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들을 유치하게 만드는 여자
(25/110)
25. 그들을 유치하게 만드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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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그들을 유치하게 만드는 여자
2022.04.27.
“지금 저 환자 처치실로 올리고 일요일까지 두 시간마다 바이탈(vital sign:활력징후). 신 선생이 직접 체크해서 내 폰에 메시지 보내.”
‘!’
혜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벌이 나에게 떨어지다니!
도영은 지금처럼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인턴이나 레지던트에게는 두 시간마다 환자의 활력 징후를 체크하란 벌을 줬다. 예외는 그 누구도 없었다.
두 시간마다 그깟 오 분 정도 할애하는 게 뭐가 문제냐 할 수 있겠지만, 환자에게 몇 분씩 붙어 있으려면 일의 동선도 꼬이고 무엇보다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다.
동준과 환자를 도와주려다가 이렇게 일이 꼬일 줄이야.
‘물론 교수님 입장에서는 내가 일을 미룬 게 맞기는 한데……. 하아.’
대꾸도 못 하고 얼이 빠진 채 서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줄곧 혜수를 쏘아보던 도영의 시선이 혜수의 뒤로 휙 넘어간다.
“주 교수. 신 선생은 잘못 없어. 내가 시켜서 한 일이야.”
익숙한 부드러운 목소리. 돌아보니 제 바로 뒤에 승원이 서 있었다.
‘승원 오빠!’
“잘못이 없다고?”
도영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러니 바이탈은 좀 봐줘.”
“하. 지금 한 교수가 우리 상황을 모르나 본데. 신 선생은 당장 봐야 할 환자를 보지 않고 딴짓을 했어.”
“알아.”
“알아? 그래, 알겠지. 네 환자니.”
도영이 하, 웃었다.
“그렇다면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데. 제 일을 내팽개친 게 맞는데 왜 봐줘야 하지?”
“신 선생에게 일을 시킨 게 나니까. 내 잘못이야. 교수가 도와달라는데 레지던트가 어떻게 무시하겠어.”
둘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찮다. 팽팽한 대화가 조금의 여유도 두지 않고 이어졌다.
졸지에 커다란 두 남자 사이에 끼게 된 혜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니 신 선생에게는 화내지 마.”
꿈틀대던 도영의 눈썹이 이번엔 가운데로 확 모였다. 미간에 금이 깊게 패었다.
“아니. 난 이해가 가지 않는데. 신 선생이 놓친 블리딩(bleeding:출혈)이라도 있었더라면 내 환자는 지금 수술방에 들어갔어야 해.”
“내가 시켰다고. 신 선생에게 이럴 이유 없다고. 나한테 말해. 내가 전부 책임질게.”
“하.”
도영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고 마주 선 갈색빛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네 여자친구 편들어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한승원, 너 지금 실수하는 거다.
도영은 다시 혜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내리쬔다.
“신혜수 선생.”
“네, 네?”
“두말하지 않지. 바이탈 직접 체크해서 한 시간마다 내 폰으로 메시지 보내.”
“네에?”
혜수의 입이 딱 벌어졌다. 말을 마친 도영은 그대로 뒤돌아서 응급실을 나갔다.
“뭐? 주 교수!”
승원이 도영을 붙잡기 위해 쫓아 나갔지만 도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다시 돌아온 승원이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주도영 정말!”
얼빠진 표정으로 도영이 사라진 자리만 보고 있는 혜수에게 다가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신 선생, 미안. 내가 괜히 나서서.”
혜수의 일을 좀 덜어줘 보자고 시작한 건데 크게 실패했다. 오히려 혜수의 일이 더 늘어나 버렸으니.
“내가 저녁에 주 교수 찾아가서 다시 말할게. 주 교수가 저렇게 나오면 지금은 아무도 못 말리거든? 괜히 더 긁어서 부스럼 만드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어.”
“아, 아니에요, 교수님! 제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요. 주 교수님께 노티부터 했어야 했는데. 제가 까먹었어요. 라인에 정신이 팔려서.”
“하지만…….”
“저 진짜 괜찮아요. 수술 다시 들어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얼른 가보세요.”
“신 선생.”
“괜찮다니까요. 가요, 가.”
간호사들 몰래 승원에게 슬쩍 눈짓했다.
‘가, 빨리 가라고, 오빠! 간호사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
혜수를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던 승원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승원이 수술실로 사라지고, 이 상황을 숨죽여 지켜보던 간호사들이 다가왔다. 하나같이 불쌍하게 혜수를 쳐다본다.
“힘내요, 선생님. 한 시간 바이탈이면 그래도 선방한 거예요. 얼마 전엔 30분 바이탈도 있었대요.”
“그런데 한승원 교수님 정말 좋으시다. 대뜸 나서주는 것 봐요. 멋져라.”
한 간호사가 승원의 흉내를 냈다.
“내가 시켰다니까! 키야. 스윗하다, 진짜.”
“대천사가 괜히 나온 별명이겠어. 사탄이랑 붙여놓으니까 더 비교되네. 그렇죠, 선생님?”
혜수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네. 아하하…….”
그날 밤, 병동 일을 다 끝내놓고도 혜수는 숙소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영이 아까 시킨 대로 처치실에 있는 환자의 곁에 붙어서 한 시간마다 활력 징후를 체크해 보내주어야 했다.
[교수님, 1년 차 신혜수입니다. 현재 BP(혈압) 156/87, HR(심박수) 97, BT(체온) 36.9도, 산소 6L에 SpO2(산소포화도) 99%입니다.]
네 번째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혜수는 벽에 머리를 툭, 기댔다.
어제 당직이었던 터라 잠을 자지 못한 지 36시간째다. 거기다가 낮에 응급실의 정형외과 환자 때문에 힘을 썼더니 너무 피곤했다.
“흐아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졸리냐.”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승원에게서 온 메시지다.
-혜수야, 지금 처치실?
-응. 처치실. 환자 옆에 앉아 있어.
-커피 마실래? 사갈까?
-아니야.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더니 배불러.
-그럼 탄산음료?
-아니, 괜찮아. 근데 오빠 아직도 병원인 거야? 오늘 당직도 아니잖아.
승원은 일과가 모두 끝나자마자 밖에 나가서 떡볶이와 32가지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을 사와 혜수를 먹였다.
그러고는 외과 의국으로 가 도영의 방문을 두드렸는데, 도영은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았다.
전화를 하면 문 너머에서 소리는 들리는데 도통 받지를 않는다. 나중에는 무음으로 해두었는지 벨 소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다.
이 나이 먹고 어떻게 잠수를 타냐고, 너 지금 매우 유치한 것 아냐는 도발적인 메시지에도 도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승원은 도영과 담판을 짓지 못하고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 뒤로 지금까지 계속 혜수에게 엄청나게 미안함을 표시하고 있었다.
-오빠, 난 괜찮으니까 가서 ㅈㅏ.
-어떻게 그래. 나 때문인데.
-괜찮ㄷ;ㅐㅕㄷㅕ.
답장을 보내는데도 손가락이 꼬이고 눈이 감긴다.
‘졸려…… 아, 안 돼!’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올리며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러다 멍들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는 것보다는 낫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환자의 옆에 앉아서 조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하지만 그 노력도 잠시, 주체할 수 없이 또 잠이 몰려온다.
‘너무 졸려…….’
혜수는 저도 모르게 졸기 시작했다.
머리가 까딱까딱하더니 휴대폰을 쥔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잠결에도 축축 처지는 목이 아픈 게 느껴졌지만 눈이 감기는 것을 이길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은 참으로 달콤했다.
사방으로 헤드뱅잉을 얼마나 했을까.
어느 순간 목이 편하게 고정됨을 느꼈다. 자면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는 폭신하면서도 탄탄한 무언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으음, 딱 좋다. 편하다.’
거기다가 누가 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다. 머리카락을 살랑이는 감각이 간지러우면서도 기분 좋다.
‘으음. 이건 꿈이겠지? 그래도 좋아.’
그렇게 혜수는 점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 뒤, 도영에게 다섯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교수님, 1년 차 신혜수입니다. 현재 BP 153/79, HR 92, BT 36.9, 산소 4L에 SpO2 99%입니다.]
시곗바늘은 어느덧 새벽 두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마침 오늘 읽으려고 뽑아놓은 논문을 다 읽은 도영은 보던 것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을 뻗어 목을 좌우로 늘렸다.
책상 주변을 말끔히 정리한 뒤에는 휴대폰을 집었다.
메시지 함을 보는데 혜수의 메시지 아래에 승원에게서 온 메시지들이 보인다.
-나한테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듣고 싶지 않아?
그다음 메시지를 눌러보았다.
-주도영, 설마 잠수타는 거냐? 너 지금 몇 살인 줄 알아?
그다음.
-유치하기 짝이 없다. 전화 받아라.
‘내가 유치하다고? 하.’
어이가 없다. 지금 일터에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애인 편을 들고 나선 게 누군데 누가 누구더러 유치하다는 건가.
코웃음을 치던 도영은 메시지 삭제 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에 시원하게 지워졌다. 이걸 왜 진작에 지워버리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도영은 휴대폰을 대충 가운에 쑤셔 넣고 방을 나섰다. 오늘도 시간이 늦어 연구실에서 자야 했다.
불을 끄고 문을 닫으려는데 문득 문자가 또 떠오른다.
‘유치하다고? 하!’
잠깐 멈춰 선 채 혀를 거세게 찼다.
이젠 정말로 문을 닫으려는데, 이번에는 응급실에서 저를 쳐다보던 혜수의 얼굴이 생각난다.
저를 발견하고 허둥지둥 달려와 브리핑을 하던 모습.
혹시나 혼이 날까 안절부절못하던 모습.
활력 징후를 한 시간 간격으로 체크하랬더니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입만 딱 벌리고 있던 모습.
‘……유치하다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 시간마다 체크하라고 한 것은 과한 듯싶다.
보통 도영은 자기 일을 빼먹은 레지던트에게 두 시간 간격으로 보고하라 해왔다. 이번에도 그러려고 하다가 승원 때문에 홧김에 한 시간을 부른 것이다.
‘내가 유치했나?’
되짚어보니, 제 행동이 의아하기는 하다.
승원이 흑기사처럼 나서는 게 꼴 보기 싫기는 했지만, 왜 애꿎은 신혜수에게 일을 더 주었는지.
‘……유치한가. ……줄여 줄까.’
그동안 봐 온 혜수는 똑똑한 레지던트였다. 첫날 회진에서, 수술 전 준비에서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 보여준 모습들은 봐줄 만했다.
머리도 꽤 뛰어난 편 같고, 일하는 걸 보면 센스도 있다. 아까 응급실에서는 수면유도제를 이용해 훌륭하게 일을 처리했다. 비록 당시에는 화를 내기는 했지만.
‘이젠 일을 미루면 안 된다는 걸 알았겠지.’
지금까지 만으로도 제 잘못을 충분히 깨달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해줄 생각은 없다. 자신의 일을 놓친 것은 사실이니 한 시간마다 해야 했던 보고를 원래대로 두 시간으로 정정해 줘야겠다 싶다.
도영은 의국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68 병동.
“교, 교수님! 어쩐 일이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시던 일 하십시오.”
야밤에 갑자기 나타난 도영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당직 간호사를 지나쳐 걸었다.
복도를 나아가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두 시간을 한 시간으로 줄여주면 이번엔 신혜수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꽤나 궁금하다.
처치실 앞.
문을 열기 전, 도영은 우연히 문의 위쪽에 나 있는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부는 환자의 수면을 위해 조도를 줄여놓은 상태였다.
방은 전체적으로 어두웠고 환자의 머리맡에만 노란빛 불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아래로 수액을 주렁주렁 달고 자고 있는 환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의 몸에 연결된 온갖 의료기기는 모니터에 구부러진 그래프를 그리고 있었다.
모니터 옆에는, 더욱 컴컴한 그곳에는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저기 앉아 있는 건가?’
안이 잘 보이지 않아 조금 더 고개를 바짝 가져갔다.
그리고, 제 눈에 들어오는 장면에 도영은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두 개의 의자에는 모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주인공은 당연히 이 안에 앉아 있을 거라 생각한 신혜수.
또 다른 한 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
‘한……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