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내가 거기서 잔 데에는 이유가 있다
(19/110)
19. 내가 거기서 잔 데에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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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내가 거기서 잔 데에는 이유가 있다
2022.04.06.
도영은 잠을 잘 때는 반드시 주문 제작한 매트리스가 있는 도영의 연구실이나 집에 가서 잤다.
제대로 된 침대가 수면에 중요했기 때문에. 또한 제대로 된 자세로 자지 않으면 근육이 충분히 이완되지 않는다.
‘내가 왜 여기서.’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한 스스로가 탐탁지 않아 역정이 났다.
‘정신 나갔군.’
굳은 몸을 조금씩 늘리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허벅지에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무게의 정체를 알아챘을 때.
‘이게 뭐…… 헉!’
도영은 외마디 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 덕에 머리를 소파에 강하게 부딪힌 혜수가 잠에서 깼다.
“아으…….”
밤새 구부리고 잤더니 삭신이 쑤신다.
“아고고.”
혜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뿌연 눈앞을 손으로 세게 비볐더니 앞이 좀 트이는 것 같다. 눈을 몇 번 더 비빈 혜수는 여기가 어딘지 깨달았다.
“어?”
익숙한 운동기구와 책장들, 묵직한 향기.
그리고 그사이에 서 있는 한 사람.
“주도영 교수님?”
“깼으면 냉큼 일어나지.”
도영이 팔짱을 단단히 낀 채 혜수의 앞에 서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눈매는 또 잔뜩 성이 나 있다.
“설마 내가 다시 출근할 때까지 자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
어제 이곳에 앉아 도영이 타이 하던 것을 지켜봤던 기억이 난다. 그것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지금이 몇 시지?’
가운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 보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어간 시각이다.
어제 도영의 방에 들어온 게 오후 9시쯤이니, 정말 여기서 밤을 보낸 것이다.
‘미, 미쳤다, 신혜수! 여기서 잤단 말이야?’
혜수는 제 몸 위에 올려져 있던 것은 던져버리고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도영이 왼팔을 쭉 뻗어 방문을 가리켰다.
“여기서. 나가. 즉시. 당장.”
“네, 네! 갈게요, 갑니다!”
혜수는 도영의 방을 총알같이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복도를 내달리던 혜수는 마주 오던 사람과 맞닥트렸다.
“으아악.”
가까스로 몸을 움츠려 충돌하는 것은 피했다.
“신 선생.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급해.”
귀를 간질이는 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민이다.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꾸벅이는 혜수를 보고 유민이 응, 대답을 해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전 이만.”
혜수는 대충 고개를 꾸벅하고 다시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혜수가 의국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 복도에 쾅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혜수가 나오면서 미처 닫지 못한 도영의 방문을 도영이 닫은 것이다.
‘…….’
굳게 닫힌 문과 혜수의 빈자리를 번갈아 보는 유민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졌다.
그날 오후에는 반기별로 열리는 전체 교수 회의가 있었다.
맨 뒷자리, 가장 구석 자리에 도영도 앉아 있었다.
병원장 조병억의 주도 하에 열린 회의는 역시나 지루하기 짝이 없다. 회의의 내용 또한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의사들의 모인 회의였지만 의학에 관한 것은 찾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병원의 규모를 더 키울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정부 지원을 받아내고 환자를 유치할 것인가.
병억은 대부분의 발언을 병원 운영과 돈에 관한 것으로 채웠다.
평소라면 도영은 이런 말도 안 되는 회의에는 출석 체크만 한 뒤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병원장의 눈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잠자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물론 회의는 듣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다.
‘왜 내가 거기서 잤지?’
자신의 매트리스가 없는 곳에서 잠을 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 밤에 다른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의아해 할만한 일이다.
‘어째서?’
한결같았던 자신의 일상이 깨졌다. 그것도 전혀 납득되지 않는 상황과 함께.
‘원인 없는 결과는 없지.’
과학을 다루는 의학자답게 논리적으로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어제 내게 잠을 이기지 못할 정도의 이벤트가 있었던가? 일단 섭취한 것을 살펴보자.’
도영의 머릿속에는 꽤 오랫동안 온갖 물질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요즘 저녁에 마그네슘을 세 알, 테아닌을 한 알 먹고 있지. 하지만 이건 평소와 똑같아. 식단 또한 다를 게 없지. 알코올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어. 어제 먹은 약에……. 아니, 플루옥세틴과 가바펜틴(졸린 부작용을 가진 신경통 완화제)을 먹지 않은 지는 꽤 됐어. 아니면 GABA(억제성 신경전달물질)나 멜라토닌(수면 유도 호르몬)을 상승시킬 만한 다른 일들이 있었던가.’
모든 회의가 끝나고, 교수들은 앞다투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도영 또한 회의실을 빠져나오던 중, 저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넓은 어깨와 작은 머리. 약간의 곱슬기가 있는 갈색 머리칼이 아니라면 도영과 헷갈릴 법하다.
도영은 발걸음을 빨리하여 자연스레 그의 옆에 가 섰다. 인기척에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도영을 발견한 승원이 부드럽게 웃는다.
“도영아, 병동 가는 길?”
“어.”
“같이 가자.”
“어.”
둘은 병동으로 내려갔다. 이렇다 할 대화는 오가지 않았지만 누구 하나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고요함을 먼저 깬 것은 도영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아버지 제사였겠군.”
“응.”
“어머님은 어때.”
“그냥 뭐. 늘 똑같으시지.”
“……그래도 따로 사니 마음은 좀 더 편하겠군.”
“아무래도.”
“보육원 봉사활동은?”
“한 달에 한 번은 가려고 노력 중이야.”
“다음엔 나도 가지.”
“그럼 나야 좋지. 그런데 너 손은 괜찮아?”
“봉사활동 정도는 무리 없어.”
“좋아, 든든한데.”
둘은 신관으로 건너가 다시 병동이 있는 6층으로 올라갔다.
68 병동을 지나는데 스테이션이 소란스럽다.
간호사들과 인턴, 레지던트들이 모여 무언가를 보며 꺄악꺄악,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제법 커 지나가던 환자들도 돌아볼 정도다.
“대체 병동에서 무슨 소란을……!”
도영이 언성을 높이며 그들에게 다가가려 하자, 승원이 턱 붙잡는다.
“잠시만, 도영아.”
“왜?”
“저것 좀 들어 봐.”
그러더니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수상한 승원의 행동에 도영도 귀를 세우고 승원처럼 스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런데 드문드문 들려오는 내용이 심상찮다.
“인턴 선생님, 이제 32강 고르셔야죠.”
“32강은 누구예요?”
“GS(일반외과) 주도영 교수님이랑 OS(정형와과) 4년 차 서동준 선생님.”
“음…….”
한동안 고민하던 인턴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전 서동준 선생님이요.”
“에? 정말요?”
주도영이 32강에서 탈락하다니. 그것도 곰탱이로 유명한 서동준에게 졌다.
매우 드문 결과에 주위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주 교수님은……. 너무 무서워서요. 전 성격이 되게 중요하거든요. 서동준 선생님은 늘 친절하셔서.”
그렇다. 저들은 지금 이상형 월드컵을 하고 있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병원에서는 인기투표나 다름없는 이상형 월드컵을 열어왔다. 우승한 남자와 여자들은 일 년 동안 한대의 대표 얼굴로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리고 남자 월드컵에서 1, 2등은 늘 승원과 도영, 또는 도영과 승원.
의대 동기인 데다가 레지던트 동기인 둘은 병원에 등장한 순간부터 매해 치열하게 우승을 다퉈왔다.
“벌써 이걸 할 때가 됐구나. 일 년 금방 가네.”
“하! 이것들이.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도영이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갈 듯한 자세를 취하자 승원이 또 붙잡는다.
“가만히 있어 봐. 좀 들어보자. 어?”
“저따위 내용을 들어서 어디다 쓰겠다는 거지?”
잔뜩 인상을 쓰며 승원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순간 그들 사이에 껴 있는 혜수가 눈에 들어온다.
‘신혜수? 쟤가 왜 저기에.’
뚫어지게 대진표를 보고 있는 걸 보니 곧 혜수의 순서인가 보다.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한번…… 들어나 볼까. 딱히 신혜수가 뽑는 사람이 궁금한 게 아니야. 내가 몇 위를 할지가 궁금할 뿐.’
도영은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승원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승원이 놀라 뒤를 쳐다보았지만 개의치 않고 더욱 몸을 바싹 붙였다. 둘은 기둥 뒤로 완전히 가려졌다.
“도영아, 왜? 난 이거 듣고 갈 테니 너 먼저 가.”
“조용히 하지. 들어보자며.”
인턴이 1등으로 뽑은 사람은 정형외과의 서동준. 그의 이름 옆에 하트 모양 스티커가 붙었다.
“자, 자. 다음 선생님 앉으세요.”
다음 차례로 등장한 사람은 정말로 혜수였다.
도영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앞에 서 있는 승원의 등에도 바짝 힘이 들어가 있다.
“시작할게요.”
혜수가 종이 위에 볼펜을 그려갔다.
64강, 32강, 16강. 죽죽 화살표가 그어진다. 망설임 없이 선택해 나가는 혜수를 보며 둘러선 사람들이 감탄을 했다.
“와, 선생님. 선택하는데 거리낌이 없으시네요.”
“미리 다 봐두어서 그래요. 조금 전 인턴샘 할 때 다 생각해 뒀거든요.”
8강과 4강도 빠른 속도로 치러지고 이제 두 명의 후보가 남았다.
“자, 이젠 결승이에요.”
도영은 더욱 집중했다. 최대한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이제 마지막 후보 두 명이 읊어질 테니까.
“후보는 GS ……영 교수님, O…… 한…… 교수님.”
하지만 하필 그때, 뒤에서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뛰어다닌 탓에 제대로 듣지를 못했다.
‘뭐라는 거야.’
결승전의 주인공이 너무나 궁금했다. 도영은 어쩔 수 없이 승원을 툭툭 쳤다.
“누구라는 거지?”
“뭐가 누구야?”
“결승 후보 누구냐고.”
‘주도영이 그게 왜 궁금한 거지?’
의아해하면서도 대답은 해줬다.
“너랑 나.”
“!”
도영의 눈썹이 꿈틀한다.
‘한승원이 상대라.’
이후 도영은 더욱 집중하여 귀를 세웠다. 미동도 않고 혜수의 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으음…….”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혜수가 뜸을 들인다.
“음…….”
혜수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도영의 입이 마른다. 속이 자꾸 탄다.
시원한 물이 앞에 있었다면 벌써 한 컵 따라 벌컥 마셨을 것이다.
누구야, 누군데?
빨리 말 좀 해보지.
마침내 혜수의 입에서 우승자가 발표되었다.
“전 주도영 교수님이요.”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역시, 하는 반응과 엥, 하는 반응이 나뉜다.
“왜요? 한승원 교수님 말고 주도영 교수님인 이유가 있어요?”
“이유는 없는데요.”
“에이, 이유가 왜 없어요.”
“진짜 없어요. 그냥요.”
정말 이유는 없었다. 나름 혜수는 결승전이니 진지하게 둘의 여자친구가 되는 것을 가정해 봤다.
그랬더니 답은 금세 나왔다. 승원은 가족이라 절대 사귈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도영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럼 여기 스티커 붙여주세요.”
혜수는 인턴이 건네는 하트 모양 스티커를 받아 도영의 이름 옆에 붙였다. 혜수의 스티커가 붙음으로써 승원과 도영의 스코어는 동점이 되었다.
“전 다했으니까 이제 가도 되죠? 드레싱 하러 가야 해서.”
“넵. 소중한 한 표 감사해요, 선생님.”
드레싱 세트를 챙겨 스테이션을 나온 혜수는 기둥 뒤에 서 있는 승원과 도영을 발견했다.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지 혜수를 본 둘이 흠칫 놀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 어.”
그런데 대답해주는 승원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늘 웃고 다니는 승원이 바짝 굳어 있다.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심각해 보인다.
“교수님, 무슨 일이세요?”
“신 선생.”
“네?”
“너…….”
뜸을 들이던 승원이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뒤에 서 있는 도영을 빤히 쳐다본다. 한참을 그러더니 말을 하지 않고 삼켜버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고개를 한번 흔든 승원이 미소 지었다. 이제야 원래대로의 모습이다.
“나 먼저 갈게. 연구실 가야 해서.”
“아, 네. 안녕히 가세요.”
승원은 그렇게 급히 자리를 피해버렸다.
문제는 홀로 남아 있는 도영도 좀 이상하다는 것.
승원이 가버리자 더욱 허둥지둥한다. 그 모습이 평소 도영에게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라 의아하다.
“교수님, 여기서 뭐하셨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흠흠.”
자꾸 헛기침을 한다.
“앗, 아프세요? 감기 드신 거예요?”
“아니.”
무뚝뚝하게 대답하더니 몸을 휙 돌려 가버렸다.
그런데 걷는 모양도 좀 수상하다. 손으로 머리를 긁고 목덜미도 만지고 어깨도 털고. 몸을 가만두지 않는다. 꼭 뭐가 마려운 사람 마냥.
혜수는 그의 처음 보는 인간다운 모습에 눈만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