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운명의 까만 실2022.03.30.
“……쯧. 내놔 봐.”
도영은 군말 없이 다시 혜수에게서 실을 채갔다. 조용히 타이를 하기 시작했고 매듭은 순식간에 손바닥 길이만큼 더 길어졌다. 죽죽 길이를 늘려가는 매듭을 보며 혜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과장 상훈에게 10미터의 매듭을 제출해야 할 날이 왔다. 잠이 부족해 겨우 일어나던 날들과는 달리 혜수는 각성제라도 먹은 것처럼 반짝 눈을 떴다. 상쾌한 아침의 시작이었다. 요 근래 중 가장 기분이 최고였던 터라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하는데도 힘들지가 않았다. 흥얼거리며 일을 해치운 혜수는 의국으로 내려갔다. 상훈의 방문에 신나게 노크를 했다.
“누구세요.”
“과장님, 접니다. 1년 차 신혜수입니다.”
“들어와.”
혜수는 상훈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엇, 교수님도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의외로 안에는 도영도 있었다. 둘은 의대생들의 교육과정을 토론하고 있었던 듯 테이블 위에는 여러 장의 강의 시간표가 놓여 있었다. 혜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주 교수님도 마침 여기 계시다니.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수가 있나.’
실실 웃고 있는 혜수를 보며 상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신 선생, 무슨 일이야?”
“시키신 일을 다 해서 검사받으러 왔습니다.”
“검사? 무슨 검사?”
잠깐 어리둥절하게 혜수를 쳐다본다.
“타이…….”
“아!”
상훈은 혜수와 경애에게 숙제를 시켰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렇지. 오늘이 일주일째지. 이리 가져와 봐.”
“여기 있습니다.”
혜수는 까만 실 뭉치를 꺼내 상훈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런 뒤엔 도영을 티 나지 않게 흘긋흘긋 보았다. 이제 그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볼 차례니까. 아니나 다를까, 혜수의 매듭을 본 도영의 눈썹이 점점 위로 치켜 올라간다. 예상했던 반응에 혜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매듭을 꼼꼼히 훑어내리던 상훈이 어느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신 선생.”
“네, 과장님.”
“군데군데 매듭 모양이 다른 구간들이 있는데.”
역시나 상훈은 혜수가 혼자 다 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물론 상훈이 아닌 의대생이 보더라도 알아챌 정도로 혜수가 한 구간과 도영이 한 구간은 차이가 극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혜수가 가장 바랐던 것이다. 상훈의 얄팍한 눈꼬리와 목청이 점점 하늘로 치솟았다.
“신 선생. 사실대로 말해. 누가 도와준 거지?”
“저, 그게…….”
말끝을 흐리며 도영을 슬쩍 쳐다보았는데.
‘이크.’
다시 상훈에게로 시선을 후다닥 돌려야 했다. 도영의 눈동자에서 분노에 찬 레이저가 저를 찌를 것처럼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눈빛에 온도가 있다면 저는 벌써 타죽었을 것이다. 등에 절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지만 이 정도야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다. 혜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주도영 교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뭐? 누구?”
상훈은 제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주도영 교수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주 교수? 지금 여기 있는 우리 과 주 교수?”
상훈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도영을 가리켰다.
“네. 맞습니다.”
“허.”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상훈은 한참 눈만 껌뻑였다.
“주 교수. 신 선생 말이 맞아?”
“……네. 맞습니다.”
짓눌린 목소리였다. 그런 목소리를 내는 도영의 표정은 흙이라도 씹고 있는 것 같았다.
“허허, 거 참. 주 교수가 숙제를 도와준 이유를 나는 도저히 모르겠네. 이렇게 되면 매듭 10미터씩 다시 만들어 와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
“물론 둘 각각.”
“…….”
아까부터 혜수를 미친 듯이 노려보고 있는 걸 보니 모르지는 않았나 보다.
“교수라고 예외는 없는 것 알지?”
“……알고 있습니다.”
‘과장님, 최고예요.’
혜수는 멋대로 씰룩이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래. 숙제를 도와준 상대가 교수라고 봐주게 되면 분명 레지던트들 사이에서 말들이 나올 거란 말이야. 모든 것은 공정하고 공평해야지.”
“네, 과장님.”
“좋아. 그럼 신 선생과 주 교수. 둘 다 일주일 뒤까지 다시 10미터씩 각각 만들어 와. 주 교수야 뭐 금방 할 테니 이 정도는 일도 아니겠지.”
도영과 혜수를 번갈아 보던 상훈이 빙긋 웃었다. 혜수는 놓치지 않았다. 도영에게도 당연하단 듯 숙제를 내주는 상훈의 얼굴에 고소하다는 표정이 언뜻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주 교수님, 적이 많구나.’
지난번 이모 집에 갈 때 승원이 도영을 벼르고 있는 사람이 많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조금 안됐다란 생각이 들었지만 곧 지워버렸다.
‘뭐, 나랑은 상관없지. 그러게 말 좀 이쁘게 하면서 살지 그랬어요.’
혜수는 목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교수님도 도와주시면 안 된다는 걸 몰랐습니다. 제게 가르쳐주시려던 건데 이렇게 돼서 주 교수님께도 죄송할 따름입니다. 매듭은 다음 주까지 다시 해오겠습니다.”
“그래. 다음 주에 보지.”
“네,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껏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 이 방만 나가면 모든 작전은 성공으로 끝난다. 매듭 10미터가 다시 숙제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지난번보다는 손이 빨라진 터라 이제는 잠만 조금 줄이면 충분히 가능한 정도의 숙제가 되었다.
‘무려 주 교수님이 매듭 10미터를 만들게 됐는데 이 정도쯤이야 즐겁게 해야지.’
그런데, 문고리를 잡아 돌리기 직전, 도영이 한 말에 혜수는 멈춰 서야 했다.
“과장님.”
“왜?”
“한 가지 제안 드릴 게 있습니다.”
“응? 뭔가.”
“이 매듭 숙제는 레지던트의 타이 실력을 향상하기 위함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맞아.”
“과장님도 보시다시피 제가 한 것과 신 선생이 한 매듭의 퀄리티 차이가 많이 납니다.”
“음.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게 왜?”
“그런 의미에서 신 선생과 제가 번갈아 매듭을 지어 20미터를 한 줄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흐음?”
“번갈아 하다 보면 신 선생이 나아지는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을 것이고, 신 선생도 나름 자극을 느낄 것 같습니다만.”
‘뭐라고?’
예상외의 전개에 혜수는 입을 딱 벌렸다. 그렇게 되면 도영을 지금보다 더 자주 마주쳐야 한다. 실을 주고받아야 하니까. 도영을 휙 쳐다보니 도영은 여전히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보이는데……. 착각인가? 다음 날 오후, 첫 50센티를 완성한 혜수는 저녁 브리핑을 하러 도영의 방에 가는 김에 실을 그에게 주었다. 방을 나오면서는 만세를 불렀다. 홀가분한 마음 덕인지 문이 닫히는 소리도 경쾌하다.
‘당분간은 저 지긋지긋한 실에서 해방이다!’
도영이 타이를 하는 동안에는 실을 안 봐도 된다. 일주일이 넘도록 틈만 나면 타이만 하고 살았더니 이제 까만 머리카락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판에 밥을 담고 자리에 막 앉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꺼내 보니 도영이었다. 식당에 오기 직전까지 몇 시간이나 같이 시간을 보냈던 주도영 교수님 말이다.
‘무슨 일이지? 할 말이 있으면 아까 하셨을 텐데.’
혜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1년 차 신혜수입니다.”
-실 가져가.
“네?”
-선생 순서.
“네?”
-안 들리나? 실 가져가라고.
“아……. 드, 들립니다. 벌써 타이를 다, 다 하셨다구요?”
-또 말해야 해? 실. 가져가.
분명 다했으니 실을 가져가라는 걸 텐데 믿기지가 않는다. 이런 괴물 같은 사람. 매듭 50센티를 벌써 다 하신거야? 내가 그 방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저, 교수님. 제가 막 식당에 왔는데 조금만 있다가 가면 안 될…….”
-밥 먹고 오면 난 없을 텐데. 곧 암 센터 회의가 있어서 나가려던 참이니.
“……네, 바로 가겠습니다. 교수님.”
그렇게 혜수는 다시 도영의 방으로 가야 했다. 한 숟갈도 채 먹지 못한 식판이 쓸쓸히 자리를 지켰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다는 게 이런 걸 가리키는 말인가 보다. 50센티씩 번갈아 하기로 했으니 20번씩 맡아서 하면 되겠다, 그럼 대충 주 교수님 얼굴을 하루에 세 번, 많으면 네 번 정도만 보면 되겠다, 아침 회진 때랑 점심 시간, 저녁 시간이랑 저녁 브리핑 때가 딱이네! 라는 맨 처음의 계획은 큰 착각이었다. 도영의 매듭짓는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졌다. 원래도 충분히 빠르고 정확하다고, 이건 예술이라고 생각했었다. 따라서 더 이상은 오를 경지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분명 같은 양의 타이를 하고 있는데 도영의 속도는 혜수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혜수는 도영은 저와는 능력 자체가 다른 사람임을 또 한 번 실감했다. 조금 더 지나서는 혜수가 도영의 방을 나가 병동에 있는 화장실에 들린 정도의 시간에 다 완성해버렸다. 어찌나 빠른지 손에 모터라도 단 것 같았다.
‘이래서야 교수님을 만나러 왔다 갔다 하는 게 더 힘들잖아!’
도영에게 실을 넘기고 어디를 좀 가려 하면 다시 전화를 해 불러대는 통에 도영을 만나는데 더 큰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 같았다. 과장 좀 더해 도영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불려가는 것을 몇 번 한 뒤로 혜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냥 도영이 매듭을 끝낼 때까지 도영의 방에 있는 게 낫겠다는 것으로. 오늘도 저녁 브리핑이 끝나고 혜수는 도영에게 실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그대로 앉아 있는 혜수를 보며 도영이 눈을 치켜뜬다.
“안 나가?”
“저, 교수님.”
“왜.”
“교수님이 타이 하시는 거 옆에서 좀 보면 안 될까요?”
“왜?”
“예전에 보여주셨던 게 기억이 안 나서요. 다시 보고 싶어 그렇습니다. 교수님 타이 솜씨가 예술이지 않습니까?”
“…….”
최선을 다해 씨익 웃었다.
“크,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니까요.”
도영은 그 특유의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아주 대놓고. 그리고 잠시 뒤.
“……마음대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허락을 하기는 한다.
“감사합니다!”
도영은 타이를 할 때는 소파에서 하는 모양이었다.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에 깊게 등을 기대앉는다. 옆에 놓인 스탠드의 가느다란 기둥에 실을 묶고는 타이를 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혜수도 그의 타이를 보기 위함이란 핑계를 댔기에 바로 옆에 놓인 소파에 앉아 그가 잡고 있는 실을 쳐다보았다. 곧 자세를 잡은 도영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느다란 실 위에서 아름다운 손이 쉴 새 없이 춤을 춘다. 유려한 움직임이 다시 혜수의 눈앞에서 재현되고 혜수는 그 장면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정확히는 도영의 실이 아닌, 실을 움직이는 그 손에.
새로운 실로 잇기 위해 잠깐 멈추는 시간 외에 도영의 손은 빈틈없이 움직였고 매듭도 점점 늘어났다. 그런데, 도영이 매듭을 만드는 속도가 생각보다 느리다.
‘그럴 리가. 기분 탓인가?’
요 며칠 잠을 잘 못 자 피곤하기도 했기에 인지능력이 틀어진 탓이라 생각했다. 눈을 몇 번 비빈 혜수는 다시 도영의 손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 또 흐르고. 넋을 놓고 타이를 보던 혜수는 우연히 도영의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삼십 분이 넘게 지나있다.
‘헉!’
그런데. 매듭은 도영의 몫을 겨우 반절 넘은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