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특별한 동침의 조건
(18/110)
18. 특별한 동침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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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특별한 동침의 조건
2022.04.02.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속도에 혹시 잘못 본 것인가 하고 눈을 또 비볐다.
하지만 확실했다. 시곗바늘은 반 바퀴나 돌아갔는데 도영은 그 긴 시간 동안 겨우 두 뼘만큼의 매듭을 지었다.
당장 어제만 해도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앉자마자 다시 오라는 전화가 왔었는데!
‘속도가 왜 이래?’
눈을 끔뻑이던 혜수는 약간의 고민 끝에 도영을 불렀다.
“어…… 저, 교수님.”
도영이 타이를 멈추고 저를 쳐다본다. 한 치의 감정도, 목적도 담겨 있지 않은 깨끗한 눈빛이다.
“그, 저. 속도가…….”
“속도가 왜?”
눈빛만큼이나 담백한 말투였다
저 눈과 말투를 보니 말이 쉽게 뱉어지지 않는다.
“그게…….”
평소보다 속도가 느려요, 라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혜수는 결국 그냥 그 말을 삼켰다.
그렇게 말하면 꼭 자신이 도영에게 타이가 왜 그 모양이냐고 트집을 잡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제 말을 듣고 도영이 속도를 더 내줄지가 미지수이기도 했다.
‘……그냥 있자.’
이 속도대로면 30분이면 끝날 것 같으니. 대신 다음부터는 교수님이 타이 하실 땐 이전처럼 그냥 나갔다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혜수를 보던 도영의 시선은 다시 실로 돌아갔고 그렇게 타이는 계속 이어졌다.
딱 좋은 온도와 습도였다.
짙은 갈색의 가죽 소파와 잘 어울리는 묵직하면서도 따뜻한 향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어둑한 사방과는 달리 주황빛 조명 아래 있는 도영과 그의 손은 도드라지면서도 배경과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다. 마치 무대 위에 올라간 솔리스트처럼.
그 어스름한 경계에 걸쳐 앉아 있던 혜수는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졸리지.’
도영의 반복된 손짓은 최면을 유도하는 펜던트 같았다. 흰 검지와 검은 실이 교차하고, 실이 빙빙 돌수록 혜수의 의식도 흔들렸다.
‘안 되는데. 졸면 혼난다고.’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아무도 모르게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순간 따끔할 뿐 매듭을 짓고 있는 도영의 아름다운 손짓을 세 번쯤 보면 또 눈이 감겼다.
‘아……. 안 돼……는데…….’
잠시 뒤. 도영이 실을 내려놓으며 하, 혀를 찼다.
혜수가 졸고 있었다.
단순히 잠이 든 것뿐만이 아니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 까딱이던 머리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머리가 무너지고 다음은 목이 무너지고 그다음은 작은 상반신이 무너졌다.
과연 어디까지 내려갈까, 노려보고 있으니 결국 소파에 길게 누워버린다.
‘……허!’
미간이 절로 모아지고 코웃음이 나온다. 어이가 없다. 잠깐 졸다 말겠지 했는데 아예 누워서 쿨쿨 잘 줄이야.
‘얘 뭐지?’
늘 예상 밖의 모습을 보여주는 신혜수가 놀랍다.
‘내가 앞에 있는데 긴장을 하지도 않는 건가?'
도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목을 좌우로 늘렸다.
'내 별명이 사탄이라는 걸 잊었나 보군.’
커다란 양 주먹을 바짝 쥐었다 폈다 했다. 관절이 꺾이며 나는 두둑 거리는 소리가 위압적이다.
몸을 푼 도영은 잠깐 고민을 했다. 뻗어버린 혜수를 어떻게 깨울까.
손으로 끌어내릴까 발로 차서 깨울까, 호통을 칠까, 아니면 성질대로 멱살을 잡아 비틀어 버릴까.
‘어쩔까.’
문득 혜수의 머리맡에 놓인 쿠션이 보인다.
‘좋아, 그럼 저 쿠션으로.’
고민은 길지 않았다.
도영의 입술이 일순 비틀리더니, 단단한 손이 쿠션을 휙 잡아채 올렸다.
잠시 뒤, 혜수의 머리가 들렸다.
그 밑에는 쿠션이 조심스레 받쳐졌다. 도영은 혜수의 머리를 쿠션 위로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좋아.’
만족의 신음을 작게 흘렸다. 자신이 만들어 준 혜수의 자세가 마음에 들어서.
혜수는 꽤나 깊이 자고 있는 건지 이렇게 만져도 깨지 않았다.
하긴, 피곤했을 거다.
요 몇 주간 이틀에 한 번꼴로 당직이었고 당직을 할 때마다 규모가 큰 응급 수술이 두세 개씩 있었다. 그 환자들의 주치의인 혜수는 밤을 꼴딱 새워야 했다.
당직이 아닌 날에는 도영의 방을 쫓아다니며 타이를 해야 했으니 곯아떨어진 것도 이해할 만하다.
여전히 도롱대며 자고 있는 혜수를 보며 도영은 픽,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이렇게 뻗어버릴 것을 어딜 덤벼.’
회진 첫날 경애와 혜수가 나눴던 대화를 아직 기억한다.
왜 교수님이 직접 너를 가르쳐주냐고 따지고 드는 경애에게 혜수는 무려 도영의 핑계를 댔다.
뭐라 그랬더라. 힘들어 보이는 조유민을 도영이 배려한 것이라던가.
‘감히. 발칙한.’
그것도 잊을 수가 없는데 이번에는 저를 직접 끌어들였다.
혜수가 일부러 그랬다는 것은 과장 동환에게 제가 엮은 매듭이 전해지자마자 눈치챘다.
그때 느꼈던 어이없음이란. 요 몇 년 사이 겪었던 것 중 가장 황당한 일로 꼽을 수 있다.
나름 귀여운 복수를 계획한 것일 거다. 그동안 매일같이 저를 괴롭혀 댄 것에 대한 응징쯤 되겠지.
‘신혜수. 잔머리를 쓰는 걸 보면 머리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제게 먼저 겁 없이 덤벼드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물론 도영에게 거짓말을 한 사람도, 도영을 팔아먹은 사람도 혜수가 처음이다.
‘하지만 상대를 파악하는 데는 서투르군.’
쿨쿨 자고 있는 혜수를 보며 도영은 즐겁게 웃었다. 제 계획에 되레 넘어가 먼저 쓰러져 버린 게 우스웠다.
앞으로 또 어떤 행동을 보여줄지 진심으로 기대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혜수의 모습이 꽤 깜찍하기도 해서였다.
곤히 잠든 혜수를 내버려 두고 도영은 책상으로 돌아갔다.
당직이 아닐 때는 늘 하루의 마무리를 논문을 읽는 것으로 해왔다. 오늘 읽기 위해 출력해 놓은 논문이 총 7편이다.
많은 양은 아니었다. 보통 10편 정도를 읽어왔고 어제는 12편을 읽고 잤다.
자신의 전공인 이식혈관 외과에 관한 논문뿐만 아니라 유명한 의학 저널에 업로드되는 것들은 주제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먹어 치어 왔다.
그런데, 논문을 읽고는 있는데 신경이 온통 주위로 흩어진다. 눈에 힘을 주어 글자를 한 자 한 자 읽어내려도 다시 빠져나가 버린다.
‘……왜.’
도영은 만년필을 꺼내 중요한 단어와 문장에는 밑줄을 그으며 읽기 시작했다. 이러면 좀 더 잘 읽힐까 싶어서.
‘…….’
그래도 소용없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이번엔 빈 종이를 하나 들고 읽고 있는 문단 외에는 전부 가려봤다.
‘…….’
소용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해도 집중이 되지 않자 도영은 결국 논문을 뒤집어 버렸다. 깨알 같은 검은 글자들이 사라지고 하얀 여백이 눈앞에 떠오른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습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목을 늘리고 어깨를 늘리고, 팔을 늘렸다. 손목을 죽죽 당기며 문득 소파를 바라보았는데 혜수가 자면서 바르르 몸을 떠는 게 보인다.
잠깐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떨림은 간간이 계속되었다. 가만 보고 있으니 그 횟수가 점차 잦아진다.
‘추운 건가?’
도영은 라디에이터로 다가가 온도를 최고로 올렸다. 위에 덮어줄 만한 게 있나 제 방을 뒤졌다.
하지만 딱히 적당한 것이 없다. 자그마한 담요라도 있으면 좋겠건만 도영이 전혀 취급하지 않는 물건이다.
몇 바퀴나 방 안을 돌던 도영은 마침내 알맞은 것을 발견했다.
옷장 안에 걸린 제 검은색 롱 코트.
혜수의 몸을 가릴 만한 천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기에 도영은 코트를 꺼냈다.
혜수에게 다가가 코트를 펼쳐 몸을 감싸주었다. 도영에게는 정강이까지 내려올 뿐인 코트는 웅크리고 있는 혜수의 발끝까지 덮어주고도 살짝 남았다. 마치 이불처럼.
‘딱이군.’
이 또한 만족스럽다.
입술을 길게 늘이며 바람이 통하는 곳은 없는지 훑어보는데 한쪽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 있는 게 눈에 띈다.
도영은 옷깃을 펼쳐 목 끝까지 올려 꼭꼭 가려주었고 덕분에 손끝이 혜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으응.”
간지러운 느낌에 혜수가 살짝 뒤척인다. 아직은 사람의 온기가 없는 코트가 서늘할 텐데도 그 속으로 파고드는 걸 보니 꽤 추웠나 보다.
제 옷을 덮고 꼬물대는 그 모습이 퍽이나 시선을 끌어, 도영은 아예 논문을 들고 와 혜수의 머리맡에 앉아 버렸다.
그렇게 다시 논문을 읽어 보려는데, 이번엔 혜수의 머리가 움직인다. 이제는 목이 불편한지 베고 있던 쿠션을 이리저리 고치고 있었다.
쿠션의 이 모퉁이, 저 모퉁이로 고개를 왔다 갔다 움직이더니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손으로 휙 쳐내버린다.
머리에서 빠져나온 쿠션은 힘없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자고 있는 것이 맞나?’
도영은 손을 들어 혜수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걸 보니 자고 있는 건 맞다.
‘재주도 좋군. 본능인 건지. 감이 좋은 건지.’
나동그라진 쿠션을 줍기 위해 아래로 몸을 기울였다. 멀리 떨어진 쿠션을 잡기 위해 한껏 허리를 숙였다.
덕분에 도영의 허벅지가 혜수의 머리에 살짝 닿는다.
순간, 혜수가 팔을 뻗어 도영의 허벅지를 턱, 잡았다.
‘?’
허벅지를 제게로 끌어당기나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꿈틀대며 위로 올라왔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도영에게 머리를 갖다 댄다.
졸지에 도영의 허벅지가 혜수의 머리 아래에 있게 됐다.
‘!’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도영의 모든 움직임이 단박에 멈췄다. 들고 있던 논문이 팔락, 소파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혜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목석처럼 얼어붙은 도영과는 달리 계속 몸을 움직인다.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탓인지 더욱 그에게 달라붙는다.
견고하게 붙들고 있는 그 손은 쉼 없이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더 온기를 찾아 아래로, 더 아래로 파고들었다. 마치 도영의 몸이 난로라도 되는 것처럼.
‘…….’
허벅지 사이로 느껴지는 선명한 감각에 논리적인 사고 또한 중지되었다.
‘…….’
멍하니 제 몸에 손을 대고 있는 혜수를 보던 도영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이 무, 무슨!’
당장 혜수의 머리를 끌어내려야 했다. 저 작은 머리가, 손이 더 간지러워지기 전에 얼른 치워야 했다.
도영의 양손이 혜수의 머리 위로 쭉 뻗어나갔다.
‘어서 치워야!’
커다란 손이 혜수의 머리와 목을 집어 들기 직전.
‘……놔둬 볼까.’
생각이 바뀌었다.
이대로 내버려 둬도 나쁠 건 없어 보인다. 잘 자고 있는 애를 괜히 깨울 필요가 있나 싶다.
지금 보니 아까 대주었던 쿠션은 혜수에게 너무 크고 높다.
제 허벅지의 높이가 딱이다. 적당한 탄력과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럼 조금만.’
조금만 더 재우고 깨우기로 했다. 오늘은 당직도 아니니 잠깐 더 잔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대신 여전히 제 다리를 잡고 있는 손은 치우기로 했다.
도영은 혜수의 손을 잡아 다시 아래로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손길로.
그런 뒤에는 다시 논문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방 안에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혜수의 숨소리가 부드러웠고, 편안해서였다.
새벽의 파르스름한 빛이 창으로 비쳐들어 오고 도영은 감았던 눈을 조금씩 들어 올렸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니 조금 더 시야가 선명해진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의국에 있는 제 방 안의 커다란 책장이다. 온갖 논문과 의학 서적이 가득 찬 짙은 갈색의 책장이 벽면을 따라 빈틈없이 서 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설마 내가 여기서 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