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교수님은 내 이상형2022.03.19.
그때, 두 번째로 도영을 만났던 날. 혜수는 도영에게 머리 스타일부터 말투까지, 외모도 키도 전부 제 취향이 아니라고 그랬다. 심지어 애프터는 전혀 먹힐 얼굴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저 잘난 사람이 그런 말을 들었으니 자존심이 퍽 상했을 거다. 누구에게도 그런 식으로 거절의 말을 들은 적은 없었겠지. 혜수에게 여태 악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도 이해한다.
“그때는……. 교수님을 두 번 다시 뵙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어요. 그래야 애, 애프터 신청이 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서.”
실제로 호텔에서 처음 도영을 봤을 때. 혜수는 이렇게 생긴 사람이 진짜로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빛을 모조리 흡수할 것 같은 짙은 흑색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빛나는 흰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커다란 체격, 대리석 조각 같은 손을 가진 남자는 비현실적으로 눈에 띄었고, 눈길이 갔다. 혜수의 남자에 관한 취향의 경계가 넓기는 했지만 도영은 그 속에 들어갔다. 속에 들어가다 뿐일까. 한가운데를 정확히 차지한다. 아마 도영을 본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도영에게서 느꼈던 모든 눈부심은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만이다. 어찌나 미운 것만 골라서 말하는지.
‘그 입만, 아니지. 나쁜 말만 하게 명령하는 머리만 빼면 좋을 텐데.’
오죽했으면 삼신할미가 도영을 만들면서 이렇게 하면 너무 형평성이 떨어질 것 같아 인성은 일부러 내버려 뒀다는 우스갯소리가 돌까.
‘성격만 좀……. 어떻게 안 될까. 그럼 정말 최고일 텐데. 내 완전한 이상형인데.’
필터가 씐 도영의 모습이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교수님. 다정한 말을 건네는 교수님. 아름답고 커다란 손으로 혜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교수님.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손으로 혜수의 볼을 살짝 쥐었다가 놔주는 교수님……. 크, 완전 내 취향.
“그럼 신 선생의 취향은 어떤 사람인데?”
“교수님이요.”
무심결에 대답했다.
“어, 어? ……헉!”
손을 들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열이 훅 올라와 목덜미까지 뜨끈뜨끈하다.
‘미쳤어? 그걸 입 밖에 내면 어떡해!’
어쩌자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해야 할 것을 입 밖으로 내버렸단 말인가.
‘시, 신혜수. 드디어 돌았구나, 돌았어.’
후회해도 주워 담을 수 없다. 이 조용한 방에서 또박또박 말한 다섯 글자는 이미 도영의 귀에도 정확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내가 못 살아!’
도영의 질문이 평소의 그답지 않다는 것도,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라는 걸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 눈물을 삼킬 수밖에.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던 혜수는 도영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뭐라도 반응을 해주면 좋으련만 방 안은 조용하기만 하다. 조금 달라진 거라면 도영의 눈이 아주 약간 더 커진 것?
‘이제 어떡하지? 어떡해.’
뭘 어떡해. 고개를 숙이고 뒷머리를 벅벅 긁을 수밖에. 잠시 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사이 도영의 자세가 변해 있었다. 얼굴을 옆으로 튼 채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다. 혜수가 도영을 볼 때 늘 예쁘다고 생각했던 기다란 손만 보인다. 도영은 그렇게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결국 혜수가 다시 물었다.
“교수님?”
“…….”
“왜 그러세요?”
도영은 아무 말 없이 나머지 손을 들어 바깥쪽으로 까딱까딱 휘젓기 시작했다.
“가라고요? 저……. 가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혹시 제 사과받아주시는 거예요?”
말없이 손을 계속 까딱인다.
“그, 그럼. 제가 내일 이모부 제사가 있어서 이모 집에 가야 하는데 내일만 저녁 브리핑을 빠져도 될까요?”
이번에는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됐다!’
혜수는 힘차게 외쳤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기운차게 인사를 한 혜수는 문을 벌컥 열고 방을 뛰쳐나갔다. 혜수가 나가고도 한참이 지난 시간. 천천히 고개를 든 도영은 혜수가 서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가운을 벗어 소파에 집어 던지고 옆에 털썩 앉아 연거푸 머리를 쓸어올렸다. 짙은 머리카락이 부서질 때마다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간다. 꽉 다물렸던 입술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거……. 뭐지?”
오늘 혜수와의 브리핑이 취소되어 저녁 시간이 비었다. 도영은 운동을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시간이 생기면 늘 그래왔다. 거울에 비치는 근육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운동을 하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린다. 도영은 밴드를 놓고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 뜬 발신인 ‘아버지’를 확인하고는 무음 처리를 한 뒤 다시 책상 위에 던졌다. 하지만 끊기기가 무섭게 또 울린다. 몇 번이나 끈질기게 울려대는 휴대폰을 노려보던 도영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의원님.”
-김 의원 딸이랑은 어떻게 됐냐.
늘 그랬듯 인사말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본론부터 나온다.
“안 만납니다.”
-뭐야?
날카로운 고성이 휴대폰 너머에서 전해져 도영은 귀에서 잠시 휴대폰을 떼야 했다.
“잘 못 들으셨습니까? 안 만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뭘 어떻게 했길래 안 만나!
“원하시는 대로 만나서 밥 먹었습니다만.”
물론 그 자리에 나온 여자는 김 의원의 딸인 김가은이 아니었기는 했지.
-그런데 왜 이제는 안 만나는 거냐.
“글쎄요.”
-그렇게 중요한 자리라 말했건만. 잘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어!
“…….”
-왜 대답이 없어?
“…….”
아버지에게 신혜수를 보여주고 얘가 김가은 대신 선 자리에 대신 나왔다, 덕분에 재밌었다, 라고 말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순간 궁금해졌다. 도영에게서 대답이 없자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언성이 더욱 높아졌다.
-주도영!
“아,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무슨 이유.
“제가 손 병신이라 싫은가 봅니다.”
-뭐, 뭐야?
“그것 말고는 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
한참 침묵이 이어진 뒤 다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럼 조 원장 딸. 걔랑 자리를 만들어 보지. 썩 마음에 들지는 않다만, 어쩔 수 없지.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어.
“…….”
-일정 정해지면 다시 연락 줄 테니 이번에는 제대로 해라. 같은 곳에 있으니 더욱 화제가 되긴 할 게다. 그렇지 않니.
“……의원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언제는 제 의견이 필요했습니까.”
빈정거리는 대답에 휴대폰 너머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잠시 뒤에는 우당탕 소리가 들려온다. 물건들을 집어 던지는 소리, 고가일 게 뻔한 오래된 화병들이 깨지는 소리, 그러고 그런 아버지를 말리는 보좌진들의 다급한 목소리. 요란한 소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작은 욕설과 함께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커다란 무언가가 넘어가는 소리가 비져나온다. 도영은 그대로 손에 힘을 주어 종료 버튼을 꾹 눌렀고 이내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병원에서 탈출을 성공한 혜수는 승원의 차를 타고 승원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오빠, 있잖아.”
“응?”
“주 교수님이랑 친구지?”
“음, 대학 동기에 공보의도 같은 곳으로 다녀왔으니.”
“그럼 친구라는 거야?”
“그럼.”
“친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도영이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흐응.”
“도영이는 갑자기 왜?”
“주 교수님 학생 때는 어땠어? 지금이랑 똑같았어?”
혜수가 뭘 묻는지 알 것 같아서 승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푸핫. 많이 힘들지, 혜수야.”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도영의 엄격함과 등쌀 밑에서 동동거리면서 뛰어다니는데 왜 힘들지 않겠나.
“뭐, 힘들긴 한데. 각오하고 왔으니까. 참을만해.”
그래도 도영과 잘 지내면 좋으련만, 왜 자꾸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도영이 싫어한다는 것만 골라서 하고 있는 느낌이다.
“대단한데? 오늘 못 간다고 했던 건 뭐야?”
“요즘 나 주도영 교수님이랑 회진 준비하는 걸 저녁에 하거든.”
“그래? 원래는 아침에 했었잖아.”
“응. 바뀌었어. 저녁에 주 교수님 방에 가서 하는 걸로.”
마침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어 승원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격한 발놀림에 차가 끼익 소리를 냈다.
“잠깐. 뭐라고?”
“어? 주 교수님이랑 회진 준비를 저녁에 한다는 거?”
“아니, 그다음.”
“주 교수님 방에 가서?”
“……도영이 방에 간다고?”
“응.”
“네가……. 직접?”
“응. 그게 왜 그렇게 됐냐면. 주 교수님이랑 얘기만 하면 경애 언니가 자꾸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잖아. 그래서 내가 교수님 방에서 하는 게 어떻겠냐고 여쭤봤는데. 그러라고 하셔서.”
혜수는 꽤 고민을 하다가 도영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재성이 도영의 방에 가면 안 된다고 그렇게 당부를 했었으니까. 그런데 의외로 도영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혜수에게는 이미 운동 시설을 다 들켜서 그런 게 아닐까, 라고 혜수는 짐작했다.
“그런데 오빠, 그건 왜?”
돌아오는 대답은 한참이나 없었다. 뭘 생각하는지 승원은 정면을 본 채 눈만 깜빡이고 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살짝 흔든 승원은 다시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교수님 학생 때 얘기 더 해줘.”
“궁금해?”
“응.”
“신경……. 쓰여?”
“어?”
“……아니, 아니야.”
승원은 잠깐 숨을 들이쉬고는 말을 이었다.
“도영이야 뭐 학생 때도 유명했지. 그 얼굴에 그 성적에 그 집안에.”
“집안? 집안이 어떤데?”
“못 들어봤어?”
“응.”
선경대 출신인 데다가 이곳에 와서도 제 일을 하기에만 바빠서 병원에 떠돌아다니는 소문에는 전혀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국회의원 주기철 알아?”
“알아. 얼마 전에 종로에서 국회의원 당선됐잖아. 세 번 연속이라던가.”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혜수도 꽤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지지난달에는 주기철이라는 인물을 주제로 다큐멘터리까지 방영되었다. 바닥부터 시작해 자수성가를 한 IT 사업가가 활발한 자선사업을 통해 국민들의 인망을 얻고 국회의원까지 된 케이스였다. 요새는 곧 있을 서울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돌고 있었다.
“주기철 의원 아들이야.”
“헉, 진짜?”
전혀 몰랐다. 무엇보다 티브이와 뉴스에서 봐왔던 기철의 얼굴과 도영의 얼굴은 유전자를 공유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기철은 늘 눈이 보이지 않도록 웃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인상 좋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도영은 웃음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니까.
‘아니네, 비웃는 건 잘하긴 하지.’
“게다가 성격도 유명했거든.”
“어땠는데?”
“도영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절대 수긍하지 않아.”
“음, 그러실 것 같아.”
“상대가 선배든 교수든 전혀 상관없이 짖어댔지. 컹컹 크르르르.”
손을 쫙 펴고 금방이라도 상대방을 할퀼 것처럼 움직이는 승원을 보며 혜수는 깔깔 웃었다.
“그래서 도영이를 벼르고 있는 사람이 많아.”
“아니야, 오빠. 컹컹은 개가 내는 소리잖아. 내가 보기엔 교수님은……. 음.”
혜수는 잠깐 고민하더니 뭔가 생각난 듯 손을 딱 튕겼다.
“그래! 표범. 표범 어때? 네가 감히 겁 없이 이곳에 들어왔구나!”
혜수는 도영의 성대모사를 했고 그 모습이 성질을 내며 돌아서는 도영과 썩 잘 어울려 승원은 박장대소를 했다.
“언니, 나 왔어.”
혜수의 엄마 지영은 언니 지선네 집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영아, 왔어?”
“준비 다 했어? 밖에 눈 와. 봄에 웬 눈이람.”
“눈 와? 몰랐네. 차 많이 막혔겠다. 괜찮았어?”
“고속도로라 제설작업을 잘해놨더라. 이 동네 입구에서만 좀 막혔어. 준비는 다 했어?”
“과일만 깎으면 돼. 혜수랑 승원이랑 같이 온다고?”
“응. 혜수도 오늘 당직 아니라서 승원이가 데리고 온대. 아까 출발한다고 전화 왔었어.”
“그럼 곧 오겠네.”
지영은 거실 한편에 마련된 제사상에 다가갔다. 그곳에는 5년 전 세상을 떠난 형부의 영정 사진이 걸려 있었다.
“형부, 저 왔어요. 오랜만이네요.”
사진을 잠깐 쳐다보던 지영은 주방으로 가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
“언니 나 뭐 하면 돼?”
“됐어, 그냥 앉아 있어.”
“그럼 이것만 하고.”
“제부는 못 오지?”
“응. 오늘 야간이라.”
제사상에 올릴 과일을 골라놓은 지영은 제가 먹을 사과도 조각 내 접시에 담았다.
“언니, 우리 사과 먹고 하자. 좀 쉬어.”
“그럴까.”
지영은 의자에 앉은 지선에게 사과를 찍은 포크를 건넸다.
“본가에선 연락 없었어?”
“이제 무슨 끈이 있다고 날 찾겠어. 그렇게 오 년이나 지났는데.”
“……거기도 참 너무하다.”
“…….”
한동안 입을 닫고 있던 지선은 한탄인지 원망인지 모를 말을 꺼냈다.
“골수이식 한 번 못 해보고 가버릴 줄 누가 알았겠니.”
사대 독자였던 한제형은 주위에서 기증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외부에서 기증자를 찾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 패혈증이 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 내 탓이지, 내 탓이야.”
허망한 표정으로 자책을 하는 지선을 보며 지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애꿎은 사과가 조각조각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