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감히 나를 팔아?2022.02.26.
그 차가운 시선을 받고도 승원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레지던트 선생은 가 봐. 가서 할 일 해.”
승원이 손을 밖으로 내젓는다.
“하, 하지만…….”
“가. 괜찮아.”
‘정말 가도 되는 건가?’
둘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는데 도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승원만 쏘아보고 있을 뿐. 그걸 긍정의 표시로 받아들인 혜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스테이션을 벗어났다. 걸음아 날 살려라 뛰어가는 혜수의 뒤꽁무니에 도영의 시선이 옮겨가자 승원이 도영의 턱을 잡아 제게로 다시 돌린다.
“자자, 월요일부터 성내지 말고. 같이 내려가자. 나도 수술실 가려던 참이야. 오늘 오후 수술이라.”
“이거 놔.”
도영은 제 어깨에 올려진 승원의 손을 거세게 털어냈다.
“어후, 승질 봐라. 무셔워라.”
“닥쳐.”
그래도 승원의 뒤를 따라 발을 옮기기는 한다. 커다란 두 남자가 스테이션에서 사라지자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간호사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수술실 한 편에 딸린 교수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내내 승원은 계속 말을 붙여왔다. 뭐가 그리 신나는 건지 평소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대답 없는 도영은 내버려 두고 흥얼흥얼 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한다. 도영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시끄러워.”
캐비닛을 쾅 닫고 나가는 도영에게 승원은 손을 힘차게 흔들어 주었다.
“가는 거야? 오후에도 수고.”
탈의실을 나와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짧은 복도를 지나면 수술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 딸린 조그만 방에 들어가 에어샤워를 하던 도영은 뭔가 허전한 느낌에 멈춰 섰다. 수술복 주머니를 뒤지자 곧 그 허전한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휴대폰.’
혜수에게 질문을 하는 동안 스테이션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는데 그냥 와 버렸다. 도영은 다시 병동으로 발을 돌려야 했다. 생전 하지도 않던 실수를 한 자신에게 나지막하게 욕을 했다. 수술실에서 병동까지는 두 층만 올라가면 되기 때문에 계단을 택했다. 마지막 계단에 올라선 뒤 문을 막 열려는데, 문 너머 여자들의 대화 소리, 아니, 언성이 꽤 크게 들려온다.
“야, 신혜수.”
“네, 언니.”
“왜 대답을 안 해. 너 대체 뭐냐니까?”
“뭘 묻는 건지 몰라서 바로 대답을 못 했어요. 지금도 정확히는 의도를 모르겠구요. 전 외과 1년 차 레지던트 신혜수예요.”
“허, 장난하니? 내가 그걸 몰라?”
“음, 제 신상이 궁금한 거라면. 나이는 현역이고 고등학교는 현대고, 대학은 선경대 의대 출신이에요.”
“뭐?”
“아, 이름부터 말해줬어야 했나요? 영월 신 씨에 이름의 뜻은 한자로…….”
“야!”
이성을 잃은 듯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한 명은 신혜수겠고. 상대는…….’
앙칼지고 과장되게 말하는 여자.
‘1년 차 이경애.’
“아우, 답답해. 그게 아니고! 왜 주 교수님이 아까 널 따로 불렀던 거냐고.”
“아, 그거요? 진작 그렇게 물어보시지. 언니도 아까 들으셨겠지만 제가 회진 때 한 발표들이 틀려서 부르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주 교수님이 왜 널 직접 부르냐고! 교수님 원래 그런 거에 신경 쓰시는 분 아니거든!”
“음, 글쎄요…….”
잠시 대화가 끊겼다. 도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혜수의 답을 기다렸다. 저와 만났을 때 온갖 질문에 잘도 둘러대던 애가 이번에는 뭐라 대답할지 궁금했다.
“아.”
무언가 생각난 듯 혜수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이건 제 생각인데요.”
“그래, 한번 말해 봐. 네 생각이 뭔데?”
“어제 조 선생님이 저에게 인계를 꽤 오랫동안 해 주셨는데요. 그때 조 선생님이 많이 힘들어 보이셨거든요.”
“조 선생님? 조유민 선생님?”
“네, 조유민 선생님요. 저처럼 둔한 사람도 알아챌 만큼. 아무래도 제가 이해를 잘 못하니까 반복해서 설명해 주시느라 그러셨나 봐요.”
“흐음…… 그래서?”
이 대답이 마음에 드나 보다. 경애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여기까진 오케이.’
그리고 혜수는 확신했다. 경애는 유민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유민은 경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경애는 유민에게 잘해주고 싶어 한다. 말을 붙이기도 무서워하던 도영 앞에서 적극적으로 유민을 대변할 만큼.
“주 교수님도 그걸 아신 거지요. 그래서 조 선생님을 배려해 주신 게 아닐까요? 조 선생님께서 힘드실까 봐 일을 직접 덜어주신 거지요.”
도영은 삐져나오려는 실소를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려야 했다.
‘이것 봐라? 나를 팔아?’
“그, 그런가?”
“네.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진짜 그런가?”
“그게 아니라면 저 같은 1년 차를 왜 상대하시겠어요. 그것도 브리핑 방법 따위를 알려주실 이유가 있을까요.”
“흠.”
“그것밖에 없지 않아요?”
“흐응.”
들려오는 경애의 추임새는 혜수의 말에 수긍하는 눈치다.
“더 할 말 없으세요? 저 CT실에 가봐야 하는데.”
“그래, 가 봐.”
한층 밝아진 경애의 목소리에 이어 문고리가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도영은 저도 모르게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 숨을 죽였다. 그러고서는 의아해했다.
‘내가 왜 숨었지?’
잠시 뒤, 경애가 문을 열고 나오고 혜수도 뒤이어 나왔다. 계단실의 문을 닫은 혜수는 멀어지는 경애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왜 가지 않고?’
잠깐 서 있던 혜수는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는 경애의 등 뒤에 대고 주먹질을 힘차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도영은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혜수마저 계단을 완전히 내려간 뒤에 도영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수술실 18번 방.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교수님, 안녕하세요.”
도영이 수술방의 문을 열고 나타나자 이식혈관 외과의 치프를 맡고 있는 3년 차 황재성이 벌떡 일어났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스케줄 표를 찾는다. 늘 하던 대로 도영에게 오늘의 수술 스케줄을 브리핑하려 했다.
“교수님, 첫 환자는…….”
“알아. 오늘은 그만하지. 곧 환자가 들어올 테니.”
“네, 넵!”
이 브리핑은 스케줄을 듣자고 만든 자리가 아니었다. 곧 전문의가 될 치프에게 수술에 관해 가르치기 위한 자리였다. 스케줄이야 해가 뜨기도 전부터 일어나 살폈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까지 끝냈다. 이 시뮬레이션은 외과 의사 타이틀을 달고 난 이후부터 단 한 번도 빼먹지 않은 도영의 아침 일과다. 그가 천재 의사라고 불리는 것에는 그의 타고난 재능도 물론 있지만 이 같은 노력이 바탕에 있었다. 덕분에 도영에게 벗어난 재성만 신이 났다. 윽박과 질책이 난무하는 브리핑을 하루 건너뛰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아싸, 응급수술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잠시 뒤, 수술방의 문이 열리며 환자의 침대가 들어왔다. 수술 침대로 환자가 옮겨가고, 환자의 몸에는 온갖 모니터링 장치가 연결되었다. 띠띠띠띠. 규칙적인 심박동 소리가 수술방 안에 힘차게 울려 퍼졌다. 환자의 입속을 살펴본 마취과 교수가 입안에 방해되는 것은 없다는 오케이 사인을 준다. 마취과 간호사는 카트를 끌고 교수 옆으로 왔고 교수는 산소가 나오는 마스크를 잡고 환자의 입과 코에 가져갔다.
“환자분, 심호흡하세요."
“교수님, 약은 어떻게 쓸까요?”
“프로포폴(수면유도제의 일종) 140밀리그램, 로큐로니움(근이완제의 일종)은 70밀리그램 쓸게요.”
환자가 심호흡을 하자 산소포화도가 점점 올라갔다. 산소포화도가 100퍼센트가 되는 것을 확인한 마취과 교수는 약을 주라 손짓했다. 곧 환자의 수액 라인에는 하얀 약물이 차올랐다. 오래 지나지 않아 환자는 깊은 잠에 도달했고 근이완제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호흡근마저 마비되었다. 환자는 마취과 교수가 불어 넣어주는 산소에만 의지하는 완전한 마취 상태였다.
“삽관할게요.”
“네, 교수님.”
환자의 목을 뒤로 젖힌 마취과 교수는 후두경을 받아들고 환자의 입안을 살폈다. 그런데.
“어? 어?”
마취과 교수의 외침에 간호사가 가까이 다가갔다.
“왜요, 교수님?”
“여기 이상한 게 있는데요?”
“뭐가요?”
“뭔진 모르겠는데 기도에 걸쳐져 있어요.”
“헉, 그게 뭔데요? 빨리 꺼내야지요!”
“아, 이거…… 안 잡혀요. 하필 윗니도 심하게 흔들려 가지고 힘도 세게 못 주는데.”
마취과 교수는 환자의 머리맡에 붙어 끙끙댔다. 양손에 들고 있던 기구들은 모두 환자의 입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잘 안 나와요, 교수님?”
“아으, 이거 안 잡히는데.”
한참을 씨름하던 마취과 교수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크, 큰일이다. 점점 안으로 들어가요!”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모니터에선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삐익, 삐익, 삐익- 산소포화도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울리는 알람이.
“그냥 앰부 배깅 더 할게요!”
당장 삽관은 힘들다고 판단한 마취과 교수는 후두경은 치우고 다시 마스크를 집어 환자의 얼굴에 밀착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기가 잘 통하던 환자의 기도는 뭔지 모를 그 물체 때문에 꽉 막힌 듯했다. 산소를 불어 넣어줘도 폐로 들어가지 못하고 뻑뻑거리는 소리가 되어 환자의 입 주위로 다시 돌아 나온다.
“아우, 이게 왜 이래!”
마취과 교수는 어떻게든 환자에게 산소를 전해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옆에 선 간호사는 모니터 속 숫자를 읊어주었다. 애타는 목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산소포화도 점점 떨어집니다! 92프롭니다!”
“88프롭니다!”
떨어지는 숫자만큼 높게 울리던 심박동 소리도 점차 낮아졌다.
“무슨 일입니까? 삽관이 잘 안 됩니까?”
“주 교수님.”
시뻘게진 얼굴의 마취과 교수가 도영을 쳐다보았다.
“성대 바로 앞에 뭔가가 있어요. 지금 그게 기도를 막고 있는데 안 나와요. 꺼내 보려고 해도 점점 안으로 들어가구요. 게다가 디피컬트(difficult intubation:삽관하기 어려운 신체 모양을 일컬음)예요. 턱이 작은 데다가 짧아서 기도 확보 자체가 어려워요. 혀도 크고요.”
“제가 한번 해봐도 되겠습니까.”
“네, 네. 그럼요.”
마취과 교수는 환자의 머리맡에서 물러났다. 지금은 다른 수가 없었다. 누가 하든 산소가 고갈되어가고 있는 환자에게 호흡을 불어 넣어줘야 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도영이다. 손기술 좋기로 유명한 도영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포셉(forcep:겸자) 제일 긴 걸로 하나 갖다 주십시오.”
“네, 넵!”
“혹시 모르니 슈가마덱스(근이완제의 해독제)와 크리코싸이로도토미(cricothyroidotomy:윤상갑상막절개) 세트도 갖다 주십시오.”
“네, 교수님.”
수술방 안에 있던 포셉이 가장 먼저 준비되었다. 후두경을 들고 환자의 머리맡에 선 도영은 허리를 숙여 환자의 입속을 살펴보았다. 정말로 환자의 성대 근처에는 하얀 덩어리가 있었다.
‘저게 뭐지?’
그 덩어리는 성대와 기도 사이에 걸쳐져 기도를 떡하니 틀어막고 있었다. 말랑한 물체는 마취과 교수가 꺼내기 위해 노력했던 만큼 아무렇게나 일그러진 모양이었다.
“여기 포셉 준비됐습니다.”
포셉을 받아 쥔 도영은 환자의 입 속에 집어넣었다. 시선은 끝까지 흰 덩어리에서 떼지 않으며. 모니터를 보지 못하는 도영에게 간호사가 외친다.
“산소포화도 70프로 입니다!”
모니터에서는 저산소증을 알리는 알람이 끊임없이 울렸다.
“60프로입니다! 슈가마덱스 가져왔는데 인젝할까요?”
“네, 일단 주십시오.”
해독제를 주기는 했지만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당장 준다고 해도 작용이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프로포폴까지 고용량으로 준 상태라 근이완 상태가 풀린다고 해도 환자는 숨을 바로 쉬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포셉으로 꺼내는 것이 실패하면 지체 없이 바로 기도를 절개할 생각이었다.
“산소포화도 55프로입니다!”
이제 환자의 얼굴은 시퍼레지다 못해 시꺼메져 가고 있었다. 띠-띠-띠-. 수술실 안에 울리던 심박동 소리조차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교수님, 어, 어떡하죠. 이분 고령에다 TIA(일과성허혈박작) 과거력까지 있어요. 이러다가는 뇌 손상이 올 텐데요. 그냥 윤상갑상막절개를 하는 게 어떨까요.”
초조해하는 마취과 교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도영이 포셉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