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이게 우연이다?2022.03.26.
경애는 상훈이 놓고 간 실을 모아 쥐고는 혜수를 노려보았다. 흥분한 어깨가 들썩거린다.
“이건 다 너 때문이야.”
“사돈 남 말 하시네.”
“저걸 확 그냥!”
분을 못 이기겠는지 다시 손을 들어 올린다. 혜수는 머리를 들이밀었다.
“또 머리 잡게요? 어디 한번 잡아 봐요. 여기 있어요.”
“…….”
씩씩대며 혜수를 노려보던 경애는 그냥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분노가 섞인 쿵쿵대는 발소리가 꽤 오랫동안 들려왔다. 그날부터, 혜수는 당직이 아닌 날에도 집에도 가지 않고 병원에서 먹고 자며 타이를 했다. 화장실에 가서 큰일을 볼 때도, 밥을 먹을 때 저작근을 움직이는 그 짧은 시간도 아껴가며 손에 실을 쥐고 타이를 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계획을 짜봐도 일주일 사이에 10미터는 무리인 것 같았다.
‘10분에 5센티쯤 만드니까. 1미터에는 200분이 걸리고 10미터면 2000분. 대충 33시간이라는 건데.’
문제는 일주일 사이에 33시간이라는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루 꼬박 네다섯 시간을 실만 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여유 낼 수 있는 시간이 죽어도 없었다. 잠도 네 시간을 자면 잘 잤다고 하는 마당에 실은 언제 쥐고 있단 말인가. 3일이 지났을 때, 겨우 3미터를 갓 넘긴 매듭을 보며 한숨을 쉬던 혜수는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오빠, 헬프 미.
-왜? 무슨 일 있어?
-타이 쉽고 빠르게 하는 법 없어?
-갑자기 웬 타이?
-앞으로 4일 동안 타이 해서 매듭을 7미터를 만들어야 해.
-뭐? 7미터라고?
-응ㅠ.ㅠ 우리 과장님 숙제야.
-너무 많은데? 무슨 숙제가 그래? 혹시 벌이야?
-응…….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푸하하, 크게 웃는 이모티콘이 답으로 왔다.
-나 이러다가 손가락에 물집 생기겠어. 나 좀 살려 줘, 오빠아…….
-내가 도와줄게. 지금 어디야?
-식당.
-저런. 밥 먹으면서도 하는 거야?
-7미터잖아. ㅜ.ㅜ
-기다려. 나 외래 다 끝났어. 금방 내려갈게.
-응.
얼마 지나지 않아 승원이 나타났다.
“신 선생.”
“한 교수님.”
둘은 병원 안에서 만날 때는 쓰는 호칭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다. 정말 레지던트와 교수처럼 혜수가 승원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 평소처럼 팔짱을 낀다거나, 바싹 붙어 있는 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날, 야식으로 나온 떡볶이를 먹으러 가던 날 도영을 갑작스럽게 만난 이후에 내린 결정이다.
“이것 좀 봐요.”
울상을 지으며 빨개진 손가락을 들어 보인 혜수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을 해주었다. 사정을 다 들은 승원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래서 진짜 10미터를 만든다고?”
“네……. 저 어떡해요.”
“내가 좀 가지고 가서 할까? 그다음에 두 개 연결하면 되잖아.”
“아니에요. 그러면 너무 티가 나니까.”
“티 나면 안 돼?”
“우리 과장님 엄청 철두철미해요. 숙제 제대로 안 하면 더 큰 숙제가 기다린다고.”
상훈은 꼼수를 쓰거나 제때 해내지 못하면 그 배의 숙제를 다시 주기로 유명했다. 이전에 한대 외과에 있었던 어떤 교수님 때부터 내려오던 전통이라고 했다. 상훈도 그것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그런 걸 왜 전통으로 만들어 가지고. 어휴.’
“그래?”
“응. 그러니까 그냥 빠르게 하는 방법만 있으면 좀 알려줘요.”
“그런 게 어딨어. 타이가 다 똑같지.”
“안 돼애…….”
혜수가 신음을 하며 식탁에 철푸덕 엎드려버리고, 피식 웃던 승원은 자리를 옮겨 혜수의 한쪽 옆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음. 완성도보다 빠른 시간이 중요하다면 쓸데없는 움직임을 좀 빼는 것 정도가 방법이겠네.”
“네, 네. 그걸 좀 알려줘 봐요. 이러다가 끝내지도 못하겠어.”
“잘 봐.”
승원은 식탁 다리에 묶여 있는 혜수의 실을 쥐었다.
“일단 한 손 타이를 하는 걸로 하자. 그게 아무래도 빨라.”
“넵.”
“조금 더 팁을 주자면, 음. 왼손 검지를 아예 처음부터 조금 아래로 위치시켜 봐. 오른쪽 손가락이 회전하는 반경이 줄어드니까 조금 더 시간이 줄겠지?”
“아하.”
승원이 몇 번 움직임을 보여주자 매듭이 쑥쑥 늘어난다. 혜수는 다시 승원의 손에서 실을 빼앗았다.
“그만, 그만해요. 교수님이 많이 하다가 걸리면 나 더 혼나요.”
“그럼 이번엔 혜수가 해 봐.”
“넵.”
혜수가 실을 잡고 타이를 하면 승원이 이리저리 코치를 해주었다.
“오, 조금 더 빨라졌어요.”
“그렇지?”
“우리 교수님 진짜 최고다.”
둘이 한참 실에 집중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위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 교수. 여기서 뭐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그들의 앞에는 도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식판을 들고 한 손은 가운 주머니에 꽂은 채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지 또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다.
“주 교수. 이제 밥 먹는 거야? 점심 먹기엔 늦은 시간인데.”
“외래가 지금 끝나서. 그러는 한 교수야말로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뭘 하나.”
“신 선생 타이 봐주던 중이야.”
“정형외과는 요즘 한가한가 봐. 우리 과 레지던트를 가르칠 시간도 있고.”
“밥 먹고 나가다가 신 선생을 우연히 만났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영은 입을 비틀었다.
“이게 우연이다?”
“어. 그런데 신 선생이 타이를 잘 못하길래 잠깐 봐준 것뿐이야.”
도영은 아무런 대꾸 없이 비어 있는 혜수의 오른쪽에 식판을 탁 놓더니 의자를 끌어 앉았다. 이 큰 덩치를 유지하려면 대충 생각해도 엄청난 칼로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식판에는 그의 반의반도 차 있지 않았다. 심지어 뭐가 그리 급했는지 젓가락은 없이 숟가락만 가져왔다.
“타이를 얼마나 못 하길래 다른 과 교수가 신경을 다 써야 할 정도일까.”
“……그런 거 아니에요.”
시무룩하게 말하는 혜수를 보며 승원은 대신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고, 신 선생이 벌……. 윽.”
혜수가 발을 콱 밟는 바람에 승원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더니 필사적으로 승원에게 눈짓한다.
‘주 교수님한테 아무런 말 하지 마!’
가뜩이나 도영에게 브리핑도 제대로 못 한다, 모르는 것도 많다 허구한 날 지적을 받고 혼나고 있는데 의국에서 싸우다가 과장에게 벌을 받게 됐다고 말하면 얼마나 비웃을지 뻔하다. 제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런 치욕을 더 겪기는 싫었다.
“신 선생이 뭐?”
“아니, 신 선생이 아무래도 초보다 보니 미숙하다고. 넌 밥 먹어, 얼른. 국 다 식겠다.”
“…….”
날카로운 눈초리로 승원을 훑어보던 도영은 곧 숟가락을 들었다. 혜수와 승원은 다시 실로 고개를 돌렸다. 혜수가 만들어가는 매듭을 보며 승원은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그렇지.”
“맞아. 거기서 그렇게.”
“그래. 옳지. 잘한다.”
그렇게 몇 번이나 말했을까. 무언가로 식판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에 승원과 혜수는 고개를 들어야 했다. 옆을 보니 그새 식판을 다 비운 도영이 숟가락을 놓고 그들을 보고 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여전히 못마땅한 것이 가득한 표정이다.
“난 또. 한 교수만 아는 타이 법이 있다고.”
“무슨 타이?”
“OS(정형외과)에서 GS(일반외과) 레지던트를 직접 가르쳐 줄 정도로 특별한 타이가 있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별거 없네.”
“타이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별다른 게 있겠어?”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왜 신 선생은 굳이 한승원에게 배우고 있을까.”
“말했잖아. 지나가다가 우연히 봐서 알려주고 있다고.”
“아. 또 우연.”
“그러네. 어쩌다 보니 자꾸 그렇게 되네? 그렇지, 신 선생.”
승원이 혜수를 보며 씩 웃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말끔하게 드러났다. 그걸 본 도영의 입꼬리는 더욱 비틀렸다.
“아하하, 네. 네. 맞아요.”
혜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식탁 다리에 매어져 있던 실을 풀었다.
“한 교수님. 전 이제 그만 가봐야 해요.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럴래? 나도 병동 가야 하는데. 병동에 가는 거면 같이 갈까.”
승원이 식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에는 마침 병동의 전화번호가 찍히고 있었다.
“아, 그, 네, 네.”
병동으로 갈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도영의 저 심술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어디로든 가겠다고 마음먹었을 뿐이다. 그런데. 도영이 손을 뻗어 혜수가 쥔 실을 잡아챘다. 검지로 실을 잡아올린 뒤 혜수가 만든 매듭을 하나하나 훑어본다. 그러더니 커다랗게 코웃음을 친다.
“이것도 타이라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말투다.
“……처음이라서, 연습 중이라서 그런 거예요. 점점 나아질 거예요.”
기어가는 목소리로 나름의 변명을 했다.
“아무래도 더 봐줘야겠는데.”
도영이 실을 잡고 흔드니 꼬리가 달랑달랑 거린다.
“네?”
“지금 병동에 콜 없는 걸로 아는데. 오전에 수술도 없었고.”
“……네.”
귀신이다. 어떻게 병동에 지금 일이 없는지를 아는 거지? 오후에는 마음먹고 타이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오전에 최대한 일들을 끝내놓고 식당으로 온 참이었다.
“그럼 여기에 더 있어도 되겠군.”
의자에서 반쯤 엉덩이를 떼던 혜수는 그다음에 이어진 말에 제 귀를 후벼팠다.
“내가 알려줄 테니.”
“……예?”
“다시 앉아.”
“네?”
“안 들려? 앉으라고.”
“아……. 그, 네.”
도영에게 타이를 배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거절할 거리가 없었다. 교수가 담당 레지던트에게 가르침을 준다는데 어떻게 싫다고 하나. 할 일이 있다는 것으로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도영이 병동의 일을 꿰고 있으니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혜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놀란 것은 혜수뿐만이 아니었다. 승원도 도영이 직접 혜수를 가르치겠다고 한 말에 제 귀를 의심했다. 도영이 레지던트에게 타이를 가르쳐 줄 사람이 아님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보통은 가르쳐주기보다는 잘 못하는 것에 핀잔을 주고 윽박지르기만 하는 주도영이니까.
‘주도영. 무슨 속셈이야.’
병동에 간다던 승원이 굳어진 눈으로 서 있기만 하자 도영이 무심하게 말했다.
“병동 간다더니. 네 전화 계속 울리는데.”
승원의 휴대폰에는 정형외과 메인 병동인 62병동의 번호가 줄기차게 찍히고 있었다.
“…….”
선뜻 통화 버튼을 누르기는 싫다. 전화를 받게 되면 꼼짝없이 이곳을 벗어나야 하니까. Rrrrrr. Rrrrrr. 하지만 제 뜻과는 반대로 휴대폰은 쉬지 않고 울려댔다. 승원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가야겠다. 신 선생, 나중에 봐. 주 교수도.”
“넵. 교수님, 안녕히 가세요.”
도영의 옆에 혜수를 두고 돌아선 승원의 얼굴에는 줄곧 걸려 있던 미소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승원이 완전히 사라지고 도영은 식탁 다리에 실을 묶었다. 단단히 묶은 뒤에는 양 검지에 실을 한 가닥씩 감아쥐고 탁탁 당겼다. 텐션이 들어간 실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떠올랐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봐.”
“네, 네.”
대답은 하는데 여전히 미심쩍다.
‘진짜 날 가르치시려고? 왜?’
교수가 1년 차의 타이를, 그것도 사탄 주도영이 타이를 직접 가르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다. 보통은 혼자 익히거나 잘 모르는 것은 윗 년 차나 펠로우 선생님에게 물어봐서 배우는데.
‘무슨 꿍꿍이지.’
아무래도 혜수를 혼내고 싶어 핑곗거리를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의심의 눈초리로 도영을 보고 있는데 도영의 오른손 중지와 약지에 실이 감겼다. 그 실을 아래로 넘기는 것을 시작으로 도영은 타이를 하기 시작했다. 실이 도영의 손가락 위에서 움직인다. 빠르게 한 번, 느리게도 한 번. 다시 빠르게 한 번, 느리게 한 번. 혜수가 천천히 보고 그 방법을 외우라는 듯 도영은 속도를 조절해가며 손가락을 반복해서 움직였다. 그런데 그 손의 움직임이 어찌나 우아한지. 속도는 말할 것도 없다. 가뜩이나 아름다운 손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그 손이 제 눈앞에서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다. 혜수는 도영을 의심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그 손짓에 빠져들었다. 분명 음악 소리라고는 없는 곳인데 어딘가에서 고아한 클래식이 들리는 것 같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도영의 손을 바라보았다.
‘멋지다. 타이 하는 손이 저렇게 그림 같을 수도 있구나.’
시간이 흐르고 주변에 앉아 밥을 먹던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둘 사이에는 손과 실이 스치는 소리만 배경으로 남았다.
‘정말로 예쁘다.’
“……수.”
넋을 놓고 도영의 손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혜수는 화들짝 놀랐다.
“신혜수.”
“네? 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집중 안 해?”
“죄, 죄송합니다.”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도영의 손에서 눈을 뗐다. 그제야 그가 잡고 있던 실을 보니 그 짧은 사이에 도영은 국수 한 가닥 길이만큼의 매듭을 지어놨다.
'벌써 이만큼이나?'
그 모양은 또 어떤가. 매듭의 크기는 일정하고 방향은 곧은 일직선이라 조금만 멀리서 보면 굵은 실 한 가닥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혜수는 진심으로 감탄하여 박수를 짝짝 쳤다.
“와, 교수님. 정말 빠르시네요. 매듭도 정확히 일직선이에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딴 소리는 집어치우고. 이제 선생이 해 봐.”
몇 번 헛기침을 하던 도영은 퉁명스레 말하고 실을 놔버렸다. 까만 실 두 가닥이 식탁 다리에 매달려 흐느적거린다.
‘칫. 칭찬을 해줘도 좋은 말을 못 듣네.’
도영 모르게 그를 한번 흘겨본 혜수는 다시 실을 잡아들었다.
‘이렇게 하셨었지.’
도영이 조금 전에 보여줬던 움직임을 떠올리며 손을 움직이려던 순간. 번뜩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 이거 잘만 하면? ……그래, 그거야.’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까지 단번에 짜내렸다.
‘좋았어.’
혜수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고 고개를 들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교수님. 저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조금 더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