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망했다. 제대로 망했다. (5/110)

05. 망했다. 제대로 망했다.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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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789226579.jpg“시, 싫은데요.”

16550789226585.jpg“싫다, 라.”

혜수를 가만 보던 남자가 대뜸 손을 들었다. 키만큼이나 커다란 손이 혜수의 머리 위로 휙 다가온다. 아름답다 생각했던 남자의 손이 지금은 혜수의 이마 위에 위압적인 그늘을 만들어 버렸다. 혜수는 저도 모르게 양팔을 들어 머리맡에서 엑스 자로 교차한 뒤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건 겁먹은 사람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후회했다. 남자의 손에서 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한 행동이 제 이름을 그대로 드러내 버렸기에. 실수를 알아채고 눈을 다시 치켜떴지만 남자의 눈은 이미 혜수의 얼굴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혜수의 눈을 지나 코로, 입술로, 턱 끝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목을 지나서는 더 아래로 내려가 가슴 언저리까지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왼쪽 가슴에 붙어 있는, 자수로 새겨져 있는 세 음절의 이름에 그의 눈동자가 닿았다. 목적이 명확한 남자의 시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16550789226579.jpg‘망했다. 제대로 망했다.’

16550789226585.jpg“외과 의사 신. 혜. 수.”

나지막하지만 한 음절씩 또박또박 읽은 그는 손을 거두었다. 그의 손가락에는 혜수의 앞머리에 붙어있던 실밥이 달려 있었다. 병동에서 거즈를 좀 만졌더니 거기에서 빠져나왔나 보다.

16550789226579.jpg‘아…… 정말.’

망연자실한 표정의 혜수를 보고는 픽,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또 한 번 웃는다. 눈초리까지 가늘어진 게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16550789226579.jpg“……그래요. 저 신혜수예요. 김가은 아니구요. 속여서 미안합니다.”

16550789226585.jpg“…….”

16550789226579.jpg“미안해요. 진심으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는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16550789226579.jpg‘된 건가?’

사과도 분명히 했고 이 남자도 들은 것 같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세 발짝만 옆으로 걸어가 명찰을 잠금장치에 태그하면 숙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16550789226579.jpg“그럼 안녕히…….”

혜수가 옆으로 발을 쭉 뻗었다. 겨우 한 걸음 옮길까 하는데 남자가 따라와 앞을 막는다.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따라와 앞을 막고,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을 막는다.

16550789226579.jpg“왜, 왜 그러시는데요…….”

기어가는 혜수의 목소리에 남자는 빙글빙글 웃었다. 또다. 어제 느꼈던 ‘어떻게 요리해줄까’의 느낌이 또 든다. 뒷덜미가 쭈뼛하다.

16550789226579.jpg‘어, 어쩌지.’

어떡하면 저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던 혜수의 머릿속에 번뜩 생각이 떠올랐다. 잠시 뒤, 혜수가 팔짱을 척 꼈다. 단전에 힘을 잔뜩 준 터라 단단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50789226579.jpg“저기요. 거짓말 한 건 제가 잘못한 건데. 그쪽도 지금 잘한 건 없죠.”

남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16550789226579.jpg“여기 여자 숙소란 말이예요. 안을 그렇게 쳐다보시면 안 되죠. 누가 어떤 차림으로 다닐지 어떻게 알고.”

16550789226585.jpg“아.”

16550789226579.jpg“아가 아니라 제가 그쪽 지금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16550789226585.jpg“음.”

16550789226579.jpg“진짜 한다니까요?”

16550789226585.jpg“흐음.”

저를 변태로 몰아가는 혜수의 말에도 남자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듯한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 나쁜 짓을 하려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잡힌다면 죄를 가리기 위해 변명하기 바쁠 테니까.

16550789226585.jpg“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저걸 보고 있었는데.”

남자가 검지로 유리문 한 곳을 찍었다. 그가 가리키는, 불투명한 문 너머 복도의 바닥에는 무언가 놓여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았기에 혜수는 유리문에 바짝 얼굴을 갖다댔다. 조금 전 이 남자가 했던 것처럼. 그래도 보이지 않았다. 사각형의 윤곽만 보일 뿐 무엇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16550789226579.jpg‘저게 뭐지?’

인상을 쓰며 보고 있는데 남자가 중얼거렸다.

16550789226585.jpg“저걸 꺼내와야 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짜로 남자가 의심스러워졌다. 이 병원의 여자 의사들이 지내는 곳에 외부인 남자가 가져갈 물건이 뭐가 있단 말인가.

16550789226579.jpg“저걸 가져가야 한다구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89226579.jpg“저걸요?”

이번에는 혜수가 제 검지로 유리문 너머의 무언가를 찍었다. 남자가 또 고개를 끄덕인다.

16550789226579.jpg‘저게 뭐지?’

이쯤 되자 혜수도 저 물건이 뭔지 궁금해졌다. 아침에 이곳을 나올 때에는 복도에 아무것도 없었던 걸 기억한다.

16550789226579.jpg“그럼 제가 저걸 가져올게요.”

16550789226585.jpg“흐음?”

16550789226579.jpg“대신 제가 그 쪽에게 했던 말들이랑 가은인 척한 건 잊어줘요.”

16550789226585.jpg“…….”

16550789226579.jpg“알겠죠?”

혜수는 잽싸게 명찰을 태그하고 문을 열었다. 복도로 들어서서 남자의 손이 가리키던 곳으로 눈을 돌려보니, 그곳에는 커다란 초록색 플라스틱 상자가 놓여 있었다.

16550789226579.jpg‘이게 뭐야?’

상자 가까이 다가간 혜수는 어이가 없어 소리를 뱉었다.

16550789226579.jpg“하! 이걸 왜 가져가?”

유리문을 홱 쳐다보니 남자는 아직 문밖에 우뚝 서 있었다. 윤곽밖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상자를 보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혜수는 손을 쭉 뻗어 상자를 가리켰다. 정말 이걸 가지고 가려던 것이 맞냐고 묻고 싶었다. 남자의 실루엣이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나 싶어 상자의 주위를 한 바퀴 꼼꼼히 둘러 보았지만 이곳엔 이것밖에 없다. 혜수는 다시 손을 뻗어 상자를 가리켰다. 남자의 실루엣이 또 고개를 끄덕인다.

16550789226579.jpg‘아니, 이걸 왜 가져간다는 거야?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빨리 줘버리고 들어오자는 생각을 하며 혜수는 허리를 숙였다.   남자는 문밖에 서서 혜수가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복도 중간에서 멈춰 선 혜수가 손으로 제가 찾던 것을 가리키더니 이게 맞냐고 재차 묻는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허리를 숙인다. 이제 됐다, 꺼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유리문에서 눈을 떼고 휴대폰을 보았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를 않는다.

16550789226585.jpg‘그거 하나 갖고 나오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마침내 문이 빼꼼 열렸다. 뭘 그렇게 가득 들고 있는 건지, 혜수가 등으로 문을 밀고 나온다. 그리고 혜수가 가지고 나온 것들을 봤을 때, 남자는 제 눈을 의심했다.

16550789226585.jpg‘……왜?’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에게 혜수는 바짝 다가왔다. 들고 있던 것들을 휙 떠밀었고 남자는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16550789226579.jpg“여기요. 이걸로 그동안 제가 가은인 척한 거는 퉁쳐요. 하지만 앞으로는 안 드릴 거니까 찾아오지 마세요. 아까처럼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잖아요. 남들 보기 전에 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안녕히 가세요.”

속사포처럼 말을 한 혜수는 다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순식간이었다. 남자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혜수는 이미 사라졌고 제 양손은 가득 차 있었다. 제 손에 들린 것들을 보니, 절로 헛웃음이 난다.

16550789226585.jpg“하!”

혜수가 들고나온 것들은 음식들이었다. 매일 저녁 레지던트들의 야식으로 준비된 큰 상자가 숙소 입구에 놓인다. 거기에서 들고나온 빵과 컵라면, 우유들이었다. 나름 고르고 고른 것들인지 겹치는 맛들이 없다. 자세히 보니 나무젓가락도 사이에 꽂혀 있다.

16550789226585.jpg“지금 뭐 하자는 거지?”

거지 취급을 받은 것은 난생처음이다. 남자는 어이가 없어 제 손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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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소로 뛰어 들어간 혜수는 숨을 골랐다.

16550789226579.jpg‘그 남자는 아직 거기 있나?’

복도로 목을 빼꼼 빼보니 문 앞에 있던 실루엣이 사라져 있다. 혜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6550789226579.jpg‘왜 음식을 달라고 그러지. 배가 고픈가? 돈이 없나?’

남자의 겉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은 할 수가 없었기에 혜수도 의외였다. 만날 때마다 그가 걸치고 있던 옷과 신발, 시계들은 명품을 잘 모르는 혜수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들 같았으니까.

16550789226579.jpg‘하여간 이상한 사람이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오히려 정체를 들킨 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든다. 거짓말을 자꾸 하는 게 양심에 찔렸는데 다행이다. 게다가 나름의 사과도 했으니 저 남자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일 것이다.   다음 날 68병동. 혜수는 일찌감치 병동으로 올라가 차트를 다시 열어보았다. 오늘은 이식혈관외과의 교수를 만나 처음 회진을 하는 날이다. 인계장의 붉은 글씨처럼 절대 실수를 해서는 안 되는 날이니 더더욱 일찍 일어나 준비를 했다. 발표할 자료들을 훑고 있는데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남자가 병동으로 걸어온다.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창백한 피부, 흐리멍텅한 눈, 흐느적거리는 팔다리는 마치 좀비 같았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보안 요원에게 신고를 했을지도 모를 모습이었다.

16550789226579.jpg“누구예요?”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소리를 낮춰 물으니 인턴이란다.

16550789226579.jpg“근데 왜 다 죽어가요?”

16550789336597.jpg“지금 10분 바이탈(vital sign:활력징후) 중이세요.”

16550789226579.jpg“네?”

16550789336597.jpg“처치실에 안 좋은 환자 한 명 있거든요.”

16550789226579.jpg“네, 알아요.”

혜수의 환자는 아니었지만 들은 적 있다. 중환자실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일반 병실로 갈 정도로 좋은 상태도 아니라 처치실에 있다고.

16550789336597.jpg“교수님께 10분마다 바이탈 직접 보고 중이에요. 벌로.”

보통 혈압이나 맥박 따위의 활력 징후는 간호사가 기록한다. 게다가 보통 하루에 서너 번 하는 것을 10분마다 한단다. 아무리 상태가 안 좋아도 중환자실이 아닌 이상 짧아도 한 시간 간격인데. 10분마다 환자에게 가려면 다른 잡일은 물론이고 밥을 먹기도,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기도 힘들 것이다. 무슨 대역죄를 지었길래 저러고 있나 싶다.

16550789226579.jpg“왜요?”

16550789336597.jpg“당직 날 맥주를 한 캔 하셨대요. 교수님께 딱 걸린 거지.”

16550789226579.jpg“아…….”

엄청난 잘못을 하기는 했네. 그렇다면 혼나도 할 말은 없다. 혜수는 속으로 혀를 한참 찼다.

16550789226579.jpg“저걸 며칠째 하는 중인데요?”

16550789336597.jpg“6일요.”

입천장을 두드리던 혀가 떨어져 나가고 입술이 떡 벌어진다.

16550789226579.jpg“6일이나요? ……세상에.”

6일 동안이나 저러고 있는 거면 지금 몰골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비록 머리를 말리기까지는 못했지만 감고 나타난 것도 용하다.

16550789336597.jpg“첨엔 30분 바이탈이었는데 인턴 샘이 새벽에 졸다가 한 번인가 두 번인가 놓쳤대요.”

16550789226579.jpg“헉.”

16550789336597.jpg“그걸 놓치다니 간도 커라. 그래서 그 뒤로는 10분으로 바뀌었어요. 아예 졸지도 못하게 하겠다는 거지. 더 무서운 건 뭔지 알아요?”

16550789226579.jpg“뭔데요?”

16550789336597.jpg“언제 끝내겠다는 언질도 전혀 없단 거예요.”

16550789226579.jpg“아.”

끝날 기약이 없는 10분 바이탈이라니. 술을 마신 인턴도 인턴이지만 저런 벌을 내린 교수도 참 대단하다 싶다.

16550789226579.jpg“무슨 과 인턴인데요?”

16550789336597.jpg“외과. 그러니까 이식혈관요.”

16550789226579.jpg“!”

무지막지한 소문의 주인공인 이식혈관외과 교수가 인턴을 저렇게 만든 사람이란다. 혜수는 절로 식은땀이 맺힌 손바닥을 펴 가운에 닦았다. 처치실에 들어갔다 나온 인턴이 다시 흐느적거리며 사라지고 혜수는 다시 차트로 눈을 돌렸다. 어제도 충분히 외웠다고 생각했던 내용들이지만 넋이 나간 인턴을 보고 나니 또 새롭다.

16550789226579.jpg‘실수하면 안 돼. 실수하면 나도 저 꼴 난다고.’

혜수가 중얼중얼 외우는 소리가 병동에 퍼져나갔다. 곧 이식혈관 주치의를 맡은 또 다른 1년 차 이경애가 나타났다. 외과에서도 환자가 가장 많은 분과라 레지던트를 연차 별로 두 명씩 배정했기에 이식혈관만 주치의가 두 명이다. 지독한 교수 밑에서 한동안 같이 일을 하게 되었으니 나름의 동료애가 느껴졌다.

16550789226579.jpg“경애 언니,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인사를 듣지 못했는지 경애는 아무런 대답 없이 스테이션 안으로 들어왔다. 의자에 풀썩 앉더니 환자들의 차트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16550789226579.jpg‘내 인사를 못 들었나?’

몇 번 고개를 갸웃한 혜수도 다시 회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차트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병동에 흐르는 공기가 달라졌다. 회진 준비로 어수선했던 병동이 어느새 조용해져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흰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병동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장신의 남자가 곧은 자세로 걸어오니 주위를 압도하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꽤 먼 거리인데도 남자의 이목구비는 평범하지 않아 보였다. 남자가 점점 다가오고 그의 얼굴이 구별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혜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16550789226579.jpg‘저, 저 남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가은 대신 두 번이나 만나러 갔던 남자, 병원 카페에서 저를 노려보던 남자, 어제 간식거리들을 안겨줬던 남자가 병동에 나타났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한대 병원의 가운을 걸친 채라는 것이다.

16550789226579.jpg‘이게 무슨…….’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는데, 남자가 혜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당황한 혜수와는 다르게 남자의 움직임은 여유롭기 그지없다. 삽시간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공중에서 잠시간 얽혔다. 찔끔한 혜수는 눈을 피했지만 남자의 시선은 혜수를 집요하게 따라왔다. 남자가 스테이션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여전히 혜수의 얼굴에 눈을 박은 채. 커져가는 압박감에 혜수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마치 맹수를 목전에 둔 어린 동물이라도 된 것 같았다. 결국 남자는 혜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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