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
(21/110)
21.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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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
2022.04.13.
승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혜수의 몸을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져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혜수를 보며 승원이 씩 웃는다. 평소 장난을 칠 때의 그 눈빛이다.
“너 머리 또 안 감았지? 냄새나잖아, 웩.”
코를 틀어막는 승원을 보며 혜수는 도끼눈을 떴다.
“뭐라고? 아침에 감았거든!”
“그래? 이상하네.”
코를 킁킁이며 다시 얼굴을 들이미는 승원을 혜수는 힘주어 밀어냈다.
“우씨이, 죽을래?”
“크큭. 나가자. 늦겠다.”
승원은 손을 뻗어 혜수를 일으켜 주었다.
L 호텔의 로비 라운지.
승원과 혜수는 창가 옆 테이블에 앉아 애프터눈 티 세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수가 상체를 까딱까딱 흔든다.
“그렇게 좋아?”
“그러엄. 오랜만에 외출하는 건데. 날씨도 너무 좋잖아.”
곧 테이블 위에는 티포트에 담긴 따뜻한 차와 온갖 과자가 담긴 3단 트레이가 준비되었다.
“세상에. 이 아름다운 자태를 좀 봐! 내가 이 호텔 애프터눈 티 세트를 얼마나 먹어보고 싶었다고.”
“진작 와 보지 그랬어. 이거 이번 달이 마지막이라며. 자칫하다간 못 와볼 뻔했네.”
“비싸기도 하고. 무엇보다 티케팅도 어렵고. 그리고 오빠 아니면 같이 올 사람이 없는걸.”
“가은이는?”
“가은이는 주말이면 남친 쫓아다니기 바빠. 평일에는 내가 전혀 시간이 안 되니까.”
“그러네. 가은이 못 만난 지도 꽤 됐겠네.”
“맞아.”
그러고 보니 한대에 들어와서는 가은이를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전화며 문자는 자주 주고받는데 얼굴을 본지는 한참 됐다.
“잘 지낸대? 요새도 바쁘대?”
“그럼. 김가은 팔자가 얼마나 좋다고. 틈만 나면 비행기 타고 해외 나가지, 때 되면 남친 바꾸지.”
“여전하구나.”
“응.”
혜수가 샌드위치를 하나 들었다.
“잘 먹을게 오빠!”
“많이 먹어.”
승원도 혜수를 따라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한 입 베어먹었다.
“가은이 오늘은 제주도 가 있을걸. 나보다 더 바쁜 애야. 오죽했으면 내가 대신 선을 나갔겠어.”
승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뭐라고? 선?”
‘아차.’
실수다. 혜수가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오빠.”
“말해줘. 선을 대신 나갔다는 거야?”
“어, 어?”
“혜수 네가 가은이를 대신해서 나갔다고?”
하지만 승원은 평소와 다르게 집요했다.
“응?”
“아이, 오빠. 이거 엄마 아빠한테는 비밀인데…….”
엄마와 아빠가 듣는다면 지금 네가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모자랄 판에 누구 선을 대신 나가느냐며 한마디씩 할 것이다. 술을 대가로 받기로 하고 그 자리에 나갔다는 것을 알면 더더욱 잔소리 폭격을 들을 것이다.
“알았어. 아무 말 안 할게. 언제 나간 거야?”
머리를 쥐어뜯던 혜수가 띄엄띄엄 말을 꺼냈다.
“작년 말에. 12월쯤? 가은이가 꼭 나가야 하는 자리라고, 급하다고 갑자기 연락이 왔었어. 나보고 자기인 척하고 잠깐만 있어 달래서. 마침 근처에 있다가 나갔었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승원이 여태 쥐고 있던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손에 묻은 빵가루를 털고 물수건으로 손 마디마디를 닦는다.
“뭘 어떻게 돼. 그냥 밥 먹고 이야기하다가 헤어졌지.”
“그럼 지금은 그 남자랑 연락 안 하는 거야?”
“그…….”
답을 하기가 망설여진다.
‘이걸 연락한다고 말을 해야 하나, 안 한다고 말을 해야 하나?’
그 남자와 연락이야 매일같이 한다. 목적이 연애나 결혼이 아니어서 그렇지.
간혹, 아니 꽤 많이 질책과 잔소리도 섞여 있는데.
고민하던 혜수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에이, 어차피 대리로 나간 건데 뭐. 그쪽도 가은이 집안 보고 선 자리 나온 걸 텐데. 내가 나간다고 되겠어?”
가은이의 집안은 대대로 정치인을 배출해왔다. 지금 가은이의 아빠는 국회의원이자 제1 야당의 당 대표이다. 가은이의 언니 또한 다음 선거에서는 비례대표제를 통해 국회의원 당선을 노리고 있다.
“그 남자 네가 보기엔 어땠는데?”
하지만 승원은 맞선의 배경 따위에는 관심이 없나 보다. 오직 혜수가 만났던 그 남자에 대한 질문을 했다.
“어?”
“그 남자는 혜수 네 맘에 들었느냐고.”
“마음에 들고 자시고 할 게 없었어.”
“어째서?”
“그, 그게. 왜냐면 난 대타로 나간 거고…….”
“대타로 나갔어도 남자가 마음에 들 수는 있었을 거 아냐.”
“그냥 별생각을 못 했어.”
“그 정도로 별로였다는 뜻인가? 남자는 뭐 하는 사람이었는데?”
“나, 나도 잘 몰라.”
“나이는?”
“그…….”
승원이 오늘따라 끈질기다. 더 이상은 둘러대지 못하겠다.
“실은 오빠.”
승원과는 지금껏 숨기는 것 없이 지내왔다. 외동으로 자란 둘 모두에게 서로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엄마와 아빠, 가은에게도 말 못 할 혜수만의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승원이었고, 그건 승원에게도 혜수가 마찬가지였다.
‘그래. 승원 오빤데 뭐 어때. 다른 사람한테 말할 것도 아니고.’
선을 본 것까지 밝힌 마당에 굳이 상대방을 숨길 이유가 있을까 싶다. 게다가 승원과 도영은 친한 친구 사이니까.
“있잖아, 그때 만난 사람. 오빠도 아는 사람이야.”
“내가 아는 사람? 누군데?”
“놀라지 마.”
“네가 이러니 많이 궁금하네.”
승원이 방금 쥔 포크를 다시 내려놓았다. 접시와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가 쨍하고 울렸다.
“선 본 사람. 주도영 교수님이야. 그러고 보니 이 호텔에서 만났었네.”
쨍그랑. 접시 위에 놓여있던 포크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더욱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오빠! 괜찮아?”
놀란 혜수가 반쯤 몸을 일으켰다.
“손을 헛디뎠어.”
“발은 안 다쳤어?”
“괜찮아. 앉아.”
승원은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였다. 순식간에 구겨진 얼굴을, 미처 숨기지 못한 표정을 가라앉히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주도영이라고?’
잘 생각해보면 전혀 예측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도영의 아버지는 여당 국회의원이자 다음 서울 시장 당선이 가장 유력한 사람이고, 가은의 아버지는 거대 야당의 당 대표니까.
결혼 적령기의 아들과 딸이 있는 두 집안의 맺어짐은 세간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여야의 화합으로 충분히 신문의 1면을 장식할 수 있는 이야기지.’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그야말로 난세였다.
탄핵으로 교체된 대통령은 임기가 채 끝나기 전에 또 탄핵되었다. 그러기를 몇 번째. 서로 물고 뜯는 신물 나는 정치에 국민들은 충분히 지친 상태였다. 이 정국을 평안하게 해줄 사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가은과 도영이 맺어지기만 하면 도영의 아버지, 주기철의 서울 시장 당선은 물론이고 추후 대통령까지 충분히 넘볼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뒤, 승원은 몸을 일으켰다.
“여기 포크 새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직원이 새로 가져다주는 포크를 대충 받아 들고는 가장 묻고 싶던 것을 물었다.
“그럼 지금 도영이가 가은이랑 만나는 거야?”
“에? 아니야. 내가 대신 나갔다니까. 둘은 서로 얼굴 보지도 못했어. 게다가 가은이는 지금 남자친구가 있는걸. 선은 그렇게 쫑 난거야.”
“……그렇겠네.”
“그런데 주도영 교수님은 선 자리에서도 한결같았어.”
“어떤 게?”
“엄청 무서웠어. 취조당하는 줄 알았다니까?”
“…….”
“취미는 뭐냐, 특기는 뭐냐, 쉴 땐 뭐 하느냐, 좋아하는 색은 뭐냐 등등. 온갖 걸 다 물어보더라. 심지어 어릴 때 장래희망이 뭐였는지도 묻더라고. 웃기지?”
“…….”
“아니면 보통 선을 보면 그런 걸 다 묻는 건가? 처음이라 알 수가 있어야지.”
“…….”
쫑알쫑알 쉼 없이 이어지는 혜수의 말에도 승원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도영과 혜수의 모습이 연이어 떠오른 탓이다.
도영의 방에 가서 브리핑 준비를 해야 한다고 툴툴대던 혜수, 도영이 직접 타이를 가르쳐 주겠다는 걸 듣고 울상이 되던 혜수.
그리고 제일 이상한 건 생전 하지도 않던 1년 차 레지던트의 교육을 하고 있는 도영.
‘설마 주도영, 진심으로…….’
승원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지자 혜수가 묻는다.
“오빠, 왜 그래?”
“어?”
“표정이 너무 멍한데?”
승원은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내 표정이 어때서. 여전히 잘났지.”
“웩. 진짜 짜증 나.”
“큭, 차 식겠다. 먹어, 얼른.”
차와 음식을 다 비운 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빠, 나 화장실 좀.”
“다녀와.”
승원이 결제하는 사이 혜수는 화장실을 찾아갔다.
1층의 화장실은 수리 중이라 다른 층으로 가야 했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 안은 주말이라 그런지 꽤 북적했다.
그런데, 커다란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만지는 사람의 뒷모습이 특히 익숙하다.
“어? 조 선생님?”
유민이 뒤를 돌아본다.
“신 선생.”
연한 노란빛 조명 아래의 유민은 오늘도 세련된 차림이다.
단정하지만 화려한 무늬의 단추가 달린 상아색 트위드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고급 옷감은 유민이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따라 움직였다.
유민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길 때엔 잘 커팅 된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빛을 냈다.
“어쩐 일이세요? 식사하러 오셨어요?”
“응. 가족 모임이 있어서. 선생도?”
“아, 네. 저도요.”
“그럼 볼일 봐.”
“네.”
혜수는 고개를 까딱해 보인 뒤 빈칸을 찾아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도 유민은 여전히 거울을 보고 있었다. 립스틱을 꺼내 화장을 고친다. 유민의 옆에 서니 수수한 얼굴이 더욱 대비된다.
“선생님, 저 먼저 갈게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응. 병원에서 봐.”
혜수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가 승원에게 갔다.
“오빠, 화장실에서 우리 2년 차 선생님 만났어.”
“누구?”
“조유민 선생님이라고. 알아?”
“조 선생? 알지.”
“가족 모임 하러 왔대. 그런데 우리 같이 있는 거 안 들켜서 다행이다, 그치?”
“왜?”
“사귀는 사이라고 오해라도 하면 어떡해. 조금이라도 그런 오해는 받기 싫거든!”
“…….”
“이제 가자 오빠. 할 거 너무 많잖아.”
멍하니 서 있는 승원의 팔을 혜수가 끌어당겼다. 둘은 서점에 들렀다가 영화를 보러 갈 계획이었다.
“어, 어. 가자.”
로비 한가운데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두피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얏!’
고개를 돌려보니 혜수의 머리카락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백의 버클에 걸려 있었다. 혜수는 승원의 팔을 잡고 세웠다.
“오빠, 잠시만.”
“무슨 일인데?”
“머리카락이 끼었어. 이게 왜 이러지? 나 이것 좀 뺄게.”
“내가 봐줄까?”
“아냐. 내가 할 수 있어. 기다려 봐.”
“알았어, 천천히 해.”
혜수가 어깨를 보며 낑낑대는 사이 엘리베이터에서 띵, 소리가 났다.
곧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승원의 눈에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키가 큰, 온몸으로 위압감을 내뿜는 커다란 체격의 남자가 먼저 보인다.
늘 보던 얼굴.
엘리베이터 안에 우뚝 서 있는 남자는 도영이었다. 그 옆에는 도영과 일행처럼 보이는 여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던 중인 건지,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분명한 표정의 도영과 달리 여자는 도영에게 바짝 붙어 도영을 보며 예쁘게 웃고 있었다.
‘저 여자는…….’
여자도 익숙한 얼굴이다.
혜수가 화장실에서 2년 차 선생님을 만났다, 얘기를 해준 것이 떠올랐다.
‘저 여자분이 조유민 선생이던가.’
도영도 마찬가지로 승원을 알아본 듯했다. 고개를 까딱하기에 승원도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런데, 도영의 시선이 승원의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혜수에게로 넘어갔다.
순간 도영의 눈이 커다래진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데다 평소의 수술복이 아닌 캐주얼 차림임에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혜수라는 것을.
승원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주도영이 요즘 하지 않던 행동들을 보이고 있다.
상대는 혜수.
그리고 지금은 뚫어질 듯 혜수를 보고 있다.
‘…….’
무언가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틈이 없었다.
승원은 팔을 뻗어 혜수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손에 힘을 주어 혜수를 제게로 당겼다.
머리카락에 열중하고 있는 혜수는 손쉽게 끌려왔고. 승원은 망설임 없이 혜수의 머리에 코를 묻었다.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처럼 보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