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손 잡아 2022.05.07.
5분, 10분 더 있다 가는 건 문제없다. 하지만 도영이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제 손목을 붙잡고 있는 건 문제다.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혜수를 바라보고 있는 도영. 그의 뜨거운 호흡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당황스럽다.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지? 도영이 입을 달싹인다.
“……너. 대체 뭐지?”
난데없는 질문에 혜수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예…… 에?”
새카만 눈동자는 여전히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고 혜수를 훑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다. 혜수는 무슨 뜻이냐 다시 되묻는 것도 잊고 홀린 듯 도영을 마주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더 혜수를 바라보던 검은 눈은 장막이 드리운 듯 천천히 눈꺼풀에 가려졌다. 긴 속눈썹이 볼에 다시 그늘을 만들고,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영이 완전히 잠에 들고, 혜수는 도영의 손을 내려놓은 뒤 방을 나왔다. 그날 오전. 3년 차 황재성은 도영의 방으로 갔다. 한 손에는 오늘까지 피드백을 받아야 하는 논문을 꼭 쥐고. 문 앞에 서서는 심호흡을 했다.
‘후, 하. 떨지 말자. 그냥 피드백만 받고 나오는 거야. 나 황재성, 외과의 치프. 겁먹을 것 없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도영이 나왔다. 왼손으로 오른팔을 꽉 쥐고 있다.
“교, 교수님?”
당황해 우뚝 선 재성에게 갑자기 도영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
이게 무슨 의미인가,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자 오른손을 코앞까지 치켜든다.
“왜, 왜요?”
“잡아.”
“네?”
“이 손.”
“네?”
“잡으라고.”
험악한 말투와 함께 도영이 손을 쫙 펼친다. 재성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나보고 손을 잡아달라고? 왜? 대체 왜? 혼돈의 도가니 속에 온갖 가정을 다 하던 중.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는지 도영이 왼손으로 재성의 손을 잡아챘다. 그러더니 제 오른손 바닥에 턱 갖다 댔다.
“으흡!”
재성은 차마 비명은 지르지 못하고 삼켰다.
“손가락 굽혀.”
마비라도 된 것처럼 팽팽하게 쫘악 펼치고 있으니 오므리라 코치까지 한다.
“네, 넷!”
조심스레 손가락을 도영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웠다.
“이, 이렇게요?”
그러자 도영도 손가락을 굽혀 꽉 붙든다.
‘!’
졸지에 재성은 도영과 마주 보고 서서 다정하게 손을 잡게 됐다. 그것도 손깍지를 끼고. 한동안 마주 잡은 손을 내려다보던 도영이 이번에는 눈까지 지그시 감는다. 심지어 그 행동은 경건한 의식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재성은 비명을 또 겨우 삼켰다. 상대가 다른 이었다면 벌써 욕을 입 밖으로 한바탕 뱉었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순간 도영이 눈을 떴다. 그러더니 오만상을 찌푸리며 재성의 손을 내던진다. 마치 못 만질 거라도 만졌다는 듯한 반응이다. 그렇게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고는 몸을 휙 돌려 나가버렸다. 이 이상한 행동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나 지금 뭔가 당한 것 같은데…….’
멍하니 도영의 뒷모습을 보던 재성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앗, 논문! 교수님, 교수님!”
뒤늦게 종이를 흔들며 쫓아나갔지만 도영은 사라진 뒤였다. *** 월요일 아침. 의국으로 갔을 때, 의국 회의실의 게시판 앞에 레지던트들이 모여 있었다. 브리핑이 곧 시작될 시간인데도 여기서 이러고들 있는 걸 보니 꽤나 중요한 발표가 있나 보다.
“여기서 뭐 해요?”
혜수도 그들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그런데, 재성이 혜수를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신혜수. 너 또 뭐 잘못한 거 있냐?”
“네? 왜요?”
“이거 봐.”
“이게 뭔데요?”
“연구팀. 너 주도영 교수님 팀 됐는데?”
재성이 가리키는 곳에는 상반기 한대 병원의 연구팀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뜨고 재성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그곳에는 정말로 ‘신혜수’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연구팀? 이게 뭐예요?”
“이번에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연구 사업 두 개 다 우리 병원이 하기로 했잖아.”
“그래요?”
지난 겨울, 의학 분야의 발전을 위해 나라에서 연구비를 지원해 주는 사업 공모전이 열렸었다. 지역이나 병원의 네임 등 흔히 보던 지표와는 상관없이 연구 공모전으로만 대상자를 두 팀 뽑았는데 모두 한대 병원에서 뽑혔다. 정형외과의 한승원과 이식혈관외과의 주도영.
“그래서 연구팀을 꾸렸는데, 혜수 네가 주 교수님 연구팀원으로 뽑힌 거야.”
“이상하네요. 내가 왜 여기 있지?”
“네가 하겠다고 한 거 아니란 거지?”
“네. 아니에요. 전 이런 게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어요.”
제 앞가림 하기에도 바빠죽겠는데 논문을 쓸 정신이 어딨다고 손을 들겠는가. 게다가 도영이 팀장이라니. 더욱 말도 안 된다. 지금도 도영과 함께하는 이식혈관외과를 얼른 벗어나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연구팀이라니. 이래서야 과가 바뀌어도 주 교수님이랑 계속 부딪혀야 하잖아!
“이거 스텝들이 안 하면 보통 나 같은 치프들이 하거든. 정 안되면 그 아래 연차, 그러니까 유민이 같은. 국비 받는 거니까 어려운 논문들이란 말이야. 난 꼼짝없이 내가 될 줄 알았지. 그런데 네가…… 흠.”
재성이 입술을 불룩거린다. 싫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분명…… 기뻐하는 표정이다. 혜수가 제 대신 연구팀에 들어가 무척 좋기는 한데 당사자가 앞에 있으니 차마 티 내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랄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왜 여기 있는지.”
“진짜 네가 하겠다 한 게 아니란 말이지?”
“네.”
혼란스러운 마음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혜수를 보는 유민의 표정이 묘하다.
“뭐든 간에 결정은 났으니 난 이제 마음 안 졸여도 되겠다. 으아아.”
재성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회의실로 들어갔고 혜수를 가만히 쳐다보던 유민도 그 뒤를 따라 사라졌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뒤척대던 혜수는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지나가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혜수야, 아직 안 자?
“승원 오빠, 전화돼? 병원이야?”
-응, 오늘 당직.
“아, 맞다.”
-무슨 일 있어?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오빠 그거 한다며. 국가지원 연구팀.”
-맞아. 어떻게 알았어?
“나도 연구팀에 들어갔어. 주도영 교수님 팀. 몰랐는데 같은 팀 되어 있더라.”
-뭐?
크게 놀란 듯한 승원의 외침 뒤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이거 안 좋은 거야?”
-아니, 안 좋다기보다는…….
“그럼?”
-다른 연구보다는 빡빡할 거야. 주어진 기간이 3개월 조금 넘거든. 그 안에 케이스 모집부터 논문까지 다 써야 해.
“아.”
-국가 지원이니 만큼 주제도 쉽지 않은 거고. 그래서 나는 펠로우들이랑 팀을 꾸린 상태야.
“그렇구나.”
-네가 하겠다고 한 게 아냐?
“응.”
그래서 승원도 크게 놀랐다. 도영이 스스로 혜수를 팀에 넣었다는 거다. 제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주도영이 고작 1년 차 레지던트를 국가지원 사업에 넣었다니.
‘주도영, 이렇게 나온다고?’
“……무를 수는 없겠지?”
-아마도.
도영의 성정이라면 절대 무르지 않을 것이다.
“나 많이 힘들까?”
-…….
승원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가뜩이나 걱정하는 애한테 불안을 더해줄 수는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써봐. 그래도 도영이라면 기가 막히게 쓰니까. 네 경력에 큰 도움이 될 거야.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는 기본인 애니까.
“하아.”
-할 수 있을 거야. 늘 잘 해왔잖아.
“응, 알았어. 고마워, 오빠.”
-무슨. 얼른 자.
“굿나잇.”
전화를 끊은 혜수는 베개에 고개를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날 왜 넣으신 걸까.’
*** 느지막한 오후, 도영은 병원장 조병억의 호출로 병억의 방에 갔다. 노크와 함께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한승원.’
마찬가지로 도영을 알아본 승원이 눈매를 좁힌다.
“주 교수, 어서 와. 앉게.”
병억의 말에 도영은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에 있는 승원을 응시하며. 저를 쳐다보는 도영의 매서운 시선에도 승원은 피하지 않는다. 둘의 시선이 한동안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팽팽한 긴장을 깨트린 건 병억이었다.
“둘의 연구팀은 다 꾸려졌다지? 보자, 한 교수 팀은 전부 펠로우들이네. 흠.”
연구팀의 리스트를 찬찬히 훑던 병억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이게 누구야. 1년 차 신혜수? 1년 차랑 같이 한다고? 주 교수, 진심이야?”
“네. 맞습니다.”
“굳이 1년 차를 왜? 얘가 아는 게 뭐가 있다고.”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뛰어난 레지던트입니다. 성실하고 이해력이 좋으며 학습에 대한 욕구도 강합니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병억의 표정은 탐탁지 않아 보였다. 도영을 노려보는 승원의 표정은 더더욱.
“이럴 거면 차라리 2년 차를 넣지 그랬어. 아무리 그 선생이 뛰어나대도 2년 차보단 못하겠지. 음, 예를 들면 2년 차 조유민 선생 같은.”
은근슬쩍 제 딸의 이름을 말하는 병억이다. 그 빤히 보이는 속내를 보며 도영은 입을 비틀었다.
“지금이라도 바꾸는 게 어때. 1년 차보다는 2년 차로 가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미 다 공표된 내용이고 신 선생에게 할 일도 배정이 끝난 상태입니다.”
“배정이야 바꾸면 되지. 내가 과장한테 연락을 할게.”
“괜한 수고하지 마시지요. 신 선생의 참여 의지도 강합니다. 잘할 거라 굳게 믿습니다.”
도영의 어투가 점점 싸늘해져 갔다.
“그, 그래? 알았어. 자네 편한 대로 하게. 크흠.”
병억은 결국 꼬리를 내렸다. 도영이 이렇게 나오기 시작하면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아는 탓이다. 병억은 원장실 옆에 있는 작은 회의실을 연구팀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미리 조치를 해두겠다는 말과 함께 앞에 놓인 두 부의 연구계획서를 들어 올렸다.
“보자아, 그럼 앞으로의 일정은…….”
연구에 대해 병억과 논의를 한 뒤 도영과 승원은 병억의 방을 나왔다. 내과 의국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로 가려는데, 승원이 도영을 잡는다.
“주도영. 나랑 얘기 좀 해.”
“너랑 할 얘기 따윈 없는데.”
“잘 생각해봐. 있을 텐데?”
도영은 코웃음을 치고는 승원을 지나쳤다. 그런데, 승원이 성큼 다가오더니 도영의 손목을 잡는다. 굳이 반대편에 있는 오른쪽 손목을. 강하게 압박해 오는 힘에 도영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얘기하자는 거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넌 눈도 깜짝하지 않을 거잖아.”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승원의 힘은 만만찮았다. 도영이 오른팔에 힘을 강하게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승원은 일부러 오른 손목을 잡고 있었다. 고의로 제 약점을 건드린 승원을 보며 도영은 험한 욕설을 뱉었다.
“얼마든지 욕해.”
승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영의 손목을 꽉 붙들고 계단실로 갔다.
“이 손 안 놔?”
양손과 온몸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승원과 오른팔을 붙들려 제대로 쓰지 못하는 도영과의 몸싸움. 승자는 승원이었다.
“손 놔!”
거친 숨을 내쉬며 승원을 매섭게 노려보는 도영에게서는 당장이라도 어떻게 해버리겠다는 살기가 느껴졌다.
“이 새……!”
“주도영, 너. 무슨 속셈이야?”
승원은 문을 온몸으로 막고 나서야 도영의 손을 놔주었다.
“속셈이라니. 알아듣게 말해.”
“1년 차 신혜수. 왜 연구팀에 넣었어?”
승원의 입에서 혜수의 이름이 나온다. 도영의 심사가 더욱 뒤틀렸다.
“정형외과 교수가 우리 과 일이 왜 궁금한 걸까.”
“너답지 않잖아.”
“하. 무슨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여기까지 날 끌고 온 이유가 고작 그거란 말이지.”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내가 너에게 그걸 말해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이유는 없지. 그래도 대답해 줄 수는 있잖아.”
“싫다면.”
“…….”
둘은 한참 서로를 노려보았다. 계단실은 얼음이라도 두른 것처럼 싸늘해졌다. 도영이 먼저 날 선 공기를 가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한승원. 이번엔 내가 궁금한 게 생겼는데. 내 물음에 답해주면 나도 답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