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정략 약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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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정략 약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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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정략 약혼(1)
2022.04.16.
두 남자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분노가 차오르는 도영의 눈동자와 승원의 단단한 눈동자가.
샴푸 향과 혜수의 체향이 달콤하게 뒤섞여 코에 깊숙이 들어찰 때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일그러진 도영의 얼굴이 사라지고,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갔다.
아주 잠깐이었다. 도영과 승원이 마주 본 것은.
“오빠, 왜?”
머리카락을 다 빼낸 혜수가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이랑 부딪히려 해서. 다 했어?”
“응. 가자. 영화 시간 늦겠다.”
혜수는 활짝 웃으며 승원에게 팔짱을 꼈다.
L 호텔 49층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도영과 유민이 걸어 나왔다.
유니폼을 잘 차려입은 지배인이 도영에게 다가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주 교수님. 의원님은 아직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자리로 안내해 드릴까요?”
“네, 안내해 주십시오.”
직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들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영아, 유민 양.”
또 다른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도영의 아버지 주기철과 어머니 이은숙이 서 있었다.
은숙은 한 손으로는 잘 세공된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은숙이 걸을 때마다 몸이 좌우로 기우뚱 흔들린다.
“어머님, 아버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조유민입니다.”
유민은 부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부드러운 인사는 매끄럽고 친근해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들이 처음 만난 사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유민 양, 아니. 유민 선생이라 불러야 하나. 반갑네. 도영이가 잘 데리러 갔던가?”
“네, 아버님. 그냥 유민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럴까. 그럼 편하게 부르겠네.”
“네, 아버님. 교수님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하하, 유민 양이니 우리 도영이가 군말 없이 데리러 갔지. 평소엔 뭘 하나 시켜도 귓등으로도 안 듣거든.”
상대방에 대한 적절한 추켜세움과 아들에 대한 장난이 섞인 말에 주위에는 작은 웃음이 번졌다.
무얼 생각 중인 건지, 우뚝 서서 여전히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도영에게는 빼고.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얘기할까.”
기철은 TV에서 볼 수 있었던 예의 그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손짓을 했다.
그리고 잠시 뒤, 유민의 아버지인 한대 병원의 원장 조병억과 어머니 이연실이 도착하면서 양 집안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의원님. 통화는 자주 했지만 직접 뵙는 것은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지난번 남해에서 골프를 친 이후 처음이지요? 하하.”
“그날 내기 골프에서 진 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지 뭡니까. 다시 한번 가셔야지요.”
“그땐 우연이었죠. 제가 어떻게 조 원장님을 또 이기겠습니까. 그냥 제가 이긴 걸 마지막으로 골프는 그만하면 안 되겠습니까?”
“아하하.”
병억과 기철의 농이 섞인 대화를 시작으로 은숙과 연실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오시느라 힘들진 않으셨어요?”
연실이 은숙의 의자 팔걸이에 걸쳐진 지팡이를 쳐다보았다.
“그럼요. 이젠 하도 익숙해서 한 몸 같은걸요. 한쪽 다리가 짧아 걷기가 불편할 뿐 다른 건 전혀 힘들지 않아요.”
“대단하시네요.”
“무얼요.”
“그런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주 교수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나 봅니다. 어쩜 이리 잘생기고 멋질까요. 공부도 늦게 시작했는데 몇 달 만에 의대에 갈 성적이 되었다면서요.”
“엄마, 그 이야기는.”
유민이 연실의 팔을 당기며 작게 속삭였다.
“어머나. 나 좀 봐.”
연실이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잘 관리된 손톱에 박힌 화려한 색감의 파츠가 빛을 받아 번쩍였다.
“……아닙니다. 과찬이세요. 유민 양이야 말로 뛰어난 인재라고 들었습니다. 실력은 물론이고 마음씨 또한 병원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요.”
“어머, 정말요? 주 교수가 그렇게 말을 했나요?”
짐짓 놀라는 척을 하며 도영을 보았는데, 도영의 얼굴은 말 그대로 오물이라도 밟은 표정이라 연실의 시선은 조용히 다시 은숙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연실의 목소리는 한 톤 더 높아졌고, 상냥해졌다.
“우리 유민이가 주 교수님, 주 교수님, 늘 입에 달고 다니던 이유가 있었네요. 둘이 이렇게 사이가 좋은 줄 알았으면 진작 이런 자리를 마련할 것을요. 이 커플, 보기에 참 좋습니다. 오호호.”
웃음을 그친 연실이 옆에 앉은 유민을 바라보았다.
“유민아, 병원에서 주 교수는 어떻니? 얘기 좀 해줘.”
유민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음, 엄마가 지금 보시는 대로예요. 병원에서도 늘 당당하시고, 멋지세요. 환자들에게도 친절하시고. 신의 손이라고 칭찬이 자자해요.”
나긋나긋하게 도영의 이야기를 하는 유민의 얼굴에는 발간 분홍빛이 피어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방금 결혼한 제 짝의 자랑을 하는 새색시처럼 보였다.
“역시, 우리 주 교수. 너무 대단합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외과 의사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연실은 새빨간 입술을 벌리며 감탄사를 연달아 내뱉었다.
“그럼 이 손이 백만 불짜리 손인가요?”
팔을 뻗어 덥석 도영의 오른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도영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지만 아랑곳없이 세게 움켜쥔다.
양 손목에 여러 겹으로 감긴 팔찌가 손짓에 맞추어 달그락거렸다.
코스가 시작되고 요리가 하나둘씩 나오면서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도미구이가 참 맛있습니다. 의원님.”
“저는 이 집의 도미를 제일 좋아합니다. 어딜 가서 먹어도 이 집만큼 하는 곳이 없더군요. 바삭한 껍질의 풍미와 살의 감칠맛이 참 조화롭습니다.”
“이거 참, 미식회에라도 온 것 같군요. 의원님의 입맛에 맞추려면 제가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입맛은 초등학생이라고 우리 와이프가 늘 그럽디다. 아, 술은 기가 막히게 잘 골라낸다 하더군요.”
“아하하.”
넓은 룸에는 다시 웃음이 번졌다.
“다음에는 조 원장님이 좋아하시는 식당으로 가시지요.”
“좋습니다. 마침 의원님께 꼭 소개해 드리고 싶은 한정식집이 있습니다.”
“오, 거기가 어딘가요?”
“의원님도 혹시 아시는 곳일까요. 북한산 초입에 있는 곳인데요.”
음식이 담긴 접시와 와인 잔들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졌다. 코스의 시간이 긴 프렌치 레스토랑이었지만 두 집안의 부모들과 유민, 다섯 명 사이에서는 이야기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코스인 한입 크기의 알록달록한 디저트가 담긴 접시가 나올 때까지도 도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원님, 요즘 날씨가 참 좋지 않습니까.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맞습니다. 무언가를 이루기엔 딱 좋은 날씨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약혼식은 언제로 할…….”
쾅, 무언가 벽과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에 일순 대화가 끊겼다.
도영이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섰다. 그 뒤로 자리에서 밀려 나온 의자가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었다.
“식사가 끝났으니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도영아!”
은숙이 도영을 불렀지만 도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을 떠났다.
“제가 가볼게요. 말씀들 나누시지요.”
은숙이 지팡이를 짚고 몸을 일으켜 도영을 따라 나갔다.
“…….”
“…….”
도영이 일으킨 소란에 잠깐 끊어졌던 대화는 곧 다시 시작되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무더위가 오기 전이면 좋겠습니다.”
“그럼요. 경사는 일찍 알리고 오래도록 나눠야지요.”
“아하하. 이거 참. 원장님과 저는 참으로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동감입니다.”
룸 안에는 다시 웃음이 번졌다.
조금 전 어떤 소리가 났었는지, 누가 사라졌는지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기묘한 웃음 속에 양 집안의 약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도영아, 도영아!”
급히 도영을 뒤쫓던 은숙은 바닥에 고인 빗물 때문에 그대로 미끄러졌다. 은숙이 체중을 버티던 얇은 지팡이는 대리석 위에 고인 물에 무력했다.
“아악!”
“어머니!”
은숙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급히 뛰어온 도영이 은숙을 받아냈다. 다행히 은숙은 바닥과 부딪히지 않았다.
“조심 좀 하셔야지요!”
은숙은 도영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온전한 다리를 툭툭 두들기며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영은 급히 무릎을 꿇고 은숙의 발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괜찮으신 거예요?”
“응, 아무렇지 않다. 어휴 놀래라, 다칠 뻔했네. 그치?”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잖아요! 하마터면 어머니 다리가 또!”
붉어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던 도영이 말을 억지로 삼켰다. 삼킨 숨을 거세게 내쉬니 어깨가 들썩인다.
도영은 지금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 이 약속부터 억지로 나온 것이다. 제발 자리만 지켜달라는 어머니의 간청에.
유민의 집에 가서 유민을 데리고 와야 했고, 이곳에 와서는 승원과 혜수가 같이 있는 것을 보았다.
심지어 승원은 혜수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지.
또 갑작스럽게 약혼 이야기를 들었으며, 어머니는 다리를 다칠 뻔했다.
‘제길!’
도영은 레스토랑의 지배인을 불렀고 곧 난처한 표정의 지배인이 도영 앞에 섰다.
“L 호텔 레스토랑 수준이 이 정도입니까? 눈길이 닿지 않는 바닥이면 관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까?”
격해진 도영의 모습에 지배인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교수님. 식사가 끝나기 전에 닦으려고 했는데…….”
“저희가 일찍 나온 탓에 닦지 못했다는 겁니까, 지금?”
“그, 그게 아니라.”
“제가 변명이나 듣자고 당신을 부른 줄 아십니까?”
보다 못한 은숙이 도영의 팔을 잡아당겼다.
“도영아, 그만해. 큰 소리 내지 말자. 응? 아빠 선거 때문에 예민하실 때야. 기사라도 나면 골치 아파지잖니.”
“하아.”
두어 번 숨을 크게 들이쉰 도영이 머리를 거세게 쓸어올렸다.
들썩이던 어깨가 조금 가라앉자 은숙은 도영의 옆에 다가가 손을 살짝 잡았다.
“엄마랑 얘기 좀 할래, 도영아?”
은숙은 옆에 있던 스툴에 앉았고 은숙의 손에 이끌린 도영도 그 옆에 앉았다.
“하아……. 약혼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미안해. 미리 말하지 않아서. 약혼이라고 하면 네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서 그랬어.”
“이런 자리까지 마련된 것 보면 이미 말은 끝났겠군요.”
“…….”
“의원님이 단순히 밥 한 끼 먹자고 저를 부른 것은 아닐 테니까요.”
도영은 아주 쉽게 기철이 저와 유민을 약혼시키려는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기철은 최근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기존 법의 허점을 찌른 이 법안에 의사들 다수는 물론이고 여야 의원들 할 것 없이 모두 기철에게 손을 들어준 상태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오직 급진 의료단체들뿐이었다.
그런데 조유민의 아버지 조병억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학병원의 원장이다. 그 외에도 질병관리본부의 본부장 이력을 가지고 있고 현재는 대한내과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게다가 유민의 친척들은 의료계의 요직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유민과 사돈이 된다면 의료 단체들도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기철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즉, 기철의 민생 안정 공약이 큰 힘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가올 서울 시장 선거에서 기철의 당선은 더욱 확실시될 것이다.
그리고 더 먼 미래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맞아.”
은숙은 말을 돌리는 것은 체념한 듯했다.
“솔직히 말하마. 네가 아버지 좀 도와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