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속여서 죄송해요2022.03.16.
68병동의 스테이션. 도영과의 브리핑 준비를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승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혜수야, 내일 제사 가는 거지? 7시에 주차장에서 볼까? 밖에 눈 오니까 우산 챙기는 것 잊지 말고.
내일은 승원의 아버지, 즉 혜수에게는 이모부인 한제형의 기일이다. 5년 전 백혈병으로 죽은 제형은 집안의 그 누구와도 골수가 일치하지 않았고 기증자조차 없어 이식 한 번 시도해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오빠, 나 당직은 아닌데. 못 갈 것 같아.
-왜?
-그게. ㅠ.ㅠ
왜 기는. 주도영 교수님의 방에 가서 눈물겨운 시간을 보내야 해서 그렇지.
-아무튼 오빠, 올해는 가기 힘들 것 같아. 미안해. ㅠㅠ
-아냐, 뭐가 미안해. 어쩔 수 없지. 내가 튀김 좀 싸서 가지고 올게.
-응! 좋아!
‘이모가 만든 튀김 바로 먹으면 진짜 맛있는데.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나 했더니 안되겠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영과의 브리핑을 빠질 방법이 없다. 시무룩하게 앉아 차트를 보고 있는데 2년 차 유민이 사뿐사뿐 다가온다.
“신 선생.”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더 다 냈니? 지금 봐 주면 돼?”
“네. 부탁드릴게요.”
1년 차가 되고 처음 두 달은 모든 오더에 대해 2년 차의 검사를 받아야 했다. 꼬꼬마 1년 차가 사고를 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 중의 하나였다.
“환자 차트 켜 봐.”
“넵.”
병원 프로그램의 담당 의사 이름에 ‘신혜수’를 넣자 화면이 넘어갈 정도로 긴 환자들의 리스트가 나타났다. 아직도 혜수는 모든 수술 전 환자의 주치의를 하고 있었다. 유민은 늘 하던 대로 혜수의 오더를 봐주기 시작했다.
“이 환자가 마지막이지?”
“네, 선생님.”
모든 환자를 다 훑어주고도 유민은 웬일로 그대로 앉아있었다. 평소라면 스테이션을 떠나고도 남을 시간인데. 그리고 유민은 혜수에게 처음으로 사적인 것들을 물어보았다.
“요즘 일은 할만하니? 환자 많잖아.”
“네, 뭐…….”
“많이 힘들지. 환자도 많은데 공부도 해야 되고. 주 교수님도 무서울 거고.”
“뭐, 대충…….”
처음엔 도영이 많이 무서웠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던가. 첫날부터 거의 매일을 도영과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도영과 함께하는 시간들에도 익숙해져 가던 참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도, 도영에게 혼나는 것도 긴장되기는 하지만 처음만큼 두렵고 힘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장점도 있었다. 도영은 남을 가르치는 능력 또한 발군이었다. 자신이 했던 말을 모두 기억하는지 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하는 경우가 없었다. 물론 까칠함이 섞여있기는 했지만 혜수가 모르는 것만 골라서 알기 쉽게 설명을 해주니 혜수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나아졌다. 그리고.
“하아…….”
이 모든 건 얼마 전까지의 얘기이다. 요 근래 도영이 더욱 쌀쌀맞아지기 전까지. 원래도 승원처럼 다정다감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말도 못 붙일 정도는 아니었다. 도영의 방에서 그가 운동하는 것을 목격한 날 이후 도영이 더욱 독해졌다. 요즘 도영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행동했다. 철자 하나, 숫자 하나라도 틀리게 말하면 대역 죄를 지은 것처럼 쏘아붙였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역풍만 맞은 셈이다.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야 하는 사람이 대화를 빙자한 꾸중과 나무람을 하고 있으니 혜수는 죽을 맛이었다. 혜수의 한숨을 들은 유민이 다정하게 물었다.
“응? 많이 힘들다고?”
“아, 아니, 아니에요. 할만해요.”
“그래? 환자가 이렇게 많은데 힘들지 않아?”
“괜찮아요. 이젠 익숙해져서.”
혜수는 일부러 입꼬리를 위로 끌어당겼다.
‘괜찮다는데 왜 자꾸 힘드냐고 묻는 거야?’
“조금만 더 참아. 얼마 전에 내가 주 교수님께 환자 배정을 원래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는데.”
혜수의 대답과 상관없이 유민은 지금 혜수가 힘들다고 판단을 내린 듯했다.
“네 생각보다 훨씬 합리적인 분이셔. 상이나 벌을 내릴 때는 이유가 확실하시거든. 지금 네가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니 생각해 보시겠대.”
유민이 계속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할 때마다 풍성한 속눈썹이 우아하게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또 힘든 것이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말해.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도와줄 테니.”
“네, 선생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유민은 이전처럼 우아한 몸짓으로 병동을 빠져나갔다. 유민이 사라지고, 혜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교수님이 합리적이다라. 벌에는 이유가 확실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합리적인 사람이 왜 제게만 이렇게 못되게 굴고 있단 말인가. 경애는 놔두고 왜 저만 따로 불러다가 브리핑 교육을 빙자한 비난을 한단 말인가.
‘왜? 왜?’
한참의 고민 끝에 혜수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래. 원인은 그것뿐이겠네.’
도영은 지금 제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제가 가은을 대신해 선에 나갔던 일일 것이다. 물론 수술 대기 환자에게 큰 사고를 치고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도영의 방에 들어가 그의 맨몸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중간에 추가된 사건이지 도영과의 질의응답시간을 가지게 한 최초의 원인이 아니었다. 첫날부터 도영은 제게 직접 브리핑 방법을 가르쳤으니까. 즉, 근본적인 문제는 제가 도영을 속인 것이다. 도영을 세 번째로 봤을 때던가. 병원 카페에서 그러지 않았나. 그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고.
‘내가 심한 말들을 하긴 했…… 지?’
도영에게 했던 행동과 말들이 과했던 것은 스스로도 인정한다. 게다가 그동안 제대로 사과를 한 적이 없었다. 사과를 하려고 여러 번 시도를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환자나 의학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면 입도 벙긋 못하게 하는 도영 덕분에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래. 오늘 사과를 해보고 받아주시면 제사에 가면 안 되냐고 여쭤보자.’
결심을 한 혜수는 벌떡 일어나 의국으로 내려갔다. 도영의 방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교수님, 신혜수입니다.”
딱 한 번 두드리자마자 싸늘한 대답이 돌아온다.
“들어와.”
“하하……. 네, 안녕하세요.”
삐딱한 태도의 도영은 혜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툭 던졌다.
“뭐해. 앉아.”
“넵. 그런데 저…… 그…… 교수님. 먼저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한 번만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환자에 관한 건가?”
“아니요.”
“그럼 나중에.”
“정말 잠깐이면 되거든요.”
“나중에.”
“1분, 아니 30초요.”
끈질긴 혜수의 부탁에 도영의 입에선 짜증이 가득 묻은 한숨이 내뱉어졌다.
“요점만 말해. 되도록 빨리.”
“넵.”
잠깐 숨을 크게 들이쉰 혜수는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사과드리려구요.”
“…….”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가 교수님을 여러 번 속였어요. 죄송해요. 정말로.”
고개를 푹 숙인 혜수를 쳐다보던 도영이 다리를 꼬았다. 긴 다리가 비틀리더니 깍지 낀 매끈한 두 손이 무릎 위에 놓인다.
“뭘 속였는데?”
도영이 관심을 보인다. 여기까지만 와도 반은 성공인 셈이다.
‘말 잘하자. 신혜수.’
혜수는 아랫배에 힘을 꽉 주었다.
“가은이를 대신해서 호텔에 나갔던 거요. 가은이는 제 친구인데요, 그때 가은이가 정말 중요한 다른 약속이 겹쳐버려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대신 나갔습니다.”
“…….”
“또 두 번째 뵀던 날도요. 그날도 하필 가은이가 또 중요한 약속이 겹쳐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대신 나갔어요. 그, 세 번째로 병원 카페에서 만났을 때도. 가은이인 척하고 문자 본 것처럼 해서 죄송합니다.”
“…….”
“그동안 제대로 사과를 드렸어야 했는데 이제야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래서?”
“예? 그, 그러니까. 거짓말을 해서 정말 죄송합니…….”
“그게 다야?”
“예?”
“날 속인 것 들은 그게 다란 말이지?”
혜수는 잠깐 갸웃했다.
‘내가 또 뭘 속인 게 있나? 아닌데?’
더 이상은 생각 나는 게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가은인 척한 것 외에는 전혀 없다. 혜수는 눈을 깜빡이며 도영을 쳐다보았다. 마음속으로 열 번도 더 외쳤다.
‘뭐가 더 있나요, 교수님?’
혜수를 매섭게 쳐다보던 도영이 코웃음을 거세게 쳤다. 손깍지를 풀더니 자세를 바로 한다. 이후로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에는 더욱 가시가 돋아있었다.
“시간 낭비했군. 브리핑 시작해.”
“예, 예?”
“시작하라고. 내 말 안 들려?”
점점 높아지는 언성에 혜수는 어쩔 수 없이 준비해온 종이와 수첩을 펼쳐야 했다.
“네, 네. 합니다. 시작합니다.”
목을 가다듬고 손으로 하나하나 짚으며 읊기 시작했다.
“1호실 김춘웅님은 내일 마취과 코멘트 대로 카디오(심장내과) 컨설트를 다시 보고 수술을 결정할 예정입니다. 안티(antibiotics: 항생제)는 내일부터 세프트리악손으로 교체할 예정입니다.”
“세프트리악손이라. 몇 세대인 줄은 알고 쓰는 건가.”
“넵. 3세대입니다.”
“3세대 세파와 2세대 세파의 차이가 어떻게 되지?”
“3세대가 2세대 보다 그람 네거티브 균에 더 특화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3세대 중에 슈도모나스(pseudomonas) 균에 듣는 항생제들은?”
“세프타지딤(ceftazidime)이 있습니다.”
“또.”
“…….”
“또!”
답이 없자 또 싸늘한, 레이저 같은, 살벌하기 그지없는 눈빛이 돌아온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더욱 심하다. 아무래도 내가 조금 전에 무언가 말을 잘 못한 것 같은데. 그게 뭐지?
“……죄송합니다.”
혜수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오기는 했지만 교수인 도영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연했다. 뭘 하나 대답을 하면 틀린 게 나올 때까지 질문을 한다. 게다가 관련된 논문들부터 연관된 배경들까지 물어보는데 어떻게 대답을 하냔 말이다. 지금까지의 스코어를 종합해 보면 묻는 것들 중 대충 3분의 1은 맞췄고, 3분의 1은 틀렸다. 3분의 1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내용들이었다.
“세대별 세파 종류와 적응증. 내일까지 정리해서 가져와.”
“네…….”
이후로도 드넓은 방에는 도영의 잔소리와 혜수의 죄송합니다, 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오늘의 질문 폭격들이 모두 끝났다. 도영은 말도 하기 싫은지 나가라는 손짓을 까딱까딱했다. 혜수는 인사를 꾸벅하고 방을 걸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아오, 내가 뭘 더 속인 거냐고.’
아까의 도영의 표정과 말투를 떠올려보면 뭔가 더 있긴 한 거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꼭 사과하고 내일 제사 가야 하는데.’
한숨을 쉬며 미적미적 움직이는데 머릿속에 문득 한 장면이 떠오른다.
‘아! 설마……. 그건가?’
그런데, 막상 떠올려보니 그게 정말 맞나? 란 의문이 든다. 그 상황에서 혜수가 거짓말을 한 것은 맞다. 그런데 그게 거짓말인지 도영이 대체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자신이 도영에게 한 거짓말은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 진짜 그건가?’
혜수가 문 앞에 서서 나가지를 않자 도영이 인상을 쓴다.
“안 나가?”
“잠깐만요, 교수님.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기회를 줄 일이 뭐가 있다고.”
“있어요, 교수님! 제가 뭘 더 잘못했는지 알아요. 기억났어요.”
“…….”
혜수는 다시 도영을 마주 보고 섰다. 무심한 듯 싸늘하게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찔끔했지만 두 다리로 굳게 버텼다.
“죄송해요. 교수님. 실은……. 거짓말한 게 하나 더 있는데요.”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 한 번 말해 봐라, 그리고 이번에도 틀리면 넌 알아서 해라’ 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여전히 곧게 내려오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아이, 이게 맞나? 이번에도 틀리면 끝장인데.’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다.
‘에라이 모르겠다.’
“사실은……. 그……. 거짓말한 게 뭐냐면요.”
혜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제가 그때 교수님이 제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던 거요. 그거 거짓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