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눈은 왜 자꾸 감는 건지2022.02.19.
“아, 어…… 그…….”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아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여전한 눈빛으로 혜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커다란 손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와 혜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다는 기시감이 또 들 때쯤. 남자의 손이 혜수가 걸친 가운의 옷깃에 닿았다.
“눈은 왜 자꾸 감는 건지.”
느릿한 말과 함께 혜수의 말려 들어간 옷깃을 꺼내 똑바로 정리해 준다.
‘아.’
혜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침에 거울을 보지 못하고 바로 나왔더니 옷깃이 말린 것을 몰랐다. 잠시 뒤, 목덜미에 느껴지던 간지러운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남자는 그사이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휙 고개를 돌려보니 그 짧은 시간 동안 꽤 멀리 걸어가 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간호사가 쿡 찔러온다.
“뭐해요, 선생님. 이식혈관이라면서요. 안 따라가요?”
“누구를요?”
“주도영 교수님 오셨잖아요.”
“어디요?”
“저기.”
간호사가 가리키는 손을 따라간 혜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분이 주도영 교수님이에요?”
어찌나 놀랐던지 혜수는 제가 소리를 치다시피 말한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세, 세상에.’
방금 지나간 저 커다란 남자가 제 담당 교수란다. 그것도 한대 이식혈관 외과의 간판 교수 주도영. 어려운 수술만 골라서 하면서도 성공률 100프로로 유명한 주도영. 잘생긴 얼굴과 잘난 몸으로 남자 여자 할 것없이 팬들을 몰고 다닌다는 주도영. 혜수가 모교인 선경대에 남지 않고 한대로 온 것도 한국 최고의 외과는 한대 외과란 이야기를 들어서다. 그런데 그 명성의 팔 할은 저 주도영의 지분이란 말이다.
‘저 사람이 주……도영.’
가은이 맞선남은 애들을 가르치는 직업이라고 했던 게 번뜩 떠오른다. 그 말을 듣고는 학교 선생님일 거라 단정했었다. 대학교수를 말하는 것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틀린 말은 아니기는 한데…….’
허옇게 질린 얼굴로 도영을 보고만 있으니 간호사가 또 쿡 찌른다.
“침 삼켜요.”
혜수는 여전히 벌리고 있던 입을 답싹 다물었다.
“그런 반응 이해해요. 처음 주 교수님 본 사람들은 다 그래요. 잘 생겼죠? 외모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죠? 전 맨 첨에 봤을 때 폴리클(학생 의사)인 줄 알았다니까. 워낙 동안이라.”
“…….”
“그런데 이렇게 굼뜨게 행동하시면 큰일 나요. 아까 인턴 샘 봤죠?”
간호사가 손날로 목을 한 번 긋고는 혜수에게 얼른 따라가라고 손짓을 했다. 경애는 언제 간 건지 벌써 도영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얼굴에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채다.
‘진짜로 망했다…….’
첫 단추를 제대로 잘못 끼웠다는 생각만 든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에게 몇 번이나 거짓말을 했고 면전에 대고 외모 비하도 했다. 비록 진심은 아니었지만. 게다가 어제는…… 뭐라 그랬었지.
‘벼, 변태 취급에다가 거지 취급도 했는데…….’
혜수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회진 자료들을 모아 쥐었다. 어쨌든 지금은 제 일을 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영과 함께하는 첫 회진은 잠시 미뤄졌다. 급하게 생긴 응급수술 때문이었다. 대동맥 파열 환자가 수술실로 밀고 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은 도영은 회진은 3시간 뒤에 돌겠다는 말과 함께 바로 수술실로 뛰어 내려갔다.
‘으아, 다행이다.’
덕분에 혜수는 회진 자료들을 한 번 더 훑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달달 외웠다. 그런 뒤에는 드레싱이나 검사 같은 병동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회진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소아 환자의 MRI 검사에 따라가는 것이었다. 아이를 돌보고 나서 다시 병동으로 올라왔을 때, 그곳엔 소란이 일고 있었다. 한 남자 보호자가 신참 간호사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는 게 아닌가.
‘저 남자 왜 저러고 있지?’
혜수는 스테이션으로 뛰어가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간호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선생님. 오셨어요. 저분이 자꾸 6인실을 달라고 그래서요.”
“지금 6인실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근데 아무리 설명해도 거짓말하지 말라며 말을 안 들어요. 우리가 돈 벌려고 없는 척하는 거래나.”
“누구 보호자인 거예요?”
“9호실에 정영순 할머니 아드님이에요.”
“아. 그 할머니.”
영순은 8일 전 도영에게 복강경 신장 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수술 전까진 6인실에 줄곧 있다가 딸의 요청으로 수술 후에는 중환자실에 있다가 2인실로 옮긴 상태였다.
“다 필요 없고. 의사 나와. 주치의 누구야? 당장 나오라고.”
남자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근처에 있던 환자와 보호자들도 무슨 일인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이 커지겠다 싶어 혜수는 간호사에게 낮게 속삭였다.
“제가 말해볼게요. 선생님은 보안요원 좀 불러주세요.”
“알겠어요. 선생님, 조심해요.”
혜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제가 주치의입니다. 저에게 말씀하시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험악한 시선이 혜수에게로 옮겨왔다.
“오호라, 너야?”
여자인 데다가 저보다 체구가 훨씬 작은 혜수가 만만해 보였는지 그는 입을 불룩거리며 다가왔다. 쿵쿵거리는 발걸음이 자신만만하다.
“네, 접니다. 어떤 게 불편하신가요?”
“우리 엄마, 누가 2인실에 넣으랬어. 2인실에 보내는 거, 다 너희가 돈 벌려고 그런 거 아니야!”
한층 더 높아진 목소리로 보호자는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병원이 수작 부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분명 수술 이후엔 충분한 휴식을 위해 2인실을 쓰게 해달라는 딸의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병실을 옮긴 것이었다. 혜수는 침착하게 천천히 설명을 해주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정영순 환자분의 따님이 수술 후 휴식을 위해 요청하셨습니다.”
환자 측의 요청으로 옮겼다는 얘기가 나오자 보호자는 순간 당황한 듯했으나 곧 원래의 험악한 표정을 되찾았다.
“돈을 누가 주는데. 돈 주는 사람이 난데 그걸 왜 나한테 안 물어보고 맘대로 옮겨!”
이제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한다.
“가족분들의 상황은 이해하겠으나, 저희는 그 당시 보호자님의 요청에 따라…….”
조곤조곤 설명하던 혜수는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보호자가 손으로 혜수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그러쥔 탓이다. 목에 느껴지는 아픔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 손. 놓으세요.”
“돈 내놔. 환불해 줘. 내 동의 없이 너네 마음대로 옮겼잖아. 병원비 환불해달라고.”
분을 못 이긴 보호자가 더욱 손에 힘을 주었고, 숨은 점점 막혀왔다.
“일단 손 놓고 말씀하…… 크윽.”
성대가 찌그러져 갈라진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보호자는 전혀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되레 목을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수술은 정확히 3시간 만에 끝났다. 보호자에게 수술 중 사망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까지 설명하고 시작한 수술이었으나 환자는 큰 문제 없이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죽을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나오는 것을 보며 보호자들은 도영에게 머리를 땅에 닿을 것처럼 숙여 인사했다. 중환자실로 간 환자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도영은 병동으로 올라갔다. 예고했던 대로 회진을 돌아야 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밖에서 고성이 들려온다. 평범한 외침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가 난동을 피우고 있는 소리다. 하필 소리는 이식혈관 외과의 메인 병동인 68병동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급히 병동으로 걸어가 보니, 눈앞에는 예상 밖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보호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자신의 주치의 신혜수의 멱살을 쥐고 있다. 남자는 혜수의 목을 흔들어 대고 있었고 잡힌 지 꽤 된 건지 혜수의 얼굴은 온통 시뻘게져 있었다. 언뜻 봐도 남자는 혜수보다 체격이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제 주치의에게서 저 인간을 뜯어내야겠다. 당장. 도영은 사나운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 기둥만 지나면 저 미친놈을 잡을 수 있다 생각하던 그때.
“이 손. 놓으세요.”
혜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느다랗고 갈라진 음성이었지만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스테이션에만 CCTV 4대가 있습니다. 그중 보호자 분을 비추고 있는 것만 두 대죠.”
CCTV란 말에 움찔한 보호자가 혜수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슬쩍 푼다.
“켁켁.”
공기가 갑자기 기도로 들이쳐 자극하자 저도 모르게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한참 기침을 한 혜수는 다시 보호자를 쳐다보았다. 얼굴은 빨갰지만 시선만은 맑고 곧았다.
“저는 지금 주치의로서 환자들의 상태를 보러 가야 합니다만, 보호자 분 덕분에 방해를 받고 있네요.”
“뭐라는 거야?”
보호자가 눈을 우악스럽게 치켜떴다.
“의료법 제12조. 진료 방해 시 5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 원 이하의 벌금.”
“뭐, 뭐?”
불퉁하게 일그러졌던 입술이 딱 벌어졌다.
“모든 것은 CCTV에 녹화되어 있겠죠.”
“나…… 난 그런 의도가 아니었…….”
보호자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두리번댔다. 정말로 저를 향하고 있는 카메라가 군데군데 보인다.
“허, 헉!”
그제야 혜수의 목에서 손을 뗀다. 손을 놓은 보호자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폭력도 가하셨죠. 폭행죄도 성립되겠군요.”
“그……그게, 아니구요.”
더듬으며 말하는 보호자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좀 전만 해도 혜수의 얼굴이 더 빨갰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 반대다. 기둥 뒤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는 도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겠는데?’
그러는 사이 보안요원이 도착했다. 제복을 입은 보안요원이 혜수의 등 뒤에 우뚝 서자 보호자는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보호자를 응시하던 혜수의 눈이 더욱 단단해졌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호자 분. 같이 가시겠습니까?”
“어…… 저…….”
“아니면 그냥 바로 경찰을 부를까요.”
경찰 이야기까지 나오자 보호자는 정말 큰일 났다 싶었나 보다. 말을 더듬으며 횡설수설한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그러니까 왜 마음대로 병실을…… 아, 어쨌든요. 이러려던 생각은 없었는데. 어쨌든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제가 뭘 잘 몰랐습니다.”
뒷걸음질을 치는 와중에도 제 할 말은 한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어머니가 있는 병실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저 사람 좀 보게.”
“어이없다. 정말.”
혀를 차던 혜수는 보안요원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상황이 정리되었으니 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경찰에 신고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보아하니 꽤 행패를 부린 것 같은데요.”
“…….”
혜수도 그러고 싶었다. 화가 난다고 제멋대로 구는 사람에게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 사람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도 기분이 나쁘면 쉽게 난동을 부릴 사람이다. 병원에서도 이러는데 다른 곳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정영순 님이 충격받으실 거야.’
그동안 봐 온 영순은 아들에게나 꽤 의지하는 듯했었다. 수술한 엄마를 자주 들여다보는 효심이 지극한 아들은 아니었지만 그런 아들도 늘 보고 싶어 하는 영순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제야 겨우 컨디션이 조금 회복되어 거동을 시작한 상태다. 아들이 폭력 문제에 연루된 걸 안다면 영순은 충격을 받을 것이고 그 때문에 회복은 더 더뎌질 것이다.
“이번에는 봐 주려구요.”
“알겠습니다. 담당 교수님께는 보고하지 않아도 될까요?”
“……네,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 전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안요원이 사라지고 구경을 위해 몰렸던 사람들도 흩어졌다.
‘오늘 일진이 사납네.’
아직도 보호자에게 잡혔던 부위의 피부가 따끔따끔하다. 기도는 어딘가 구겨진 채 막힌 느낌이다. 인턴 때 응급실을 돌면서 종종 술에 취한 환자나 화난 보호자를 직접 상대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꽤 겪었더니 이런 상황을 대처하는 데는 이골이 났다. 하지만 익숙하다 해서 짜증마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환자들을 보살피고 치료하는데도 하루가 부족한데 저런 사람들까지 상대해야 하다니. 응급실이었다면 저 막무가내인 보호자를 상대하느라 정말 위급한 환자를 놓칠 수도 있었다. 혜수는 힘이 쭉 빠져버린 어깨에 다시 기합을 불어넣었다.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아 환자들의 차트를 보기 시작했다.
‘일단 일하자.’
잠깐의 틈을 둔 뒤 도영은 스테이션으로 들어갔다. 도영을 본 혜수와 경애가 벌떡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