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양 한 번 제대로 떨어 봐?2022.03.23.
차는 곧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승원은 주차할 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혜수야, 그쪽 좀 봐봐. 자리 있는지.”
들리는 대답이 없어 옆을 바라보니 혜수가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곱게 잠들어 있다. 집으로 오는 내내 조잘조잘 떠들어대더니 이제 지쳤나 보다. 커다란 방지턱을 지나느라 차가 꽤 들썩이는 데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승원은 일부러 더 천천히, 부드럽게 차를 몰았고 주차한 뒤에는 시동을 껐다. 시계를 보니 제사 시작 시간까지는 30분 정도 여유가 있다.
‘조금 더 놔둘까.’
피곤한 얼굴로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혜수를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혜수를 한대 병원에 오게 하기 위해 열심히 꾀던 제가 생각나서다. 혜수가 외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뒤 어느 병원에서 수련을 할지 고민하던 때, 승원은 대번에 한대를 추천했다. 한대의 교수들이 그 분야에서는 최고라는 것을 틈만 나면 이야기했다. 없는 말은 아니었다. 이식혈관 외과 주도영을 필두로 어마어마한 수술과 논문 실적을 내는 교수들이 많았으니까. 결과적으로 혜수는 한대에 원서를 냈고 치열한 경쟁률을 뚫기 위해 대부분은 설렁설렁 일하는 인턴의 마지막 시기에도 코피가 나도록 공부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인턴 때보다 더 고생을 하고 있다.
‘미안해. 혜수야.’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 그래도 승원은 혜수에게 한대를 추천할 것이다.
‘조금만 참아. 내가 도와줄게.’
혜수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던 승원은 혜수에게로 조금씩 다가갔다. 혜수의 발그레한 뺨이, 귀여운 콧방울이, 매끄러운 입술이 점점 커져간다.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을 만큼 다가갔을 때. 승원은 대신 팔을 뻗어 혜수의 짙은 속눈썹에 손을 가져갔다. 위로 곱게 말린 긴 속눈썹에 닿기 직전. 혜수가 눈을 떴다. 제 눈앞에 보이는 승원의 손가락에 눈을 깜빡인다.
“오……빠?”
“깼어?”
“으응, 뭐 하는…… 거야?”
“여기 속눈썹이 붙어 있어서 떼주려고.”
승원이 혜수의 눈가에서 주워 올린 속눈썹 한 가닥을 들어 보였다.
“앗. 고마워.”
배시시 웃는 혜수의 손바닥에 승원은 속눈썹을 올려주었다.
“소원 안 빌어?”
“치. 내가 앤가. 나이가 몇인데. 이제 그런 거 안 해.”
“그런가.”
멋쩍어하는 승원을 보며 혜수는 덩달아 웃었다.
“그래도 오빠가 떼 준 거니까. 빌어야지.”
눈을 감고 잠깐 중얼거리던 혜수는 손을 탈탈 털었다.
“다 빌었어. 이제 가자 오빠.”
문을 열고 내리자 하늘에서는 굵은 눈송이가 쏟아지고 있었다. 승원이 혜수를 쫓아가며 가방을 뒤적였다.
“혜수야, 눈 오잖아. 우산 써야지.”
“괜찮아. 바로 저기인데 이 정도로 뭘.”
“감기 걸려.”
“괜찮대도.”
티격태격하는 사이 입구에 도착했다. 둘의 머리 위에는 어느새 눈이 하얗게 쌓였다.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냉큼 올라타는 혜수를 보며 승원은 물었다.
“아까 뭘 빌었는데?”
“궁금해?”
“어.”
“별거 아닌데.”
“그래도 궁금해.”
“좋아. 오빠한테만 가르쳐줄게.”
혜수가 손을 까딱까딱해 승원은 허리를 숙여 혜수에게 다가갔다. 혜수가 큰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귓가에 속삭인다.
“내일은 주도영 교수님한테 혼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어.”
“푸핫.”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에 지영과 지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들 왔나 보다.”
“딱 맞춰 왔네.”
현관으로 나가니 혜수와 승원이 나란히 서 있다.
“저 왔습니다.”
“엄마! 이모! 나 왔어. 음, 맛있는 냄새.”
안으로 들어가자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배고파.”
“제사 끝내고 먹자. 들어와 얼른.”
“잠깐만. 이것 좀 털어내고.”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 서서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는 혜수를 보며 지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눈 맞고 왔어?”
“아니야, 이모. 별로 안 와.”
“괜찮기는! 머리에 잔뜩 쌓였구만. 1년 차 가뜩이나 힘들 텐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지선의 날선 눈초리가 승원에게로 향했다.
“너 혜수 눈 맞게 했니?”
“미안해요, 어머니. 제가 더 신경을 더 썼어야 했는데.”
그새 눈을 다 털어낸 혜수가 지선의 팔을 붙잡고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모! 왜 오빠한테 그래?”
“…….”
“오빠가 쓰라 그랬는데 내가 싫다 그런 거란 말이야. 왜 이모는 맨날 오빠만 혼내. 내가 잘못한 건데.”
“……승원이가 오빠잖아. 그 정도는 챙겨 줘야지.”
이번에는 셋이 말하는 걸 듣고 있던 지영이 나섰다.
“어우, 잔소리. 그만해, 언니. 형부가 왔다가 언니 잔소리 듣고 그냥 가겠다.”
“…….”
지영이 혜수와 승원을 욕실로 떠밀었다.
“자자, 둘이 욕실에 들어가서 눈마저 털어. 수건으로도 좀 닦고.”
욕실로 들어간 혜수의 뒤로 승원이 따라 들어왔다.
“이모는 갑자기 왜 화를 내고 그래. 그치, 오빠?”
지선의 잔소리 때문인지 승원의 입매는 일직선으로 다물려 있었다. 혜수가 제 검지를 가져가 입꼬리를 꾹 누르더니 위로 끌어올렸다.
“기분 풀어, 오빠. 내가 미안해. 아까 말 들을걸.”
혜수의 사과에 승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괜찮아, 혜수야.”
제사가 끝나고, 혜수를 집에 데려다준 승원은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검색했다. [박 변호사님.] 잠깐의 통화음이 지나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다.
“변호사님. 한승원입니다.”
-어쩐 일이세요.
“소송을 조금 서둘렀으면 합니다.”
-그래요? 이유가 있으세요?
승원의 머릿속에 혜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저를 표독스럽게 쳐다보던 모친 지선의 얼굴도.
“아니요.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빨리 정리하고 싶어서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 오늘도 도영의 방에서 저녁 브리핑을 끝내고 나올 때였다. 퇴근을 할 사람은 퇴근을 하고 당직인 레지던트들은 응급실이나 병동, 수술실에서 바쁘게 움직일 시간이라 이맘때의 의국은 늘 한산했다.
‘힘들다. 이제 가서 좀 쉬어야지.’
도영의 방문을 닫고 발을 한 발짝 떼려는데, 저를 부르는 앙칼진 소리가 들려온다.
“야, 너 거기서 뭐해?”
“아우, 깜짝이야.”
평소처럼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오니 혜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 왜 주도영 교수님 방에서 나와?”
고개를 틀어보니 열 걸음쯤 떨어진 복도에 저와 같이 이식혈관 외과의 주치의를 맡고 있는 이경애가 서 있다. 혜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이러는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경애는 혜수를 싫어한다. 경애와는 부딪힌 일도 없고 심지어 말도 몇 번 섞어보지 못했는데 왜 이러는 걸까.
“교수님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왜 하필 이 늦은 시간에 말할 게 있어?”
“제가 언니한테 그걸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어요?”
“아까 보니 심하게 놀라던데. 뭐 켕기는 짓 한 건 아니고?”
“하…….”
더 이상 말을 섞을 가치가 없다. 혜수는 경애를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경애가 혜수를 거칠게 잡아 세운다.
“너 이젠 주도영 교수님한테 직접 찾아가서 꼬리치니?”
“무슨 뜻이에요, 그거?”
“요새 아침 회진 때 안 그러나 싶더니 이젠 아예 방으로 찾아가는구나? 대단하다, 대단해. 감히 거기가 어디라고.”
“근거 없는 말은 하지 말죠.”
“근거가 없다니. 의국 사람들 다 알아. 네가 주 교수님한테 아양 떠는 거.”
“아양……이라고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정말 아양이라도 떨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을 거다. 내가 아양 한번 제대로 떨어 봐? 엉? 여태까지 내가 저 방 안에서 어떤 고난의 시간을 보내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경애에게 조금이라도 체험을 시켜주고 싶은 마음을 알려나 모르겠다.
‘하루도 못 버티고 도망친다에 한 표.’
혜수는 경애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으세요?”
“내가 왜 후회해? 너 때문에 우리 동생이 얼마나 속상해하는지 알아?”
‘동생? 아, 조유민 선생님.’
그러니까 지금 경애가 제게 이러는 것은 유민 때문이라는 거다. 경애는 유민과 친하다.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병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유민을 아는 것 같았다. 경애를 본 첫날부터 둘은 언니, 동생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럼 지금까지 주 교수님이랑 붙어 있으면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던 것도 조 선생님 때문이었던 거야? 조 선생님이 주 교수님을 좋아하나?’
혜수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 경애의 말을 바로잡아 줬다.
“경애 언니, 언니가 말했던 ‘의국 사람들 다 안다’라는 건 조유민 선생님이랑 언니만 안다는 걸로 바꿔야 맞는 말 같은데요.”
“뭐야?”
“그리고 제 생각에, 언니는…….”
말을 끊고 뜸을 들이자 경애가 더욱 눈을 홉뜬다.
“내가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언닌 아무리 봐도 조유민 선생님의 언니는 아닌 것 같아요. 그냥 향단이 정도가 아닐까요?”
“햐, 향단이?”
“성춘향 옆의 몸종 향단이. 몰라요?”
“뭐?”
경애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말 다 했어?”
“넵. 그럼 전 이제 집에 가야 해서, 이만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손까지 흔들며 몸을 돌리는데, 경애가 다가와 혜수의 머리를 순식간에 휘어잡았다. 어깨까지 닿는 머리를 고무줄 하나로 질끈 묶어놨더니 쉽게 움켜잡혔다.
“야! 어딜 도망가?”
꽤 세게 잡아당겨진 탓에 목이 뒤로 꺾였다. 찌릿한 아픔에 미간이 일그러진다.
“손 놓으세요.”
“사과해. 향단이라고 한 것 사과하라고.”
경애가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사과는 언니가 먼저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돌았니? 내가 왜 사과를 해?”
경애가 머리카락을 쥔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암만 봐도 곱게 놔 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건 정당방위니까 제 탓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혜수도 지지 않고 경애의 머리를 한 움큼 잡아 쥐었다.
“손 놔.”
“언니가 먼저 놓으세요.”
둘 다 상대방의 머리채를 잡고 힘을 줬다 뺐다 밀고 밀리다 보니 어느새 회의실까지 들어가 버렸다.
“악. 아프다고! 손 놔!”
“언니가 먼저 놔야 내가 놓죠.”
경애의 비명과 혜수의 대꾸가 왔다 갔다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노한 음성이 들려온다.
“이경애 선생, 신혜수 선생.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휙 고개를 돌려보니 회의실 안쪽에서 한 사람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둘은 화들짝 놀라 상대의 머리통에서 손을 뗐다.
“과장님!”
“과, 과장님…….”
외과 과장 박상훈이 팔짱을 낀 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혜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다. 서로의 머리채에만 열중을 한 나머지 안에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나 참. 의국에서 몸싸움을 해? 내가 이 의국에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면인데.”
똑같이 얼굴이 붉어진 경애가 띄엄띄엄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 어, 그, 그게, 그러니까. 혜수가요…….”
혜수는 손을 뻗어 경애의 뒷머리를 누른 뒤 속삭였다.
“빨리 끝내고 싶으면 조용히 하고 고개나 숙여요.”
그제야 경애의 입이 답삭 다물린다. 혜수는 잘못을 빌었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다시 고등학교에 돌아간 기분이야. 아니, 이 정도면 초등학생이라고 해야 하나.”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둘 다 시간이 많나 봐. 요즘 1년 차들 당직이 많이 줄었지? 그래서 심심해? 그 시간에 싸움이라도 하자 이거야?”
“…….”
“그래, 타이는 몇 미터나 했지? 둘 다 이리 가져와 봐.”
상훈이 손을 까딱했다. 의국에 들어온 첫날, 상훈은 직접 새내기 1년 차들의 손에 까만 실 한 뭉치씩을 쥐여주었다. 실을 받아들고 과장실을 나온 1년 차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으악, 공포의 실 엮기 숙제!”
“소문으로만 듣던 이게 드디어 내 손에 떨어지는구나.”
“그래도 100일 당직하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않아?”
1년 차들은 그 실을 이용해 한 명당 20미터씩 매듭을 만들어 상훈에게 제출해야 했다. 장기에 손상을 주지 않도록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게, 그리고 풀리지 않는 매듭을 짓는 기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기간은 6개월이었다. 그래서 가운 주머니 안에 늘 실을 넣고 다니면서 짬이 날 때마다 매듭을 엮었다. 지금 상훈은 그동안 매듭을 얼마나 만들었는지 검사하겠다는 것이다. 경애와 혜수는 주머니를 뒤적여 저마다 만든 매듭을 내밀었다. 곧 두 개의 매듭이 상훈의 눈앞에 들어 올려졌다. 비교할 것도 없기는 했다. 당직이 줄었다고는 해도 배울 것도 많고 일도 많은 1년 차였기에 둘 다 매듭을 길게 만들지 못했다.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큰 차이 나지 않는 둘의 매듭 길이를 보고 상훈은 혀를 찼다.
“겨우 이만큼이야?”
그리고 잔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그동안은 몰랐는데, 상훈에게는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해서 하고 또 하는 재주가 있었다. 상훈의 푸짐한 배 둘 만큼이나 긴 잔소리가 끝나고, 최종 판결이 떨어졌다.
“둘 다. 10미터 만들어 와. 기한은 일주일 뒤.”
“예?”
“네?”
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몸싸움을 할 정도로 시간이 많은 것 같으니 그 정도는 충분하겠어. 그렇지?”
그 말을 끝으로 상훈은 쯧쯧거리며 회의실을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