 사탕과 초콜릿, 꽃 등이 끊이지를 않았다.
대학생 때는 미팅에 승원을 넣기 위한 선배들의 러브콜이 줄줄이 이어졌고 대학교 졸업 앨범을 본 결혼정보회사 매니저들의 전화 또한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최근에도 종종 전화가 걸려 온다고.
하지만 승원의 대답은 늘 거절이었다. 관심이 없다, 흥미가 없다로 일관해 왔다.
옆에서 보고 있자니 어찌나 답답했던지, 혜수가 콕 찍어 이 여자야! 좀 만나 봐! 해도 고개만 저을 뿐.
혜수는 자세를 고쳐앉고 진지하게 물었다.
“오빠. 근데 왜 여친 안 만들어? 오빠 정도면 마음만 먹으면 쉬울 텐데.”
“…….”
승원이 대답 없이 테이블 정리만 하자 혜수가 팔을 뻗어 승원을 쿡쿡 찔렀다.
“응? 왜 안 만들어? 눈에 들어오는 사람 없어?”
“그게.”
잠깐 뜸을 들이던 승원이 띄엄띄엄 말했다.
“있어.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정말? 세상에!”
혜수가 환호성을 질렀다. 승원에게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처음 들어봤다.
지금까진 곧 죽어도 그런 사람은 없다고 대답해 왔었는데.
“고백했어? 그 여자는 오빠 안 좋대?”
“고백은 아직. 내가 좋아하는 걸 몰라.”
“헉.”
대박 사건이다. 한승원이 짝사랑이라니.
“누군데? 뭐 하는 여자야?”
“있어.”
“아, 나 진짜 궁금한데. 안 알려줄 거야?”
“궁금해하지 마, 다쳐.”
“치사해.”
입을 쭉 내밀고 툴툴대는 혜수의 머리를 승원이 가볍게 헝클었다.
“나중에 알려줄게.”
“진짜?”
“그래.”
“언제?”
“조만간.”
“좋아. 꼭 알려줘야 해. 약속!”
그때 준비실 문이 살짝 열렸다. 승원을 찾아온 정형외과 펠로우다.
“교수님. 이거 좀 봐주세요. 3분이면 돼요.”
승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혜수에게 손짓했다.
“신 선생, 잠깐만 나갔다 올게.”
“네, 다녀오세요.”
승원이 가만히 있으라고는 했지만 그러자니 양심에 찔린다. 혜수도 일어서서 치우기 시작하는데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네, 금방 갈게요.”
후다닥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벨 소리가 또 울린다. 이번에는 승원의 휴대폰이다.
‘오빠 전화 오는데.’
조금 울리다 끊어지나 했더니 전화벨은 또다시 울렸다.
‘누구야? 급한 건가?’
휴대폰을 들어보니 화면에 어머니라고 적혀 있다.
‘이모다!’
혜수는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이……!”
-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니!
전화를 받자마자 지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찌르는 듯한 음성에 혜수는 잠깐 휴대폰을 귀에서 떼야 했다.
‘이모 화났나? 오빠랑 싸웠나?’
“이모, 나 혜수야.”
-어? 혜, 혜수야?
지선의 말투가 금세 누그러진다.
“응, 혜수.”
-왜 네가 받아.
“같이 있었거든. 오빠는 잠깐 병동에 나갔어.”
-그랬구나. 승원이 돌아오면 나한테 전화 좀 해달라고 해줄래?
“알았어. 그런데 둘이 싸웠어? 왜 소리를 질러.”
-……아니야. 그런 거.
“급해? 지금 불러올까?”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고. 오면 바로 전화하라고만 해줘.
“알았어, 이모.”
-언제 한번 놀러 와. 튀김 해줄게.
“오예. 오빠랑 같이 한 번 갈게.”
-승원이 바쁘면 너 혼자 와도 돼. 언제든.
“알았어, 이모. 다음에 봐요.”
전화를 끊고 테이블 정리를 마저 하는데 승원이 들어왔다.
“오빠. 이모 전화 왔었어.”
“어머니?”
“응. 전화해 달래.”
갖고 있던 휴대폰을 승원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승원은 받자마자 주머니에 넣었다.
“전화 안 해?”
“나중에.”
“바로 해 달랬는데.”
“알았어. 곧 할 거야.”
“난 응급실 가야 해.”
“콜 왔어?”
“응.”
“그래. 얼른 가 봐. 힘내고.”
“오케이, 나 갈게.”
혜수가 나가고 승원은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
검은 화면을 노려보던 승원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머니.]
***
점심을 먹고 병동에 올라갔는데 간호사와 인턴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재밌는 거라도 있어요?”
혜수도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신 선생님, 선생님도 이거 해 봐요.”
“뭐예요?”
“별점이요. 이 사이트 되게 용하대요. 특히 연애 운에 관해.”
인턴이 코를 찡긋했다. 얼마 전 3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워서 헤어졌다는 인턴은 그에게 보란 듯 새 남자친구를 보여주겠다며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결제했어요. 30분 동안 점 보기 가능! 3만 원이나 투자했다구요.”
“별점이요? 별자리로 보는 건가?”
“맞아요. 선생님 것도 봐 드릴게요. 무슨 자리에요?”
“전갈 자리요.”
대충 대답해 준 혜수는 병동 구석에 놓인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평소 운세나 점 같은 건 믿지 않았기에 차트나 볼 생각이었다.
“여기 있다. 읽어 드릴게요, 선생님.”
인턴이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혜수의 올해 연애 운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좋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뜻대로 될 거예요. 하지만 결과로 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긴장과 갈등이 예상됩니다. 그래도 그 끝은 빛나는 사랑이니 포기하지 말아요. 특히 오늘은 만남과 고민의 연속이네요. 잘 선택해 보세요.”
운세를 다 읽은 인턴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좋다는 건가 나쁘다는 건가?”
“좋다는 거 아니에요? 첫 문장부터 좋다는데. 이야, 선생님. 오늘 무슨 일 있을 건가 봐요!”
간호사가 혜수를 콕콕 찌르며 웃었다.
“하하……. 그랬으면 좋겠네요.”
연애는 무슨, 혜수는 지금 제 앞가림하기에도 바빴다.
병원 생활을 하고 나서부터 남자에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 시간에 환자의 차트 한 줄을 더 외우고 약의 기전 한 가지를 더 외워야 했다.
“우리 차지 샘도 봐줄까요?”
또 다른 사람의 운세를 봐주겠다는 인턴과 간호사는 내버려 두고 혜수는 태블릿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세 번째 환자를 보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 혀 짧은 소리로 혜수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오늘 퇴원하는 6살 꼬마 환자가 까치발을 들고 서 있다.
“응? 재현아. 아직 안 갔어?”
병실에서 나가던 길이었는지 환자복이 아닌 알록달록한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등에는 비행기 모양 가방을 메고 있었다.
“선생님. 이거 주려구요.”
재현이가 작은 손을 쑥 내밀었다. 재현이의 손바닥에는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이거 선생님 주는 거예요?”
“네.”
재현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선생님 초콜릿 되게 좋아하거든요. 잘 먹을게요.”
혜수가 초콜릿을 받아들자 재현이는 더욱 얼굴을 물들였다.
“저, 선생님.”
“응?”
“저 나중에 선생님이랑 결혼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