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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흉부와의 만남 (12/110)

12. 흉부와의 만남202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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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수는 지금 병원에서는 저와 승원이 사촌이란 사실을 숨기고 있다. 한대 외과는 대한민국에서 외과의사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원서를 넣을 만큼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아무래도 병원의 교수가 가족이란 걸 알면 이곳에 들어올 때 도움을 받았을 거다, 라는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았다. 실제로 혜수의 동기들 중에도 그런 백을 활용해 가고 싶은 과에 들어가는 애들이 있었다. 무려 의대생 때부터 인기 좋은 과를 배정받아 놓는 사람도 있다던가. 게다가 얼마 전에는 의대 입학부터 같은 학교 총장인 할아버지의 힘으로 들어간 사람이 공론화가 된 사건이 있었다. 연일 신문과 뉴스의 메인 기사로 보도될 정도로 난리가 났다. 덕분에 지금 1년 차들 사이에서는 청탁에 의한 부정 입국이 꽤 예민한 문제였다.

16550790960997.jpg‘조금이라도 그런 오해를 사기 싫어.’

이곳에 들어와서 보니 승원은 도영만큼이나 영향력 있는 교수였다. 한대 병원에는 실력으로나 외모로나 양대 산맥이 있는데, 그 둘 중 한 명은 외과의 사탄 주도영 교수이고 나머지 한 명은 정형외과의 대천사 한승원 교수란 말을 들었을 때는 어찌나 놀랬던지. 혜수에겐 좋은 오빠이기만 한 승원이었는데 그 정도 위치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승원의 사촌이란 게 알려지면 ‘쟤도 혹시 들어올 때 백을 썼나?’란 말이 어디서든 한 번쯤은 나올 것 같았다.

16550790960997.jpg‘그건 절대 싫어.’

혜수는 입국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 병원 생활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갈 생각이다. 그래서 승원에게도 병원에서는 조심하라고 단단히 말해놓은 상태다. 혜수의 앞을 막아선 승원이 빙긋 미소 지었다.

16550790961006.jpg“그게 아니라, 주 교수.”

도영의 사나운 시선이 승원에게 건너갔다.

16550790961006.jpg“내가 68 병동에 컨설트 환자가 있어서 보러 왔다가 우연히 신 선생을 만났는데. 인사말로 저녁을 먹었냐고 했더니 아직 안 먹었대서. 불쌍하잖아.”

승원의 말에 맞추어 혜수는 최대한 입꼬리를 내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16550790961006.jpg“11시가 넘었는데. 그래서 내가 억지로 데려가던 길이야. 신 선생은 안 가겠다는 걸 내가 가자고 그랬어.”

16550790961019.jpg“이것 참,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OS(정형외과)에서 GS(일반외과) 레지던트의 저녁까지 신경 써줄 줄이야.”

16550790961006.jpg“딱히 신경을 쓰려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승원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16550790961019.jpg“그렇군. 한 교수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내가 더 할 말은 없지. 저녁도 못 먹었다는데 야식 맛있게 먹길 바라.”

말을 마친 도영은 몸을 돌렸다.

16550790960997.jpg‘이렇게 끝나는 건가?’

의외로 도영이 순순히 넘어가 혜수는 놀랬다. 평소라면 당장 돌아가서 오더 보는 것을 마저 끝내라 할 사람인데. 다행이라 생각하며 발을 옮기려는데, 도영이 한마디를 더 덧붙인다.

16550790961019.jpg“참, 오늘 메뉴가 떡볶이던데. 맛있더군.”

그 말을 끝으로 도영은 둘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옆의 넓은 공간을 놔두고 하필 그 사이로, 승원을 탁 치고 나간다. 곧 도영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도영의 뒷모습을 보던 승원이 고개를 갸웃한다.

16550790961006.jpg“이상하네. 도영이가 웬일로 야식을 먹었지? 원래 밤늦게 뭐 먹는 애가 아니거든.”

몸 관리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도영은 떡볶이 같은 정제된 탄수화물은 입에 대지도 않는다. 특히 이 늦은 밤이라면 더더욱.

16550790960997.jpg“야식을 안 드셔?”

16550790961006.jpg“응.”

승원의 말을 듣고 나니 속으로 의심하던 것이 확실해졌다.

16550790960997.jpg‘그럼 아까 그 말은 진짜 떡볶이가 맛있어서 한 것이 아니야.’

일부러, 저더러 들으라고 꺼낸 말일 것이다. 처음 도영을 만났을 때,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뭐냐는 질문에 떡볶이라고 대답했었다. 가은이 싫어하는 게 진짜로 떡볶이라 최대한 가은의 입장에서 대답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즉, 평소 먹지도 않는 떡볶이 이야기를 일부러 꺼냈다는 것은 제가 도영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을 잊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아까 도영의 싸늘했던 표정을 보면 더욱 확실하지 않은가.

16550790960997.jpg‘하아. 큰일 났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혜수의 얼굴을 보며 승원이 고개를 또 갸웃했다. ***

16550790988142.jpg“야, 껌!”

혜수는 발걸음을 멈췄다. 제 이름은 아니었지만 최근 별명이 껌이 된 탓이다. 새로 들어온 외과 1년 차가 거하게 사고를 쳤다는 소문은 온 병원에 퍼졌다. 친한 병동 간호사들은 혜츄 선생님, 이라 장난삼아 부르기도 했다.

16550790988142.jpg“혜츄 선생님. 대체 왜 그랬어요?”

16550790960997.jpg“모르겠어요. 전 껌은 안 된다 그러려 했는데, 된다고 말을 잘못했나 봐요.”

16550790988142.jpg“알고는 있었던 거예요?”

16550790960997.jpg“네. 제가 마취과 돌면서 수술 전 준비를 얼마나 했는데요. 휴우. 그날 너무 정신이 없었나 봐요.”

  주치의 첫날 아침부터 도영에게 혼이 나 정신이 나가 있었던 차였다. 거기다가 경애가 이상한 질문을 해대서 더욱 집중이 흐트러진 상태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말이 잘못 나간 것 같았다.

16550790988142.jpg“으이구,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에요. 힘내요, 혜츄우우!”

  이후로 껌, 츄 등의 단어가 들리면 혜수는 자동으로 반응했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3년 차 황재성이 저를 보며 손을 까딱까딱하고 있다. 다가가니 USB를 하나 쥐여준다.

16550790988142.jpg“이거 주 교수님한테 보여드려. 안에 수술 동영상 샘플 있거든? 이 중에 몇 번째를 학회에 제출할지 골라 달라 그래. 난 지금 수술 들어가야 해서.”

16550790960997.jpg“언제까지요?”

16550790988142.jpg“6시까지. 교수님은 강의 가셨어.”

16550790960997.jpg“넵.”

돌아서는 혜수를 재성이 다시 붙잡았다.

16550790988142.jpg“잠깐!”

16550790960997.jpg“왜 그러세요?”

16550790988142.jpg“주의할 게 있어. 너 사탄한테 더 찍히면 안 되잖아.”

재성이 큰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춘다.

16550790988142.jpg“주 교수님 방에는 절대 들어가지 마.”

16550790960997.jpg“왜요?”

16550790988142.jpg“나도 몰라. 그냥 끔찍이 싫어한대. 전에 누가 한 번 들어갔다가 사달이 났대. 그러니 조심해. 알겠지?”

16550790960997.jpg“아……. 네. 그럴게요.”

참 특이한 주의사항이라 생각하며 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혜수는 일하는 틈틈마다 도영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방에 직접 찾아가도 안에 없었다. 오후가 되고 교수들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이러다 오늘 중으로 못 만나겠단 불안감이 든다. 6시를 20분 남겨놓고 혜수는 또 의국으로 내려가 도영의 방문을 두드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안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귀를 쫑긋 세우니 작은 기계음 같은 것이 들린다.

16550790960997.jpg‘안에 계신 건가?’

다시 똑똑, 문을 두드렸는데 대답은 없이 또 기계음만 들린다. 고민하던 혜수는 문 손잡이를 살짝 돌렸다. 재성이 안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으니 문을 조금만 열고 도영을 부를 생각이었다.

16550790960997.jpg“실례합니다.”

좁은 문틈으로 내부를 들여다보던 혜수는 깜짝 놀랐다. 짙은 회색의 벽과 원목 가구들로 채워진 도영의 방은 의국 안에 있는 교수의 방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넓고 쾌적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생각하겠으나. 특이하게도 이 넓은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운동기구들이었다. 한 면의 전부가 거울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헬스장이나 필라테스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구들부터 재활의학과의 치료실에 가면 볼 수 있는 치료용 기구들까지 다양한 기구들이 벽을 따라 늘어져 있었다. 책장에 꽂힌 의학 서적과 논문들의 양도 무척 많은 편이었는데 운동 기구들의 덩치가 더 컸다.

16550790960997.jpg‘여기가 주 교수님 방이 맞나?’

혜수는 다시 문밖의 명패를 다시 확인했다. 명패에는 주도영이란 이름이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16550790960997.jpg‘어라, 맞는데?’

이 명패가 아니었으면 순간 헬스장에 온 건 아닐까 착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기구 속에서 혜수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상의를 벗은 채 거울을 보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세밀하게 짜인 근육은 남자가 천장에 매달린 고무밴드를 당길 때마다 촘촘하게 수축했다. 땀방울이 맺힌 몸은 빛을 받아 반짝였다.

16550790960997.jpg‘와…….’

아름다운 몸이었다. 칼로 대리석을 조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남자들의 몸에 큰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혜수는 여기에 왜 왔는지, 이곳이 누구의 방인지도 잊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혜수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남자의 운동은 계속되었다. 스트레칭을 끝낸 남자는 이번에는 밴드를 늘렸다 줄였다 하며 관절의 가동 범위를 늘렸다. 한 번 팔을 내렸다가 올릴 때마다 밴드가 늘어나는 길이는 정확하게 배가 되었다. 각도기로 측정하지 않아도 매번 일정한 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아 얼마나 오랜 시간 운동을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잠시 뒤, 반대쪽 팔의 운동까지 끝낸 남자는 옆의 운동기구로 가려는 듯 몸을 틀었다. 그리고.

16550790960997.jpg‘헉!’

혜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16550790960997.jpg“교, 교수님!”

남자는 도영이었다. 그의 방 안에 있었으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더욱 놀랍다. 혜수를 발견한 도영이 한껏 인상을 썼다.

16550790961019.jpg“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도영이 한 발짝씩 다가올수록 그의 대흉근과 복직근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 또한 꽤나 충격적이라, 혜수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입을 다무는 것도 잊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16550790960997.jpg“어, 어. 그게요…….”

도영이 다가와 혜수에게 손을 휙 뻗었다.

16550790960997.jpg‘으악.’

위협적인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는데 쾅, 하고 문이 충돌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닫은 도영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16550790961019.jpg“묻잖아. 지금 뭘 하는 거냐고.”

16550790960997.jpg“여, 연락이 안 되어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16550790961019.jpg“주인 허락 없이 방 안을 엿보는 게 취미인가.”

16550790960997.jpg“우, 운동 중이신 걸 몰랐어요.”

16550790961019.jpg“몰랐던 것치고는 시선이 꽤 뜨겁던데.”

도영이 혜수의 얼굴 옆으로 다시 손을 내려쳤다. 쾅, 하고 문이 깨질 듯 커다란 소리가 또 들린다. 절대 그의 방에 들어가면 안 된다 신신당부를 하던 재성의 말이 이제 기억난다.

16550790960997.jpg‘내가 못 살아!’

급히 용서를 빌었다.

16550790960997.jpg“죄송해요. 하지만 정말 교수님을 몰래 보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혜수는 가운 주머니를 뒤적여 USB를 꺼냈다.

16550790960997.jpg“이거요. 이거 드리려고 왔어요. 수술 동영상 샘플인데 오늘 중으로 학회에 제출할 걸 골라야 한다고 해서요.”

16550790961019.jpg“…….”

혜수를 노려보던 도영이 USB를 휙 집어갔다. 여전히 눈에서는 형형한 레이저가 나온다.

16550790960997.jpg“확인 부탁드립니다. 제가 여기서 기다렸다가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16550790961019.jpg“여기서?”

도영이 검지로 바닥을 휙 가리켰다. 덕분에 대흉근이 더욱 도드라진다. 불룩거리는 근육을 본 혜수는 급히 몸을 돌렸다.

16550790960997.jpg“헉. 아니요!”

도영의 몸이 눈앞에서 사라지니 좀 살 것 같다.

16550790960997.jpg“전 뒤돌아 있을게요. 처, 천천히 확인하시고 주세요.”

문에 머리를 박고 서있으니 도영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혜수는 한숨을 삼켰다.

16550790960997.jpg‘하아. 십년감수했네.’

잠시 뒤 다섯 개의 동영상을 모두 훑어본 건지 도영이 다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성질이 난 게 분명한 도영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16550790961019.jpg“세 번째로 하라 그래.”

16550790960997.jpg“넵!”

16550790961019.jpg“가져가. USB.”

16550790960997.jpg“네.”

혜수는 뒤로 팔을 쭉 뻗어 손바닥을 펼쳤다. 이것만 받으면 여기서 탈출할 수 있다. 도영이 손바닥에 USB를 올려주었다. 하지만 USB는 혜수의 속도 모르고 손바닥을 스친 뒤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덜그럭 소리와 함께 혜수의 심장도 쿵 떨어졌다.

16550790960997.jpg‘으헉! 저게 왜 떨어져!’

혜수는 부리나케 허리를 숙여 눈을 감고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16550790960997.jpg‘어딨어, 어딨냐고.’

그 꼴을 보던 도영이 코웃음을 커다랗게 친다.

16550790961019.jpg“하. 가지가지 하는군.”

바닥을 더듬던 혜수가 마침내 USB를 손에 쥐었다.

16550790960997.jpg‘여깄다!’

이제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여전히 눈을 감고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문을 찾았다.

16550790960997.jpg‘문아, 어딨니. 어딨는 거야? 제발 나와주련?’

필사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드디어 손끝에 딱딱한 것이 닿는다.

16550790960997.jpg‘이거다!’

손으로 잡히는 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런데, 느낌이 좀 이상하다. 문이 왜 이렇게 따뜻하단 말인가? 게다가 왜 부드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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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슬쩍 떠보니. 이럴 수가! 손에 잡힌 것은 도영의 가슴이다.

16550790960997.jpg“어?”

얼빠진 혜수의 시선과 좌우로 흔들리는 도영의 시선이 한동안 부딪혔다. 그 후, 혜수는 도영의 인상이 실시간으로 일그러지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16550790961019.jpg“당장…… 나가!”

16550790960997.jpg“가, 갑니다, 갑니다!”

혜수가 꽁지 빠지게 뛰쳐나가고 문이 쾅 닫혔다. 도영은 닫힌 문을 보며 들썩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붉은빛이 도영의 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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