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질투가 아니야
(26/110)
26. 질투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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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질투가 아니야
2022.04.30.
혜수가 승원의 무릎을 베고 있다. 잠이라도 자는 건지 눈을 굳게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승원은 누워 있는 혜수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고 있다.
행여나 깨져버리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마치 정말로 소중한 것을 쓰다듬는 것처럼.
승원의 따뜻하고 애정 어린 시선은 그대로 혜수에게 이어져 있었다.
그들을 감싼 몽글몽글한 공기는 무척이나 애틋해 보였고, 승원의 다리를 베고 잠든 혜수의 표정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한동안 그렇게 혜수를 바라보던 승원이 벽에 머리를 기댄다. 저도 휴식을 취할 생각인 건지 눈을 감는다. 손은 여전히 혜수의 머리를 쓰다듬는 채였다.
다리가 못이라도 박은 듯 굳었다.
혜수가 어떤 표정을 보일지 궁금해하던 것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불쾌함이었다.
‘구역질 나는군.’
저 둘을 떼놓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른다. 당장이라도 안으로 뛰어들어가 혜수를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저 달콤한 공기를 흩뜨리고 싶었다.
거친 몸짓으로 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던 도영은 멈칫했다.
들어가서 일으켜 세우면, 그다음은? 뭘 어쩌겠단 말이지?
지금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나도 이해를 하지 못하겠는데, 저들을 마주한다 해서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
복잡한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매던 도영은 애써 납득했다.
둘은 성인이며 사귀는 사이이다, 아마도.
호텔에서 보지 않았나. 승원이 혜수의 머리에 입을 맞추는 것을.
그러니 병동을 오가다가 만나서 이야기할 수도 있고, 서로 기대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지금 이렇게 격하게 반응할 이유가 없다.
도영은 거칠어진 숨을 애써 눌러내렸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하더라도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혜수의 평안한 얼굴을 보아 잠이 든 지 꽤 된 것 같았다.
그럼 문자는 누가 보낸 걸까.
‘당장 5분 전에 도착한 이 문자는……?’
신혜수는 미래의 활력징후를 예측해 예약 문자를 설정할 정도로 꾀를 부리는 아이는 아니다.
그렇다면.
오래지 않아 한 가지 답이 떠올랐다.
설마…… 한승원이 보냈다는 것인가?
도영은 휴대폰을 꺼내 지금까지 혜수가 보낸 메시지들을 주르륵 훑었다. 일 분의 오차도 없이 매 시각마다 도착한 메시지들을.
그럼…… 한 시간 전 문자는? 두 시간 전 문자는?
그것도 다 한승원이 보낸 건가?
‘하! 신혜수. 또 나를 속여?’
미간이 구겨지며 말아 쥔 양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힘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분노에 찬 눈길로 잠시 그들을 노려보던 도영은 몸을 돌렸다.
빠른 속도로 병동을 벗어났다. 좋은 밤 보내세요, 라는 간호사의 인사가 따라붙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도영은 제가 궁금해하던 것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쁜 이유.
‘내가 신혜수에게 시킨 일이 저들의 연애 놀음에 이용됐지. 그 사실에 기분이 더러워진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어. 그것 때문이야.’
도영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상대적으로 어두운 복도에 있다가 엘리베이터를 타니 조명이 눈을 찌른다.
자극적이다. 미간을 한껏 찌푸림과 동시에 익숙한 감각이 팔에서 시작된다.
겨드랑이에서부터 시작되는 떨림과 찌르는 듯한 통증.
‘빌어먹을, 또.’
최근 들어 통증이 잦아졌다. 한 달에 두어 번 있던 발작은 요새는 일주일에도 두세 번씩 찾아왔다.
통증이 잦아진 건 그날, 유민의 가족과 식사를 했던 날. 그즈음부터였을 것이다.
이틀 연속 통증을 겪었던 날, 견디다 못한 도영은 자신을 봐주는 교수에게 전화해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지금은 수술로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뿐.
-약을 다시 먹지 그래.
“다시 먹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증 경감 효과는 있어도 발생 자체를 줄여주지 않으니까요.”
-……주 교수도 알겠지만 결국 신경의 문제야. 마음을 편히 해야 해. 스트레스받지 말고.
“…….”
-명상이나 심호흡 같은 걸 자주 해.
“알겠습니다.”
-가능한 팔에 무리 가지 않게 하고. 운동은 꾸준히 하지?
“네. 변함없이 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전에 내가 말한 건 어때.
“보툴리눔 톡신 주입 말입니까?”
-그래. 차라리 근육의 수축을 아예 막아버리면 고통은 훨씬 덜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렇지. 자네도 알다시피 수술을 지금처럼은 못할 가능성이 크지. 오른팔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니.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래. 그래서 나도 적극적으로 권하지 못한 거야. 주 교수 직업이 직업인지라.
“……그건 조금 더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큰 도움이 되지 못해 어쩌나.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들어가게.
도영은 꼼짝없이 고통을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잘못해도 과하게 활성 되는 신경은 한 번 자극받기 시작하면 근육을 쉴 새 없이 비틀고 조였다.
도영은 다시 의국으로 갔다. 이 상태로는 연구실까지 갈 수 없다.
‘여기서는 안 돼.’
오른팔을 부여잡고 주위를 힐끔거렸다.
이 상황을 누군가 본다면 틀림없이 자신을 깎아내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할 것이다. 지금도 이 병원에는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다.
도영은 제 팔 상태를 완벽히 가리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
그 결과 지금은 부모님조차 도영이 완전히 회복된 것으로 안다.
단 한 사람,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였던 한승원만 빼고.
도영은 이를 악물고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고 뛰었다. 굳게 닫힌 의국의 문이 보인다.
보안 장치에 명찰을 태그해야 했기에 왼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런데, 명찰이 없다.
‘어디 갔지?’
한시라도 빨리 약을 먹어야 하는데.
‘제길, 어딨냐고!’
손으로 정신없이 몸을 더듬는데,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교수님? 혹시 이것 찾으세요?”
도영이 홱 뒤를 돌아봤을 때,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뻘게진 도영의 얼굴과 비 오듯 흘리는 땀을 본 사람은 아마 누구든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어머! 교수님! 괜찮으세요? 어, 얼굴이 왜, 무슨 식은땀을 이렇게 많이…….”
“조유……민.”
놀란 표정으로 다가오는 유민의 손에 도영의 명찰이 들려 있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며 오다가 떨어트린 것을 주운 모양이다.
“어디 아프세요? 응급실로 가실래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아니면 제가 타이레놀이랑 엔세이드(NSAIDs: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 좀 병동에서 갖고 올게요.”
유민이 하는 말은 도영의 머릿속까지 전달되지 못했다. 나긋한 목소리는 웅웅 울리기만 해 무슨 말을 하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간신히 뜨고 있는 눈에는 오직 유민이 들고 있는 명찰만 들어왔다.
“금방 갔다 올 테니 여기서 잠시만…….”
도영은 몸을 돌리는 유민의 팔을 억세게 잡아끌었다.
“그거 이리 내, 빨리.”
“하지만 지금 교수님 상태가 너무 심각해 보여요. 이대로 두면 안 될 거예요.”
땀을 닦아주려는 듯 도영의 얼굴로 손을 뻗는다.
도영은 더욱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유민의 손을 힘주어 쳐냈다.
“약혼녀 행세는 집어치워. 네 인생 계획에 동참해 줄 생각은 없으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저는 그냥 약을 챙겨 드리려고 한 것뿐이…….”
도영은 유민의 말이 끝나기 전에 명찰을 잡아챘다. 그리고 유민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꾹꾹 눌러진 단어들이 신음과 함께 뱉어졌다.
“너.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보고 있지도 않은 거야.”
“……알겠어요.”
“꺼져, 당장.”
“하지만 교수님. 지금 상태가…….”
“제발 꺼지라고!”
부들거리는 손으로 잠금장치에 명찰을 태그했다. 띠릭 소리와 함께 도영은 안으로 들어갔다.
유민은 멀어지는 도영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그대로 서서 쳐다보았다.
방으로 들어간 도영은 책상 위 서랍에 넣어둔 약병을 잡아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을 꺼내 입안에 욱여넣었다.
무너지는 몸을 간신히 소파로 끌고 가 뉘었다. 어느새 흠뻑 젖은 수술복이 몸에 들러붙는다.
“하아, 하아.”
열기 가득한 호흡이 잘게 터져 나온다. 팔꿈치가, 팔이, 손가락 마디마디가 절로 뒤틀리고 수축한다.
지긋지긋하다. 신경이 발작할 때마다 이성은 빼앗기고 온몸은 결박당한다.
어릴 때에는 울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그저 견딘다. 빨리 약을 털어 넣고, 팔을 쥐고, 몸을 웅크린 채 억겁 같은 시간이,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이 지나가길 견딘다.
“하아, 하아.”
일부러 심호흡을 했다. 조금이나마 신경을 안정시키고 통증을 덜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승원의 무릎을 베고 있던 혜수가, 혜수를 다정하게 바라보던 승원이 떠오른다.
‘제기랄!’
도영은 왼손에 쥐고 있던 약병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유리로 된 약병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쉽게 부서졌다.
조금 전까지 절박하게 찾던 약들이, 조각조각 난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헉!”
잠에서 깬 혜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얼마나 잔 거지? 바이탈 체크해야 하는데!’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누가 손을 옆에서 잡아당긴다.
“깼어? 왜 이렇게 놀라.”
“승원 오빠?”
“너 진짜 잘 자더라. 코까지 골던데. 누가 꽃돼지 아니랄까 봐. 쿨꿀~ 쿨꾸울.”
“으아악. 나 얼마나 잔 거야? 지금 몇 시지?”
우왕좌왕하는 혜수에게 승원이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6시 조금 지났어.”
“어떡해! 바이탈 메시지 보내야 하는데!”
“걱정하지 마. 내가 보냈어. 2시 것부터.”
“헉. 진짜?”
그러고 보니 승원의 두 눈이 빨개져 있다. 베고 잤던 승원의 허벅지에는 혜수가 흘린 침으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미안해. 나 그냥 깨우지 그랬어.”
“일부러 놔뒀어. 좀 자라고. 어제도 밤새웠다며.”
“……고마워.”
“나 때문인데, 뭘.”
승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좌우로 비틀었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더니 혜수가 베고 있던 오른쪽 다리를 과장되게 절뚝인다.
“으윽, 그건 그건데 엄청난 돌덩이를 얹고 있었더니 다리에 감각이 없네.”
“오빠악!”
혜수가 방방 뛰자 승원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뒤, 환자를 다 살핀 혜수도 나갈 채비를 했다.
“어디 가게?”
“응급실. 환자 있는지 미리 좀 보게. 바이탈 시간에 늦으면 안 되잖아.”
“그럼 같이 나가자. 나도 중환자실 가야 해.”
승원과 헤어진 혜수는 응급실에 갔다.
다행히 환자가 없었다. 시간을 보니 도영에게 다음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조금 여유가 있다.
‘후딱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겠다.’
의국으로 가니 시간이 시간인지라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긴 복도를 지나 탕비실로 걸어가는데 웬일로 도영의 방문이 조금 열려 있다.
‘이상하네. 문이 왜 열려 있지?’
의아했다. 환기를 위해 방문을 조금 열어놓는 교수들도 있기는 했지만, 도영은 방문을 열어놓는 경우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도영은 내부를 남에게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전에 재성이 절대 방에 들어가지 말라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었지.
그리고 혜수는 그것이 내부를 가득 채운 운동 기구들 때문이라 짐작해 왔다.
그런데, 문틈으로 소파에 도영이 누워 있는 게 보인다. 문제는 그냥 누워 있는 게 아니었다.
“어, 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얼핏 봐도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혜수는 문을 벌컥 밀어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